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투(Yatoo)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Ⅰ
윤 진 섭(미술평론가)
한국미술사상, ‘몸’을 이용하여 순수하게 자연에 접근해 들어간 최초의 미술단체 <야투(野投/Yatoo)>가 내년이면 어느덧 창립 45주년을 맞이한다. 매우 뜻깊은 해이다. 전 세계 미술의 역사를 봐도 <사계절연구회>를 중심으로 한 야투와 같은 자연미술 운동은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등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강이나 산, 들, 바다로 나가 자연에 몸을 맡긴 야투의 회원들은 이제 총 168회에 해당하는 <사계절연구회>의 기나긴 역사를 맞이하였다.
<야투>는 1981년 공주에서 결성된 자연미술 단체다. 공주와 대전에 거주하는 젊고 패기에 넘치는 20-30대 스무 명의 작가들이 자연을 주제로 모여 자연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창립회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강희순, 곽문상, 고승현, 김영철, 김지숙, 나경자, 박수용, 신현태, 이동구, 이순구, 이응우, 임동식, 조충연, 정봉숙, 정영진, 지석철, 함상호, 허 강, 허진권, 홍오봉(가나다 順)
1981년 8월 14일 이 일단의 젊은이들이 공주 시내를 관통하는 금강 철교 아래 백사장에 모였다. 야투의 ‘역사적’ 출범이다. 1961년생부터 1945년생에 이르는 이들은 19일까지 5박 6일간 야외에서 숙식을 함께 하면서 작업하였다.
당시 이들이 자연에서 행한 작업은 어떤 내용이었는가? 이해를 돕기 위해 도록에 기술된 작업내용 중에서 일부를 골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고승현: 폭 4m, 길이 7m의 비닐에 1m 정방의 네모난 틀을 만들어 씌우고 이것을 여러 개 사장에 설치한다. 강바람의 변화에 의해 네모난 틀에 씌워진 비닐은 팽창과 수축을 계속하며 각양의 동태와 소리를 낸다.
⁕김영철: 금강에 와서 야투에 참가하기 위하여 서울 자택 출발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는다. (작품에 대한 구상, 세면도구에 이르기까지) 현장에 와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히 쉬고 물과 그늘을 찾아 심호흡을 하고, 산책도 하며 완전 휴식을 취하다 상경하는 무작위한 상태를 보인다.
⁕김지숙: 금강의 게를 여러 마리 잡아서 오색의 풍선에 매단다. 게의 움직임에 따라 풍선의 바람에 의한 진동에 따라 금강 변은 경관을 이룬다. 순수한 어린아이들과 함께 물에 띄울 때 물속의 게의 움직임에 따라 풍선도 아이들도 함께 움직인다.
⁕정봉숙: 강의 제방쪽 풀숲에 다량의 바람개비를 만들어 설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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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주해)
1) “야투 자연미술연구회는 1981년 그해 여름 공주 금강 백사장에서 5박 6일 동안, 강변에 설치한 야외숙소에서 숙식을 같이 하며 함께 작품연구를 시작한 20명의 젊은 회원들로부터 창립을 보게 되었다. 당시 기간 중에는 청명한 날씨에서부터 심한 천둥 번개를 동반한 강풍이 몰아치기까지 예기치 못한 변화가 잦았고 흐르는 금강물은 낮에는 물이 줄고 밤에는 크게 불어났으며 밤낮으로 들려오는 풀벌레의 소리 등등 자연의 소리가 충만하였다. 이와 같은 일절의 자연현상들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항상 신선한 감흥과 의식을 깨우쳐주었고, 더불어 자기표현과 그 실현이 가능하도록 해 주었다.”
고승현, 충남미술그룹소개 야투자연미술연구회, 충남예술 12, 1987,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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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태: 강물에 떠내려온 흰 나비 한 마리를 건져내어 풀 위에 가져다 놓아 살게 한다.
⁕이동구: 휘어지는 가느다란 나무로 사장에 생존하는 풀포기 하나를 중심으로 원으로 울타리를 설치한다.
⁕이응우: 금강물 바닥에 있는 돌을 꺼내어 물에서 모래로 돌다리를 놓아가며 나온다.
⁕허 강: 나무배 50여 개에 촛불을 켜 야간에 강에 띄운다.
⁕허진권: 완전 탈의한 나신이 되어 물에 뛰어든다. 한동안 수영도 하며 소리도 지르다가 모래로 나와 모래로 전신을 덮은 다음 뒹구는 동작으로 물에 잠긴다.
이상의 내용은 당시의 현장 상황을 살펴보기 위해 기술한 것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자연을 대하는 <야투> 창립 회원들의 공통적인 시각이다.
우선 눈여겨봐야 할 공통적인 사실은 예시된 문장 전체에서 주어가 생략됐다는 점이다. 1981년 창립전 이후 발행된 ‘야투’의 도록에 실린 작가노트에는 모두 주어가 생략돼 있는데, 이는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그러면서도 말이 통하는데 ‘3표론’을 주창한 철학자 박동환에 의하면, “주어의 자리에 어떤 정체성도 결정하지 않고 미지의 사태로 남겨두고 기다리는 태도가 지배하는 한국어는, 인간중심주의의 철학체계를 만들어내기 이전의 사유가 화석으로 남아있는 언어라는 것” 이다.
이를 참고삼아 정리하면, 야투 작가들의 작업 기술(記述) 방식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목적어+술어 예) 강물에 떠내려온 흰 나비 한 마리를 건져내어 풀 위에 가져다 놓아 살게 한다.(주어의 생략)
이러한 문장구조는 주어가 생략되면 비문(非文)이 되는 영미권 언어의 서술방식과 대조적이다.
예) met him(x)
I met him(o)
말하자면 주체(I)가 생략되면 곧 비문이 되는 것이다. 예외가 있다면 명령문의 경우이다.
예) Go. Eat, etc.
그런데 앞에 든 예문에서 도대체 누가 강물에 떠내려온 흰 나비 한 마리를 건져내어 풀 위에 가져다 놓았다는 것인가? ‘나’인가, 영수인가, 아니면 순희인가? 이를 보다 이해하기 쉽게 정봉숙의 문장을 예로 들면, “(순희는) 강의 제방쪽 풀숲에 다량의 바람개비를 만들어 설치한다.”는 문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작가 정봉숙이 순희에게 바람개비를 만들어 설치하도록 지시할 수도 있지만, 도록에 수록되는 야투의 텍스트 기술 관행을 고려할 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우의 문장 기술에서 주어(나)가 생략돼도 (그 일을 수행하는) ‘나’의 현실과 일치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합리주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명제는 서구의 인간중심주의 사상을 대변한다. 그러나 같은 의미의 영어 “I think, therefore I am.”에서 주어인 ‘I’를 소거하면, 명령형이 되거나(think), 비문(非文)이 된다(therefore am). 그러나 한국어는 다르다. ‘야투’의 경우 주어가 생략돼도 비문이 되지 않으며, 행위의 주체로서의 ‘나’가 유지되고, 자연 속에 녹아든다.
이번에는 훗날 행해진 사계절연구회 회원의 경우를 보자. “여러 곳의 나뭇가지에 먹물이 묻은 붓을 줄로 매달에 놓고 바닥에는 흰 종이를 설치한 다음에 바람결에 맡긴다(강희준)”는 자신의 신체를 자연에 빌려줌으로써(최소한의 개입), 자연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하도록 ‘맡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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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주해)
2) 1981년 창립전 이후 발행된 ‘야투’의 도록에 실린 작가노트에는 모두 주어가 생략돼 있는데, 이는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될 매우 특이한 현상이다.
3) 철학박사 이상수의 글 중에서, <철학을 넘어선 철학자 박동환의 특별한 선집>, 한겨레신문, 2017년 3월 30일자(수정) 네이버 검색, 2022. 12. 5. 굵은 체의 기운 글자는 필자의 강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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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에서 주어가 생략돼도 의미가 통하는 것은 언어 이전의 자연의 상태로 거슬러 올라가고자 하는 시원적 몸짓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임동식의 다음과 같은 발언은 의미심장하다.
“자연을 바라볼 때 마음을 비우고 나갔죠. 무엇을 하려는 목적으로 나가기보다는 준비없는 마음으로, 비우는 마음으로 현장에 나가 일깨움 비슷한 것이 일어나면서 좋은 작업이 나오는 그런 방향을 선택했죠. 즉 무소유적 마음으로 바라본 거죠.” 임동식, 2008년 11월 13일 인터뷰, 조상영, <대전 현대미술의 패러다임>, 다빈치기프트, 2009, 132쪽.
이는 이 글의 서두에 길게 인용한 작가노트에서 김영철이 한 말, 즉 “금강에 와서 야투에 참가하기 위하여 서울 자택 출발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는다. (작품에 대한 구상, 세면도구에 이르기까지) 현장에 와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히 쉬고 물과 그늘을 찾아 심호흡을 하고, 산책도 하며 완전 휴식을 취하다 상경하는 무작위한 상태를 보인다.”는 대목과도 통한다.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 즉, 무위(無爲)를 지향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야투 회원들의 작업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또 하나의 특징은 놀이정신의 발현이다. 김지숙의 풍선놀이처럼 관객참여를 동반한 것이든, 혼자서 하는 것이든(강희순, 곽문상, 나경자, 박수용, 이동구, 이순구, 조충연) 작업의 근간에는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가 모든 문화현상의 기원을 놀이로 본 ‘놀이정신’이 깔려 있다(놀이하는 인간: Homo Ludens). 그런 까닭에 이들이 하는 작업은 자연과 나누는 대화(고승현, 김영철, 신현태, 이응우, 임동식, 정봉숙, 정영진, 지석철, 홍오봉)이면서 동시에 자연을 배경으로 하는 독백(함상호, 허강, 허진권)이기도 하고, 근원적으로는 고향(자연)을 향한 회귀의 몸짓인 것이다.
1981년 야투 창립 이후 지금까지 총 168회에 걸쳐 이루어진 사계절연구회 회원들의 자연미술 워크숍에서 가장 두드러진 행위는 이른바 최소한의 몸짓이다. 이는 자신의 신체를 자연에 빌려주는 행위(최소한의 개입)를 비롯하여 무위를 지향하는 태도, 놀이정신의 발현, 고향(자연)을 향한 회귀의 몸짓 등과 더불어 국내외의 자연미술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작업태도이자 방식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연과 소통을 시도한다. ‘야투(野投)라는 말 그대로 들(野)에 (몸을) 던짐으로써 인간중심적 사유로부터 벗어나 자연으로 상징되는 근원으로의 회귀를 실천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과의 소통의 근본적인 목적은 어디에 있는가? 이 점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1981년, 한국의 충남 공주에서 혈기왕성한 20대의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발원한 ‘야투(野投/Yatoo)’의 근본정신은 자연 동화(同化)에 있다. 기억하건대, 80년대 초반이면 ‘생수’라는 말조차 없었던 시기였다. 산이나 숲에서 흐르는 물을 그냥 마셔도 아무런 탈이 없던 시대였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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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주해)
4) 1884년 ‘야투(野投’ 야외현장미술연구회 도록, 1984 겨울 공주 금강 백사장, 1984 봄 공주산성공원 합본호. 쪽 표기 없음.
5) 임동식, 2008년 11월 13일 인터뷰, 조상영, <대전 현대미술의 패러다임>, 다빈치기프트, 2009,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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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간이 한 몸인 시대, 즉 자연과 인간이 동화(同和)된 시대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양의 자연관에서 보는 것처럼 자연정복이 낳은 인간과 자연과의 불화가 아니라, 화합을 이루고 친연(親緣)을 유지하는 동화(同和)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사례인 것이다.”
르네상스 이후 서양의 인간중심주의 세계관이 낳은 자연에 대한 저항의 발길질은 자연을 정복하고자 하는 인류의 교만에서 비롯되었다. 서양에서는 근대성(modernity)의 개념이 발생한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시대와 산업혁명의 시기를 겪으면서 자연정복과 자연 경시의 풍조가 점차 자리를 잡아나갔다. 반면에 중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자연존중과 동화(同化)의 태도를 견지해 왔다. 이러한 자연관이 잘 나타난 것이 바로 동양의 전통 산수화이다. 하나의 우주를 상징하는 동양의 산수화에는 자연을 배경으로 인간이 작게 표현돼 있는데, 이는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겸손한 태도가 잘 드러난 사례이다. 이른바 ‘안빈낙도(安貧樂道)’니 ‘안분지족(安分知足)’과 같은 도교적 삶의 태도들은 다 같이 청빈을 삶의 실천윤리로 삼으면서 자연과의 동화(同和)를 꾀한 사례들이다.
인간을 우주 속에 내던져진 티끌처럼 작은 요소로 파악한 이러한 세계관에서 자연이란 ‘태초의 대지’인 동시에 ‘만물의 요람’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근원으로서의 대지는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언제부턴지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근래 들어 그 징후가 뚜렷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5년 전의 ‘팬데믹(Pandemic)’ 상황이었다. (다음주에 계속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