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대에 성공한 15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서양 미술사를 살펴보면 아버지가 궁정 화가였던 화가들은 확실히 신동이 많은 편이다. 그들은 남보다 일찍 명성을 얻어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아버지는 르네상스 시대에 성공한 금세공인이었으며 어머니도 금세공인의 딸이었다. 뒤러는 어렸을 때부터 유복한 환경이면서 천부적인 재능까지도 있었다. 일찍 독창적인 화풍을 개발하여 미술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독창적인 재능의 소유자로 북유럽의 다빈치라 불렸다. 특별한 것은 세계 최초로 화가 브랜드를 구축한 예술가로 이를 통해 빠른 명성은 물론이고 많은 돈을 벌었다. 또한 역사상 최초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나이 28세 때에는 이미 원숙한 이미지의 독특한 자화상으로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그런데 자신을 예수로 신격화했다는 논란이 있었다. 뒤러는 20세기의 베르나르 뷔페(Bernard Buffet)처럼 20대에 이미 부와 명성을 모두 얻은 화가였다. 그런 자신감 때문인지 모피 소재의 고급스러운 외투를 입고 다갈색의 머리카락에 붉은 수염의 자화상은 마치 예수 모습을 패러디한 듯하다. 종교적인 확신에 찬 자화상은 특별했는지 뉘른베르크 시의회에서 구입을 하여 19세기 초까지 공개 전시되었다.
20대 초반에는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서 예술적인 견문을 넓혔으며 다양한 장르로 곳곳에 천재적인 면모를 발휘하였다. 유럽 전역에서의 명성과 영향력을 확립한 삶은 소상하게 기록으로 남아있다. 뒤러는 베네치아에서 상당히 많은 인정을 받았다. 독일 상인 공동체를 위해 많은 그림을 그렸다. 특히 그는 기독교 주제의 목판화 연작들로 세계 최초로 명성을 얻은 화가가 되었으며, 16세기 초에는 유럽 여행을 통해 황제와 직접 교류를 하였다. 각지의 지식인과 교류도 하며 중부 유럽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합스부르크 막시 밀리안 1세는 뒤러를 후원하고 거장의 대우를 해주었다.
아내와 함께 많은 나라로 여행하는 동안 모든 곳에서 스타처럼 열렬하게 환영을 받았다. 영주들과 각국의 대사, 예술가들이 그를 열렬하게 찬양했다. 또한 대학자인 에라스무스와 같은 지식인들을 만나서 왕성한 교류 활동을 하였다. 새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도 그에게 특권을 주었다. 종교화가 대세인 시대에 그는 마치 영웅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뒤러는 구텐베르크에 의해 촉발된 인쇄물 유통망을 활용하여 유럽 전역에 판매한 최초의 화가로 가는 곳마다 많은 선물과 상을 받았다. 복제가 가능한 판화와 출판 인쇄물은 무한정 찍을 수 있어서 엄청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승승장구하던 뒤러에게 또 다른 행운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서양 미술사 최초로 화가가 삽화를 그려 인쇄한 <요한계시록>을 출간한 것이다. 목판화 15점을 성서에 삽입하였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1,500년을 세상의 종말로 생각하며 불안해하던 시기로 절묘한 때에 출간한 책에 많은 관심으로 대성공을 하였다. 뒤러는 많은 자본을 투자해서 숙련공에게 목판을 제작하고 직접 책을 출간하였다. 요한계시록은 베스트셀러가 되어 평생을 쓸 돈을 벌어들였다. 그는 유럽에 판화의 호감을 확산시킨 장본인이 되었다.
당대 예술가들은 대부분 조수를 두고 작품을 제작했다. 뒤러의 작품에 판화가 많은 이유는 그가 밑그림을 그리면 제자들이 판화를 새겼다. 이런 공방 시스템이 성공의 요인이 되었으며, 그도
직접 작업을 했다. 그는 곧 뉘른베르크 시청사의 장식을 모두 책임지는 권위자가 되었다. 결국 자신의 사용하던 출판사 건물을 전체 매입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