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오는 풍경, 떠오르는 사진
최연하(사진평론가, 독립큐레이터)
사진을 일깨우는 풍경의 힘이 있다. 사진가가 다가서기 전에 기다렸다는 듯 풍경이 빛을 반사할 때가 있다. 그 빛, 매 순간 풍경이 선사하는 빛을 선물처럼 기뻐하며 사진을 촬영하는 자유. 생각해보면, 사진을 찍는 일은 빛나는 세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나누며 자유에 이르는 길이다.
사진가 자신이 주도권을 쥐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해 주의를 기울이고 그의 리듬을 존중하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저 받아들이는 것. 사진의 대상이 자연풍경이라면, 자연이 주는 똑같은 선물을, 똑같은 기쁨을 고스란히 돌려줄 줄 아는 것. 세잔이 생트빅투아르 산을 몇 백 번 다시 그렸듯이 이한구는 자연이 선사하는 매 순간 다른 빛을 찍고 또 찍으며 궁극의 자유로 향한다. 이한구의 작품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것은 대상에 닿았을 무수한 빛이 서로 밀고 당기는 가운데 면이 생기고 형태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빛의 순간들이 조각한 입체물이 이한구의 사진이다.
그간 자연풍경을 촬영한 사진이 심오한 구원의 자리로 쉽게 상승해 스스로 난해와 고립의 위험을 자초했다면, 그래서 사진에 너무 많은 기대와 실망을 반복 주입해왔다면, 이한구의 『태』는 이른바 사진의 ‘거창한’ 국면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작가는 형식에서 개방적이지만 나름의 완강한 미학적 규범을 포기한 적도 없다.
이한구의 사진으로 특별한 공감의 지평을 이야기해볼 수는 없을까. 이한구의 사진에서 공감을 일으키고 ‘틈(void)’을 만드는 ‘감각적인 체험’은 아름다운 것이 다가온다는 그 자체이다. 이제껏 사진가의 주체적인 시각에 의해 발견되고 규정된 미의 범주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것이 다가온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대개 풍경 사진은 사진가가 객관적인 관찰과 경험의 기록으로서 자연을 모방하는 것에 그치거나, 사진가의 지향성이 투사된 이상향을 구성하는 것으로 프레이밍 되어왔다. 관객의 감상의 폭이 상쇄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사진의 현상학과 존재론, 사진가의 진정성의 레짐(regime)을 중요하게 여기는 내게, 풍경 사진을 본다는 것은 사진가의 자리에 서서 추체험하는 일이다. 풍경 앞에 선 사람이 떠오를 때, 비로소 사진도 보인다. 빼어난 경치와 성스러운 장소, 신령스러운 기운도 그곳에 있었을 사진가의 눈이 될 때 감각하게 된다. 즉, 사진을 일깨우는 풍경의 어떤 힘을 감지할 때 사진이 드러난다.
이한구는 서정성을 좌표로 삼아 자연과 문화, 역사와의 접속을 시도하며 풍경의 신성한 인상이 숨 쉴 수 있게 사진에 틈을 내었다. 풍경이 다가오고 이한구의 사진이 흔들리며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 틈을 본 것이리라.
금정산 금샘, 팔공산 갓바위, 고성바다, 남해 금산 보리암, 인왕산 선바위, 창덕궁 후원, 태백 황지연못, 양주 범바위, 태백산 천제단, 북한산 승가사,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 대관령 국사성황당… 이한구가 찾은 우리 땅 곳곳의 마을과 산과 강 그리고 인간의 이야기가 어울려 빚어내는 풍경은 과연 승경(勝景)이라 할 만하다. 흑백 수묵화 같은 사진 속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검은 나뭇잎들이 하늘과 주고받는 한밤의 대화에서부터 부연 빛이 일어나는 새벽, 비 온 뒤 벚꽃잎이 총총히 박힌 낮의 바위, 저녁노을 속에서 피어나 서쪽 산을 휘감은 운무, 이윽고 밤이 되어 하얀 눈 속을 빠르게 달려가는 겨울나무들이 있다. 흔들리고 있는데 고요하고, 무언가 곧 일어날 것 같은 징후와 암시로 가득한 사진들.
이한구는 우리가 알고 있었던 익숙하고 보편화된 풍경의 아름다움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기보다 풍경의 틈을 가시화하고 있다. 이를테면, 화려하고 선정적인 굿판의 퍼포먼스와 무당과 구경꾼이 사라진 자리에 흐르는 깊은 슬픔과 서정, 먼 산이 보내는 공간감 같은 것이다. 이한구의 탁월함이 발휘되는 지점이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의미심장하게 큰 시퀀스가 아니라 “희미하고 약하지만 지워지지 않는 존재” 2024년 4월 9일,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이한구가 자신의 사진에 대해 한 말이다.
들의 웅얼거림처럼, 시의 행간 같은 사진이다. 이러한 풍경은 모두에게 똑같이 다가와도 모두에게 동일하게 포착되지 않는다.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물고, 몇 번씩 찾아가 수없이 셔터를 누른 사람의 신체가 감지하고 반응할 수 있는 차원이다. 이한구의 사진이 ‘희미하고 약하지만’ 강렬하고 밀도 높은 이유도 대상과 사진가가 서로 흔들리며 사진이 되어가는 감응의 순간이 녹아들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은 여지없이 여백과 흔들림을 낳고, 검고 하얀 덩이들이 출몰하거나 대기(atmosphere)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순리 아닐까요?” 이한구의 말이다.
이한구의 진정성의 레짐, 『태』
사진학을 전공한 청년 이한구는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사람과 산》 잡지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한다. 첫 직장이었다. 한 달에 20여 일은 족히 산과 산 아랫마을에 있었다. 가까운 북한산부터 먼 히말라야까지 카메라 장비를 지고 수없이 오르내렸다. 산악 전문사진가로서 다기한 탐험과 모색, 단련의 이력이 곧 누구나가 인정하는 이한구 사진의 장인적 견고성의 다른 이름임은 물론이다.
올해로 사진을 한 지 37년. 그동안 작가는 사진 장르에 대한 메타적 물음을 내장한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다. 사진과 삶, 사회를 화두로 한결같은 보폭을 유지하려 애쓰며 찍고 또 찍었다. 이한구의 사진을 향한 일관이 이제쯤 도달한 원숙의 지점이 『태』다. 이 사진집에 실린 작품들 모두에서 이미지의 틈을 보여주는 역동성과 성스러운 장소의 빛과 그늘이 선명하고 투명하게 드러난다.
일상의 영역에서 신성하게 구분 지어진 ‘성소temple’의 어원에 ‘자르다(tem)’라는 의미가 뿌리어로 자리한다. 한반도의 성스러운 장소와 몸짓을 담은 사진집 『태』를 이한구 사진의 ‘temple’로 비유해도 될까.『태』라는 또 하나의 깊고 뚜렷한 한국 사진의 사원이 생겼다. 사진이 거부하기 힘든 리얼리즘의 기율을 이한구만의 고유한 사진적 스타일과 세련된 장인성으로 녹여낸 의지의 결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