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제남 작가의 '아! 광화문'
1447년 4월 20일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은 평생 잊지 못할 꿈을 꾼다. 절벽과 복숭아밭으로 가득한 무릉도원을 꿈에서 생생하게 본 것이다. 안평대군은 꿈의 내용을 안견에게 설명하여 그리도록 하였고 사흘 만에 그림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 그림은 매죽헌에서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라는 제서(題書)를 달게 되었다. 기암절벽 위에 복사꽃이 만발하고, 초막과 폭포수 아래 빈 배가 보이는, 바로 그 유명한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라는 걸작이다. 그리고 이러한 화풍은 이후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와 대비되는 관념 산수화로 불리게 된다.
그림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는 그 사흘 동안 안평대군은 자신의 꿈이 화폭에 구현되는 과정을 얼마나 설레며 기다렸을 것인가. 또한 완성된 몽유도원도를 보며 자신의 꿈이 영원히 후세에게 기록되고, 남겨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만족스러웠을 것인가. 그 누구나 자신이 꿈꾸고 경험하며 그리는 관념과 이상이 실제로 구현되기를 소망하며, 그러한 구현에 있어 그림만큼 빠르고 현실성 있는 작업은 없기 때문이다.
신제남 작가의 작업도 일종의 현대판 관념 산수화라 부를 수 있을까. 횡적으로는 공간상으로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역사의 흔적들을 한 폭에 배치하고, 종적으로도 시대를 가로질러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인물이나 사물들을 공존시킨다.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의 공존은 한 화면 내에서의 팽팽한 긴장과 압력을 가져온다. 이러한 긴장과 압력은 몽유도원도의 유토피아와는 사뭇 달라 보이지만, 작가의 관념을 마음껏 사실적으로 구현한다는 점에서 관념 산수화에 가깝게 보이기도 한다.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의 선언문>에 의하면 초현실주의는 “지금까지 소홀하게 취급된 연상 형식의 보다 한 차원 높은 실제에 대한 믿음, 꿈의 전지전능한 힘,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유의 유희에 대한 믿음” 에 기초한다. 즉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이자 꿈을 그림을 통해 표현해 나가며 궁극적으로 의식(현실)과 무의식(꿈)의 경계를 해체시키고자 한 것이다.
신제남 작가는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을 공존시키는 정교한 배열을 통해 ‘보다 한 차원 높은 실제에 대한 믿음’을 드러낸다. 한 차원 높은 관점에서 시대를 바라봄으로써 오히려 적나라한 현실을 드러낸다. 즉 초현실의 관점에서 현실을 더욱 자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위의 작품에서 신제남 작가는 조선총독부 건물 정면에 과감하게 거북선을 디밀었다. 물론,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그림으로 구현했다는 점에서 여전히 초현실주의 작품이다. 그런데 작품이 완성된 후 얼마 되지 않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수많은 반대를 넘어 조선총독부의 철거가 결정되고, 광복 50주년 기념으로 건물의 중앙돔이 해체되었으며, 광화문의 보수공사 과정에서 가림막 그림을 신제남 작가가 맡아서 그리게 된 것은 과연 우연일까.
그림 속에서만 가능했던 초현실이 ‘한 차원 높은 실제에 대한 믿음’ 속에서 실제 역사적 현실로 구현된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꿈은 구현되었고 초현실과 현실의 경계는 무너졌다. 이순신의 거북선이 밀어붙인 조선총독부가 무너지며 신제남만의 유토피아가 현실에서 구현되었다.
안평대군의 입에서 흘러나와 안견의 붓끝을 거쳐 구현된 무릉도원 또한 수많은 또 다른 관념산수화로 이어지며 초현실에만 머물지는 않았다. 오늘날에도 유토피아의 구현은 작품 속에서 또 하나의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
작가로서 자신의 비전과 야망을 캔버스에 구현하고, 그것이 실제로 현실화되는 것, 그 이상의 희열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왜 스스로를 화공이 아닌 작가라고 부르는가. 캔버스에 자신만의 세상을 창조하기 때문일 것이다.
필자를 포함한 모든 작가들이 궁핍해져도 붓을 꺾을 수 없는 이유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을 통해 또 하나의 세상을 붓으로 창조하는 작가(作家)이기 때문일 것이다.
백지상 프로필
상담심리학 박사. 서양화가. 호주국가공인 예술치료전문가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외래교수. 치유예술작가협회(HAA)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