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켈란젤로와 맞짱 떴던 뛰어난 신동 >

카를 5세 - 해가 지지 않는 해양제국 스페인의 창건자
카를 5세 - 해가 지지 않는 해양제국 스페인의 창건자

 

르네상스 시대 천재 화가인 라파엘로의 사후 500년을 기념하기 위한 블록버스터 급의 전시회가 로마에서 열렸다. 라파엘로는 어떻게 어린 나이에 성공하게 되었을까? 이탈리아 북동부에 우르비노라는 작은 마을에 그의 집이 있다. 아버지 조반니 산티는 지속적으로 문화와 예술적 아이디어를 교류하고 있었다. 어린 라파엘로는 아버지의 작업장에서 프레스코 기법과 예술적 기초를 배웠다. 바사리에 따르면, 어머니의 눈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어린 라파엘로를 페루지노의 작업장에 보냈는데 어머니의 사망이 후에 불행하게도 스파르타식으로 예술 교육을 시키던 아버지마저 그가 11세 때 사망하였다. 갑자기 고아가 된 라파엘로는 제사장이었던 바톨로메오 삼촌에게 맡겨졌다. 

 라파엘로는 아버지의 작업실을 물려받아서 가동시켰다. 그는 초기에 아버지의 작업장을 운영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스튜디오를 계속 관리하면서 아버지를 빠르게 능가하는 기술을 습득했다. 우선적으로 당시 명인이었던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작품을 연구하여 그들의 화풍을 적용하고 발전시킨 결과 큰 작업장을 운영하게 되었고 수많은 작품을 생산했다. 
 
 라파엘로가 처음에 로마로 이주한 것은 만테냐가 이탈리아 전역의 화가를 동원하여 브로만테 화가팀의 일원으로 교황에게 소개되었다. 라파엘로의 인맥 관계의 범위는 교황 줄리어스의 후임인 교황 레오 10세와 더욱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의 독점적인 후원 하에 라파엘로는 생산성 높은 황금시대를 맞았다. 권력자들과 친밀한 관계로 중요한 커넥션을 지속적으로 받았다. 교황들의 초상화와 대규모 작품을 계속 의뢰받은 것은 재능이 뛰어났기는 했지만 이러한 화려한 라인업이 작용한 것이었다. 

 사업은 벽화 작업뿐만 아니라 건축 작업과 궁전 디자인까지 작업이 확장되었다.  31세의 젊은 나이에도 빠른 성공은 부친의 강경한 훈육법의 영향이었다. 그는 바티칸의 고대 유적 컬렉션 보존과 기록을 하고 유적을 발굴하며 고대 연구의 고전적인 모델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리고 건축 양식과 밀접하게 연결 된 새로운 유형의 프레스코 및 벽토 장식을 만들었다. 교황은 자신의 야망을 충족시키는 라파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일을 맡겼다. 그 결과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가가 되었다. 명성이 널리 퍼지면서 라파엘은 프랑스 왕과 다른 국가의 명령을 받아서 국제적인 관계로 발전되었다. 

 사실, 그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의 화풍을 통해 새로운 인물의 유형을 만들었다.  라파엘로가 갑자기 사망하자 크게 애도하며 국가 장례를 치르게 했다. 라파엘로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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