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彼岸)Ⅰ

소녀는 푸른빛이 도는 옷을 입고 언덕 위에 서 있다. 이 쪽 언덕에는 풀이 무성하지만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저 쪽 언덕은 바람이 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막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정상 부근엔 미처 녹지 않은 눈들이 남아 있기도 하다. 이 언덕에서 저 언덕까지 이르는 길에 이 소녀에겐 어떤 일이 벌어질까. 또 저 언덕 너머에는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백지상, 피안(彼岸)_65.1x53_acrlylic on canvas, 2020                               
              백지상, 피안(彼岸)_65.1x53_acrlylic on canvas, 2020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풀 한 포기 없는 심심함을 견뎌야 한다.

-작가 노트 중에서-

 

이 작품은 나의 연구실 벽에 붙어 있다. 연구실을 방문하는 내담자들의 이 그림에 대한 반응은 모두 다르다. 어떤 내담자는 이 소녀가 너무 외롭고 막막해 보인다고 한다. 어떤 내담자는 바람이 시원해 보인다고 한다. 어떤 내담자는 이 소녀가 이 산을 다 건너가면 호수가 있고, 그 호수에서 백마 탄 왕자님이 기다릴 것 같다고 한다. 어떤 내담자는 이 소녀가 고행의 길을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대학 입시를 앞둔 학생의 경우 입시생의 고단함을 떠올리기도 한다.

같은 그림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왜 이렇게도 다른 것인가. 이는 이 그림이 의도적으로 그려진 투사적(projective) 그림이기 때문이다. 투사(projection)라는 용어는 정신분석에서 '자신이 받아들일 수 없는 욕망이나 충동들을 다른 사람에게 귀인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러한 투사를 활용해서 오히려 사람들의 심리를 테스트할 수 있는 도구, 즉 투사적 검사라는 것이 그림을 활용해서 다양하게 개발되었다. 투사적 그림검사란, 몇 개의 간단한 지침을 주고 그림을 그리도록 해서, 다양한 반응을 도출하고 이를 해석한다. 미술치료를 조금이라도 접하거나 배운 적이 있는 분에게 아주 익숙한 집-나무-사람(HTP) 그림 검사 등이 그것이다.

상담심리전문가이기도 한 필자는, 심리와 예술의 연결을 꿈꾸고 시도해왔다. 그 중의 하나는 투사적 그림을 제작하고,  이 그림들이 실제로 어떻게 투사되는지를  전시를 통해 수백 명에게 확인하여 분석한 후 워크숍에서 활용하거나 내담자들에게 적용해온 것이다. ​

 

    필자의 개인전을 통해 관객들의 심리적 투사를 확인하는 과정(2020년, 갤러리 라포애)
    필자의 개인전을 통해 관객들의 심리적 투사를 확인하는 과정(2020년, 갤러리 라포애)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한 번 위의 그림을 찬찬히 감상해보면서 다음의 질문에 답해보면, 그림 속에 비친 자신의 마음을 읽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소녀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소녀는 어디로 가려고 하는가?”

“저 산의 끝에는 어떤 장면이 펼쳐질 것 같은가?

“이 소녀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정답은 없다. 만약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의 마음 안에만 있을 것이다. 우리 인간의 눈은 밖으로 달려서 타인은 잘 보여도 자신의 내면을 보기는 어려운 구조이니, 투사적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내면을 한번쯤 살펴보시길 바란다. 예술은 때로는 감상의 대상에 한정되지 않고, 관객들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비춰주는 거울이 되기도 하니까.

 

백지상 프로필

상담심리학 박사. 서양화가. 경희대학교 겸임교수

치유예술작가협회(HAA)부회장, 호주국가공인 예술치료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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