창조성 개념 Ⅴ
이 두 개념은 인간의 창조활동에서 두뇌에 대부분 맡겨져 있는 것과 손의 역할이 크다는 유형적인 구분에 대응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나 발명가는 대부분 두뇌만으로 경영되고 있다고 생각되고, 반대로 특히 조형미술가의 제작과정의 대부분은 손에 의해 옮겨지고 있다. 음악의 경우에는 이 두 가지 일이 분업의 형을 취하여 작곡가의 두뇌와 연주가의 손이 더불어 음악예술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창조에서 이론적으로 보아 해명이 충분한 것은 머리의 창조이다. 왜냐하면, 손의 창조는 머리와 손의 두 가지 계기가 존재하고 양자의 관계에서 설명 가능성이 보이지만 무의식적인 준비-회태(懷胎)의 단계를 인정한다고 착상 바로 그것은 일거에 나름대로 여전히 신비한 채로 남겨져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두뇌의 창조, 창조적인 사고(思考)에 관한 이론에서 일종의 피드백의 메커니즘을 지적할 생각이 존재하는 것이다.
‘창조적 사고(創造的思考)’즉, 단적인 두뇌의 창조를 몇몇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정의를 제출하고 있다.
‘창조적 활동은 단지 새로움ㆍ비인습성ㆍ지속성, 그리고 과제의 정식표현화에서의 곤란을 특색으로 하는 특정 클래스의 문제해결 활동인 것 같이 생각된다’. 창조적 사고는 ‘문제해결(problemsolving)’의 형태이며, 어떤 과제에 대해서 그 곤란을 해소하는 활동이다. 보통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미리 주어져 있다. 그러나 창조적 사고의 최후의 특색으로서 이 점을 부정한다. 다시 말해, 당초 나타난 과제는 막연하게 정확히 규정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과제에 대해 정식표현을 하는 것이 일부분이 된 것이다. 해결과 함께 문제가 처음으로 명확히 자각되는 종류의 문제해결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통상 인간의 지력(知力)으로는 명료하게 포착할 수 없는 과제일지라도 그 예감은 존재하며 지속적으로 탐구함으로써 해결한다는 문제를 인식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이러한 지연 혹은 전망이 좋지 않은 현상은 순수한 지성현상이 아닌 육체와 결합한 지성의 현상이다. 말하자면, 머리의 창조도 이미 손의 창조와 같은 메커니즘을 분유(分有)하고 있는 것이다.
손의 창조를 기본적 메커니즘으로 대표하는 것은 기술이다. 어떤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당분간 ‘주관적 창조’에 지나지 않지만, 방금 확인한 성격을 분명히 내보이고 있다. 기술이란 육체의 어떤 제어시스템이지만 그 습득과정은 한 번에 거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행 착오의 모방을 통해서 조금씩 신체로 기억되어 간다. 목표로 여겨지는 동작은 명료하다. 예를 들면, 연필을 칼로 깎을 경우, 요구되는 결과는 이미 밝혀져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과는 달리 신체적 인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 있다. 연필을 매끄럽게 깎을 수 있게 되고, 처음으로 이해되는 어떤‘느낌’이 존재한다. 시간이 걸리는 과정은 신체라고 하는 관성의 조직에 유래한다. 신체는 몸으로 움직임을 되풀이하는 것이며 그 개변(改變)은 조금씩 부분적인 수정을 거듭해 가는 것에 의해 처음으로 가능하게 된다. 신체의 이 구조는 위너(Norbert Wiener, 1894-1964)가 발견한 ‘피드백’의 메커니즘에 있다. ‘피드백’의 원리란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조사하고 그 결과의 선악으로 미래의 행동을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Norbert Wiener, 『인간기계론』71頁〉
여기에서 중요한 의심이 제기될 것이다. 피드백은 기술 이전의 간단한 동작을 이미 지배하고 있다. 눈앞에 있는 물건을 손에 들 때에도 눈으로부터의 정보 피드백에 의해 손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동작은 신체에 처음부터 갖추어진 기본적 능력이지만, 기술이란 노력에 의해 습득해야 할 능력이다. 기술은 자연상태에는 존재하지 않는 보다 고도의 목표로부터 요청된다. 피드백에 의한 설명은 이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아무리 고도의 기술이라고 할지라도 인간에게는 기본능력의 조합과 적용 이외에 수단은 없다. 특히 그 결과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신체에 축적되어 가는 것은 중요하다. 여기에 성장과 발전의 기초가 있기 때문이다. 기술은 이미 주관적으로는 창조성의 현상이라고 보아도 좋다.
그러면 그 한계를 더욱 돌파할 가능성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서도 과제-해결의 관계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기술의 경우 해결해야 할 문제는 확실히 처음부터 명료하게 선택되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에 달했을 때 처음에 가지고 있었던 과제의 인식과는 별종의 인식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은 언어적으로는 전할 수 없는 신체적인 인식이다. 예를 들면, ‘연필을 깎는다는 것이 이러한 것이었던가’라는 확신이다. 이것은 해결에 의해 처음으로 과제가 인식되는 구조를 이미 나타내고 있다. 기술의 창조성이 가지는 주관적 한계를 더욱 한층 넘을 가능성은 결과로서 얻을 수 있는 새로운 인식이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라 작품에서 결정하고 있는 것에서 요구될 것이다.
기술은 습득하는 동시에 그 실행에 있어서의 긴장이 느슨해진다. 긴장이 저하하는 이유는 그 과제가 한정되고 있어서 당초부터 도달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랜 시간적 과정을 거치는 손의 창조는 최후까지 긴장하게 된다. 그 이유는 항상 결과에 주의하면서, 그것이 의미가 있는 과제에 대한 해답인 것인가 아닌가를 확인 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 반대로 예술적인 기량의 습득과 함께 긴장이 높아지는 것도 있다. 그것은 인식이 세심하게 되어 과제가 보다 어려워져 오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결과를 보고 창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를 확인하는 것은 인간의 창조가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성격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은 ‘발견’을 의미하는 인벤션 invention)의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다. 일반적으로 ‘발명’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프랑스인들은 인간의 창조를 가리키는데도, cration(신의 창조만을 향해서 이용한다)과는 구별해서 이 단어를 이용하고 있다.
그 해결이 과제가 의미있는 것이라는 인식은 명증적인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예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새로운 경지에 들어갔다고 하는 반응보다 생생한 명증성이다. 그 새로움은 조만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한 후에도 신선함이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의 제작활동에 있어서의 절대적인 평균치라고도 하는 존재를 시사하고 있다. 기술적인 되풀이에 의해 실현하는 것이 가능해도 그것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영감을 이야기하고 싶어지는 혹은 은혜와 걸출한 능력에 뒷받침할 수 있었던 긴장이 필요하다. 이 경계선이야말로, 베토벤의 작품과 그 양식을 모방한 학생의 습작이나 컴퓨터에 의한 시뮬레이션(simullation)을 분류하는 것이다. 이 절대적인 기준을 초월하는 진정한 창조는 새로움의 명증성에 있어서 작자도 놀라게 하는 아름다움으로 현상(現象)해 온다. 전지 전능으로 결과를 전망하고 있었을 신마저 창조의 결과의 미를 즐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