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 레지옹 도뇌르, 2026년 대규모 전시로 고대 이탈리아의 잊혀진 혁신가들을 깨우다

[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고대 이탈리아 문명 가운데 가장 신비롭고도 영향력 있는 집단, 에트루리아인에게 드디어 세계적 무대에서 정당한 자리가 주어진다. 샌프란시스코 레지옹 도뇌르 박물관이 2026년 5월 개막하는 대규모 전시 “에트루리아인: 고대 이탈리아의 심장부에서”를 통해 약 180점에 달하는 주요 유물을 공개하면서, 에트루리아 문명에 대한 평가가 새롭게 쓰여지고 있다.

 클리블랜드 미술관에서 대여한 '잠과 죽음'(기원전 4세기 초)이 새겨진 청동 시스타 손잡이. 사진 제공-레지언 오브 아너
 클리블랜드 미술관에서 대여한 '잠과 죽음'(기원전 4세기 초)이 새겨진 청동 시스타 손잡이. 사진 제공-레지언 오브 아너

미국에서 에트루리아 문명만을 위한 대형전은 2009년 댈러스 메도우스 박물관 이후 거의 전무했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10년간의 학술 연구와 전 세계 박물관 30곳의 협력 끝에 성사된 의미 있는 프로젝트다. 특히 상당수 유물은 미국 최초 공개작으로, 그동안 ‘로마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에트루리아의 실체가 본격적으로 복원될 전망이다.

에트루리아 문명은 기원전 1천 년 동안 이탈리아 중부를 지배한 강력한 도시국가 연합이었다. 그러나 통합된 로마제국에 의해 도시들이 하나씩 정복되면서 역사 서술권을 잃었고, 그들의 문화적 성취는 로마의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전시를 기획한 레지옹 도뇌르 고대미술 큐레이터 르네 드레이퍼스는 “특히 미국에서는 에트루리아 문명을 처음 듣는 사람들이 많다”며 “이번 전시는 그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는 작업”이라고 강조한다.

이글 페인터(기원전 520~510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테라코타 카에레탄 히드리아. 로스앤젤레스 J. 폴 게티 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레지언 오브 아너
이글 페인터(기원전 520~510년)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테라코타 카에레탄 히드리아. 로스앤젤레스 J. 폴 게티 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 레지언 오브 아너

문헌 기록의 부족도 그 신비성을 키웠다. 에트루리아인들은 자신들의 기록을 남겼지만, 대부분 리넨 같은 덧없는 재질에 쓰여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졌다. 그 결과 그리스와 로마의 기록만 남았고, 그 속에서 에트루리아인들은 종종 불리하게 묘사되었다. 그러나 최근 발굴과 언어 해독 연구가 진전되면서 에트루리아어 비문도 더 명확하게 해석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미국에서 최초로 공개되는 가장 긴 에트루리아 비문이 선보여 학계의 기대를 모은다.

여성 머리 모양의 청동 발사마리움(향수병) (기원전 3세기 후반~2세기 초). 보스턴 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레지언 오브 아너
여성 머리 모양의 청동 발사마리움(향수병) (기원전 3세기 후반~2세기 초). 보스턴 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레지언 오브 아너

전시는 레골리니–갈라시 무덤에서 출토한 방대한 보물들로 시작한다. 금장식, 테라코타 조각, 프레스코 흔적 등 에트루리아 귀족의 사후세계관을 보여주는 대표 유물들이 총집합한다. 이들은 화려한 장례 의례가 아니라, 영원한 축제를 위해 무덤에 부장되었다는 점에서 독특한 세계관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최근 산 카시아노 데이 바니 성역에서 발굴된 청동 조각군이다. 이 지역에서는 수백 년간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신들을 함께 모신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에트루리아어와 라틴어가 나란히 새겨진 유물들은 두 문명이 겹치고 교류했던 생생한 증거가 된다. 이는 로마가 단순히 ‘정복자’만이 아니라 에트루리아의 문화를 대대적으로 수용하고 배워갔음을 입증한다.

 태양신 우실(기원전 500~475년)을 묘사한 청동 아플리케. 로스앤젤레스 J. 폴 게티 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레지언 오브 아너
 태양신 우실(기원전 500~475년)을 묘사한 청동 아플리케. 로스앤젤레스 J. 폴 게티 미술관 소장. 사진 제공-레지언 오브 아너

연대기 전시는 이어 에트루리아의 예술·경제·사회구조를 주제별로 조망한다. 특히 금세공 예술은 압권이다. 런던 V&A에서 대여한 25만 개의 금 알갱이를 촘촘히 박아넣은 술잔은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대표작으로 꼽힌다. 에트루리아 문명의 부는 철·구리·주석 등 금속자원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들은 지중해 전역에 청동기 문화를 확산시킨 선도적 기술자들이었다.

여성 머리 모양의 청동 장례 꽃병(기원전 225~175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여. 사진 제공-레지옹 도뇌르
여성 머리 모양의 청동 장례 꽃병(기원전 225~175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여. 사진 제공-레지옹 도뇌르

그러나 그들의 영향력은 기술에 그치지 않는다.
· 반도 최초로 포도재배 및 와인 양조 기술을 도입
· ‘로마 숫자’의 기원은 사실 에트루리아 숫자
· 로마의 검투사 경기와 습지 배수 기술도 에트루리아에서 이어받음
· 여성에게 재산 소유권과 사회적 권한을 부여한 고대 이탈리아의 유일한 문명
르네 드레이퍼스는 “에트루리아 문명은 수천 년간 비밀처럼 묻혀 있었다”며 “이제야 비로소 그들이 이룬 혁신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금도금 은과 금으로 제작된 아킬레스의 매복 반지(기원전 550~500년). 로스앤젤레스 J. 폴 게티 미술관에서 대여. 사진 제공-레지언 오브 아너
금도금 은과 금으로 제작된 아킬레스의 매복 반지(기원전 550~500년). 로스앤젤레스 J. 폴 게티 미술관에서 대여. 사진 제공-레지언 오브 아너

전시는 2026년 5월 2일부터 9월 20일까지 샌프란시스코 레지옹 오브 아너에서 개최된다. 서양문명의 뿌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될 이번 전시는, 고대 세계의 잊힌 혁신가들, 에트루리아인의 진면모를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조명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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