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네세의 대표 작품인 을 처음 본 순간 방대한 스케일에 압도된다. 엄청난 규모의 등장인물은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이다. 모두가 화려한 옷을 입고 연회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의 야심작은 베네딕토 흑인 수도원에서 요청한 베로네세가 직접 설계한 벽에 걸려 있는 대규모 벽화였다. 현재는 루브르 박물관의 작품 바로 앞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가장 소외받는 작품이 되었다. 왜냐하면 의 유명세에 바로 앞에 있는 작품이라도 거들떠보지 않기 때문이다. 혼잡을 피하기 위해 모나리자 루트
루돌프 황제 Rudolf, (1590년~1591년) 16세기에 왕을 박장대소하게 만들었던 독창적인 화가가 있었다. 주세페는 최대 권력자인 왕들의 초상화를 다양한 물체로 콜라주하여 그렸다. 초상화의 컨셉을 야채, 과일, 꽃, 동물과 해양 생물, 심지어 물건을 이용한 것은 시대를 초월한 발상이었다. 당시에 주세페는 명성이 알려지지 않은 때였는데 먼저 페르디난트 1세의 눈에 띄었다. 그것이 운명을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는 주세페의 해박한 지식과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높이 평가해서 당장 자신의 궁정 화가로 삼았다. 주세
르네상스 시대 천재 화가인 라파엘로의 사후 500년을 기념하기 위한 블록버스터 급의 전시회가 로마에서 열렸다. 라파엘로는 어떻게 어린 나이에 성공하게 되었을까? 이탈리아 북동부에 우르비노라는 작은 마을에 그의 집이 있다. 아버지 조반니 산티는 지속적으로 문화와 예술적 아이디어를 교류하고 있었다. 어린 라파엘로는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프레스코 기법과 예술적 기초를 배웠다. 바사리에 따르면, 어머니의 눈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어린 라파엘로를 페루지노의 작업장에 보냈는데 어머니의 사망이 후에 불행하게도 스파르타식으로 예술 교육을 시키던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71x71 (1514년) 르네상스 시대 천재 화가인 라파엘로의 사후 500년을 기념하기 위한 블록버스터 급의 전시회가 로마에서 열렸다. 2020년 3월 5일부터 6월 2일까지 진행되는 전시회로 이 날을 기다린 애호가들로 온라인 사전 판매에 서 7만장이나 팔렸다. 라파엘로의 특별한 전시를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라파엘로 작품은 전 세계 박물관과 국제적인 컬렉션에 흩어져 있었다. 작품을 한 자리에 집합시키기 위해 3년 동안 준비해야 했다. 또한 기획자는 수많은 곳에 설득을 해야만 했다. 바사리가 ‘화가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부분도 (1508년 ~1512년) 피렌체에서 60킬로미터 떨어진 카프대제 미켈란젤로(Caprese Michelangelo)라는 마을에 미켈란젤로의 생가와 박물관이 조성되어있다. 박물관은 약 100년 전에 지어진 고대 카프레 성에 위치해 있다. 주변에는 1297년에 지어진 오래된 석조건물인 세례 요한 교회가 있는데 이곳은 미켈란젤로가 세례를 받은 곳이다. 특히 미켈란젤로의 생가는 천정화 장식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박물관이 되었다.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성 베드로에서 를 조각했을 때는 24세였다. 당대 인
서양 미술사를 살펴보면 아버지가 궁정 화가였던 화가들은 확실히 신동이 많은 편이다. 그들은 남보다 일찍 명성을 얻어서 출세 가도를 달렸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아버지는 르네상스 시대에 성공한 금세공인이었으며 어머니도 금세공인의 딸이었다. 뒤러는 어렸을 때부터 유복한 환경이면서 천부적인 재능까지도 있었다. 일찍 독창적인 화풍을 개발하여 미술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독창적인 재능의 소유자로 북유럽의 다빈치라 불렸다. 특별한 것은 세계 최초로 화가 브랜드를 구축한 예술가로 이를 통해 빠른 명성은 물론이고 많은 돈을 벌었다. 또한 역사상 최
장대한 스케일과 뛰어난 묘사로 놀라게 하는 작품이 있다. 베노초 고촐리의 은 르네상스 시대 통틀어서 가장 매력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작품의 양식은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Gentile da Fabriano)의 1423년 작인 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파브리아노의 작품은 피렌체 최고의 갑부였던 팔라 스트로치( Palazzo Strozzi)가 의뢰한 작품이었다. 이에 비해 고촐리의 은 팔라 스트로치와 쌍벽을 이루었던 메디치가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 고촐리는 조각과 금세공 교육을 받아
미술사에 수사의 신분으로 세속적인 쾌락을 누렸던 방탕한 화가가 있었다. 금기시한 그의 스캔들을 알게 된 순간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였으니 수사였던 그가 어떻게 화가로 명성을 누리게 되었을까? 리피는 불운한 환경에서 태어나서 미술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사물을 해석하는 방법과 명암을 적절하게 응용할 줄 알았으며, 입체적으로 그리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는 최초에 원근법을 사용한 예술가인 마사초의 유일한 제자였다. 30세 되던 때에는 수도원을 나와서 수사와 화가로서의 삶을 병행하였다. 그림 솜씨로 점점 명성이 높아졌
지극히 컴컴한 어두운 곳에 있어도 빛을 마구 뿜어내는 아름다운 작품이 있다.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의 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제단화이다. 실제 금박과 보석이 들어가 있는 유화 물감 쓰기 이전의 템페라 (Tempera)작품으로 어두운 예배당을 눈부시게 밝혀주는 미묘한 조명 효과가 있다. 작품만큼이나 독창적인 액자 형 프레임(Frame)은 정교하게 조각을 한 후 금박을 입혔다. 는 르네상스 시대에도 루벤스와 다빈치 등 유명한 화가들이 앞 다투어 그렸던 주제이다. 그러나 같은 주제여도 파브리아노
미술시장의 구조 '국내외 아트페어와 경매'갤러리는 왜 아트페어에 참여할까? 일정 기간 동안 한 공간에 수십, 수백 곳의 갤러리가 한 곳에 모이는 아트페어에는 컬렉터와 타 갤러리스트를 포함한 수많은 미술계 관계자가 대거 참석한다. 갤러리에 소속된 작가를 프로모션하고 작품을 유통하며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에, 갤러리들은 거액의 운송료와 교통비, 여비뿐만 아니라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억대의 부스비용을 지불하고 국제 아트페어에 참여한다. 유수의 아트페어에 지원하고 참여 갤러리로 선정되기 위해서는 갤러리의 전
1981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서 일어난 일로 그 지역에 사는 택시 운전기사가 어느 날 공증인의 소환장을 받고 가보니 두 명의 귀부인이 기다리고 있었다.사건의 진실은 자매의 부친이 얼마 전 세상을 뜨면서 유언장에 생전에 전혀 밝히지도 않았던 사생아 아들을 세번째로 지정해 놓았던 것이었다. 유럽 중세 영화에 보면 어느 날 유산 상속을 받아 부자가 되는 경우가 많듯이 그런 케이스였다고인이 남긴 골동품과 프랑스 회화 작품이 몇 점이 있었는데 자매는 느닷없이 나타난 사생아에게 작품조차도 주기싫어서 어차피 작품을 가져가봤자 하나도 이해하지
역사상 가장 영리한 미술품 위조범의 고백이라는 부 타이틀도 흥미로웠지만 책을 소설적 표현력으로 빠져들게 한 그의 문체 때문에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그가 직접 쓴 것인지 대리인이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실적 묘사를 위주로 한 문장은 독자의 마음을 빼앗을 수 있는 몰입의 경지를 느끼게 했다.켄 페레니는 Martin Johnson Head의 '벌새와 난초'연작 뿐 아니라 미국 인디언의 초상화로유명한 Charles bird king 등의 작품 등 초기 미국 작가의 작품을 교묘하게 위작하여 높은 가격에 팔았다.얼마 전 자료를
폭이 7미터가 넘는 거대한 작품은 로마에서 인정받았던 쉬블레라의 작품인 로 제목은 쿠르베의 와 같으며 작품 또한 비슷한 구도로 연상이 되는데 쿠르베의 작품은 훨씬 규모가 크다. ( Pierre Subleyras 1699-1749 /1746작 )740X945플랑드르 화파들이 즐겨 그렸던'그림 속의 또다른 그림'을 그려 넣는 컨셉은 화가로서 대단한 재능을 가진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스케일이 큰 화면이다. 명작 속에는 많은 그림들이 액자 속에 꽉차있는데 디테일한 묘사를 보는 것만으로도 화
피카소는 열아홉 나이에 고향을 떠나 친구가 준 차비와 자신이 그린 그림을 팔아서 생활비로 쓰려고 인 이 작품만 들고서 빈털털이 상태로 파리로 건너왔다. 그 당시는 프랑스 파리로 와야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있었으므로 각 국에서 화가들이 파리로 모여들었다. 그 후 그는 가난과 싸워야했다. 그의 작품 중 < 파이프를 든 소년>은 자화상이 아니라 그가 24세에 그린 작품으로 당시 그의 작업실에 자주 놀러오던 동네 소년 '루이 '이다. 이 작품은 최고가로 경신했던 고흐의 이후 경매에 나온
베르베르 소년은 파리 한마리도 무서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네 텃밭에서 개미를 처음 발견한 후 자연 친화적인 아이로 성장하게 되었다. '알랭드 보통'이나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전세계 팬들이 많을 정도로 베스트셀러작가이면서 모두 프랑스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그들은 한국의 팬들이 많은데 그것은 한국인의 감성을 간파한 출판사들의 활약이 컸다고 생각한다이들의 작품 경향을 보면서 특히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요인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는데 그것은 지극히 동양적인 사유 정신과 감성적인 성향을 기반을 한
'이사도라 던컨'은 폴 모리아의 음악에도 나올정도로 대중적인 인물로 유명하다.그러나 정작 그녀보다 16년 더 앞서 태어나 현대 무용을 선보이고 이사도라 던컨에게 영향을 준 로이 플러Loïe Fuller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마치 특수 가루를 뿌린 든 특수 조명으로 효과를 낸 듯한 사진 속 로이 플러의 춤 공연의 장면은 바로 라듐을 비단 치마에 얇게 바르고 조명을 비춰서 극적인 효과를 낸 것이다로이 플러는 1900년 만국박람회에 개별 전시관이 생길 정도로 새로운 연출에 관심이많았다. 시대적인 상황으로 볼 때 춤
조명 아트에서 독보적인 영국 브루스 먼로의 작품은 '환상' 그 자체이다. 그가 제주 조천읍 선교리 6000평의 넓은 차밭에 설치한 '오름'은 국내 조명예술 작업으로서는 대단한 걸작으로 우리를 감동시킨다. 광섬유와 아크릴 LED조명으로 만든 환상적인 설치 예술은 순간 오로라와 같은 착각의 감동을 받게한다 그는 아내와 호주를 여행하면서 인디언 원주민들이 신성시 여기던 장소에서 어떤 힘이 느껴지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한 체험을 통해 밤하늘의 별보다 더 화려하고 빛나는 "빛의 들판"이라는 조명 아
스무살 때 빨간 머리 청년 빈센트반 고흐는 디킨스와 에밀졸라의 작품을 읽고 세익스피어와 조지 엘리엇,빅토르 위고 등의 작품을 탐독하고 독파하는 지성인이었다. 종이에 흑색 크레용으로 그린'슬픔'은 감상자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그녀는 특별하진 않지만 숭고함이 깃들여있다'고 했던 '그 녀'는 재봉사였는데 당시 다섯살짜리 딸을 키우며 임신까지 한 매춘부 '시엥'이었다. 삶의 고통 속에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가야 했던 그녀는 몸도 건강하지
바스키아와 키스 해링은 유사한 점이 많다. 그들은 젊은 나이에 갑자기 유명했고 또한 짧은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키스 해링과 바스키아의 작품은 너무나 대중적이 되어서 식상한 작품들인데 키스 해링의'생명의 나무'시리즈는 내가 오래 전 나무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어떤 작품보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두 사람을 잠시 비교해보자면 그들은 각각 미국 브루클린과 펜실베니아에서 태어났고 바스키아는 27세 때 헤로인 과다복용으로 사망했다. 키스 해링은 동성애자로 에이즈로 사망했
나는 미술 뿐만 아니라 건축ᆞ인테리어ᆞ, 패션 디자인을 선호한다. 어느 날 나는 스페인 패션디자이너 마리아노 포르투니의 랑방 2005 s/s컬렉션의 실크새틴의 주문진 찰랑거리는 황금색 플리츠에 마음을 빼앗겼다.원래 이 옷의 시초인 '델포스 가운'은 '포르투니'가 1910년 디자인한 것으로 도자기로 만든 뜨거운 관에 젖은 실크를 접어두는 것이 영구적인 주름을 만드는 방법이다ᆞ.금속이나 고래수염 뼈로 만든 코르셋에서 해방시킨 부드러운 실루엣의 패션 스타일이다. 주름 천 하면 일본의 이세이 미야케가 상징이 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