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석장에서 망치와 끌을 가지고 놀던 천재 소년 >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부분도 (1508년 ~1512년)
피렌체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카프대제 미켈란젤로(Caprese Michelangelo)라는 마을에 미켈란젤로의 생가와 박물관이 조성되어있다. 박물관은 약 100년 전에 지어진 고대 카프레 성에 위치해 있다. 주변에는 1297년에 지어진 오래된 석조건물인 세례 요한 교회가 있는데 이곳은 미켈란젤로가 세례를 받은 곳이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생가는 천정화 장식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박물관이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성 베드로에서 <피에타>를 조각했을 때는 24세였다. 당대 인기 절정을 누리며 유명한 시대를 보냈다. 이어서 <다비드> 조각상으로 유명해졌는데 조각상이 세상에 공개되자 세간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그 영향으로 작품 주문을 연속적으로 받고 매우 높은 평가와 함께 영웅 대접을 받았다. 그는 메디치가의 영향으로 16세기에 대리석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한 조각가였다. 놀랍게도 살아 있는 동안에 전기가 출판된 최초의 예술가였다.
삶에 있어서 누구를 만나서 어떤 영향을 받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인데 어린 미켈란젤로는 채석장이 있는 마을에 사는 유모에게 맡겨졌다. 유모의 남편이 석수장이여서 어린 아이는 망치와 끌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하였다. 그것이 위대한 조각가로 되는 계기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곧 재능을 알아본 당시 피렌체를 통치하던 메디치 가문의 초빙으로 15세에 팔라초 메디치에 갔다. 메디치의 궁전 정원에서 고대 조각품을 연구했다. 메디치가 설립한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휴머니즘 아카데미는 시인, 예술가, 지식인으로 이루어져서 미켈란젤로는 다양한 지식을 얻고 도움을 받았다. 메디치는 예술에 대한 진정한 마음으로 젊은 예술가를 지원해 주었다. 메디치의 저택 정원에는 ‘대리석 정원’이라는 장소를 갖춰 놓고 비싼 대리석을 마음껏 활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회화 교습을 제대로 받지 못한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그리게 된 것은 순전히 율리오 2세가 협박조로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난생 처음 시도한 벽화 일은 <최후의 심판>을 완성하기까지 허리가 꺾이는 고통을 겪었다. 4년 동안 발판 위에 누워서 경직된 자세로 일해야 했다. 이로 인해 관절염과 근육 경련을 얻었다. 더군다나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감 때문에 눈병도 생겼다. 씻는 것은 고사하고 먹고 마시는 것도 거른 채 작업에 매달려야 했다. 일어나서 바로 작업하기위해 신발을 신고 작업복을 입은 채 잔 적이 다반사였다. 설상가상으로 교황은 제때 임금을 주지 않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고귀한 예술가가 아니라 지독하게 고통을 받는 노동자의 환경이었다.
동시대인들은 경외심을 갖고 미켈란젤로의 능력에 감탄을 했다.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조각가이자 화가였으며 건축가였다. 그의 작품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통찰력과 조화로운 신체의 균형을 보여주었다. 그는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았다. 그래서 특히 교황과 가톨릭교회와 당시 가장 부유하고 강력한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후원을 받았다. 그러나 타협을 할 줄 모르는 성급한 성격으로 인간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그 결과 곤경에 처했으며 비난을 받았다. 특히 조각 작업은 혹독하고 거친 노동으로 몸이 혹사되기 일쑤였다. 매일 돌가루를 뒤집어쓰는 극한의 직업이니 명성이 높아도 그의 삶은 어디에서도 보상받을 수 없었다. 현재 <다비드>상은 피렌체에 남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와 예술적 유산의 상징이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