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 #1
유태인 포로수용소에서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실존치료라는 심리치료이론을 창시한 빅터 프랭클 박사는 폭력과 죽음이 난무한 수용소에서 자신도 굶주리면서도, 더 힘든 동료에게 마지막 빵을 건네는 이를 보고 큰 영감을 받았다.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는 말로 유명한 프랭클 박사는 우리의 삶에는 세 가지 가치가 있다고 제안하였다. 즉, 활동을 통해 실현되는 창조적 가치와 자연이나 예술의 아름다움에 몰입하는 경험적 가치, 그리고 태도적 가치가 그것이다.
이 중에서도 태도적 가치란, 주어진 삶과 환경은 변화시킬 수 없다 하더라도, 그 삶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의 태도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가장 고통스러운 환경에서라도 스스로 고귀함을 선택할 수 있음은 바로 이 태도적 가치에 있다. 이 태도적 가치야 말로 우리 인간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비결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나는 너를 창조할 수 없고
너도 나를 창조할 수 없지만
나, 너를 만나 '우리'의 세계가 창조되네.
그 안에서 우리는 서로 조금 닿을 수 있네
내가 너를 어떻게 바라볼지 네가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그리고 우리의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지
우리는 아주 작은 창조는 할 수 있네
-작가 노트 중에서-
필자는 20년 넘게 심리 상담을 하면서, 내담자들로 하여금 주어진 환경은 바꿀 수 없어도 생각과 관점을 바꿔서 결국 삶과 관계를 다르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왔다. 이를 테면, 부모나 자녀는 바꿀 수 없다 하더라도, 내 자신을 바꿈으로서 그들을 보는 관점이 달라지게 되는데, 이는 결국은 서로의 관계를 질적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또한,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은 어쩔 수 없지만 그 환경을 보는 생각과 가치관, 즉 태도가 달라지게 되면 그의 삶이 시간 속에서 결국은 긍정적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을 수없이 확인하였다.
수년 전, 한 40대의 주부가 이혼을 고민하며 상담실을 찾아왔었다. 남편에 대한 경제적 불만으로 가득했던 내담자는 이혼을 할지 말지 선택함에 있어서 필자의 도움을 받고자 했었다. 막상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이혼으로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따져보고 나더니 내담자는 이혼하지 않고 그냥 사는 것이 낫겠다고 결심하였다. 그 후 내담자는 놀랍게도 남편 대신 사업가로 변신하였고, 숨겨져 있던 능력이 발휘되어 사업이 꽤 커져서 경제적으로 훨씬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그러고 나니 경제적 능력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모두 문제가 없었던 남편이 다르게 보였고, 지금은 오히려 잉꼬부부가 되었다.
창조란 이런 게 아닐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순 없지만, 나 자신의 선택을 통해 다른 관계를 창조할 수는 있다. 우리는 신이 아니기에 주어진 세상을 창조할 수는 없지만, 나 자신의 관점을 다르게 하여 다른 삶을 창조할 수는 있다. 우리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지만 그렇다고 창조의 능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의 한계 내에서의 겸손하고 소박한 창조이기에 위의 작품에서 생명을 막 잉태한 이 비너스의 눈은 겸허히 내리깔고, 두 손은 보이지 않는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삶이 무엇인지, 왜 사는 것인지 우리가 질문을 던지기 전에, 삶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고 하였다.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살아가면서 실존으로 삶에 진지하게 답해야 한다.
백지상 프로필
상담심리학 박사. 서양화가. 호주국가공인 예술치료전문가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외래교수. 치유예술작가협회(HAA)부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