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전 허문의 운무산수화
신항섭(미술평론가)
수묵산수화에서는 새로운 화법이 나올 수 없는 것일까.
수묵산수화에서는 새로운 화법이 나올 수 없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에 명료한 답을 제시하는 임전 허문은 전통적인 수묵산수의 기법을 초월하는 독자적인 선염기법의 <운문산수화>를 창안했다. 조선시대와 근현대 수묵산수는 관념산수 및 실경산수로 양분된다. 그 사이에 겸재 정선을 중심으로 하는 진경산수가 나오기는 했으나, 오늘까지 그 명맥을 이어오는 것은 관념산수 및 실경산수이다. 한국 수묵산수화는 이 두 가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임전은 오랜 전통 수묵산수의 습속에서 벗어나 이미 1980년대부터 새로운 수묵화 기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전대미문의 독자적인 조형기법을 완성했다. 이른바 <운무산수>라는 선염기법을 중심으로 하는 초현실적인 산수풍경이다.
특히 기하학적으로 돌출시킨 기암괴석이나 높고 낮은 산봉우리 그리고 암벽, 수목, 돛배와 같은 독특한 이미지의 물상들은 세부적인 수식을 생략하는 실루엣으로 선명하게 노출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운무에 의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모호한 풍경으로 전개시킨다. 이는 유현미로 상징되는 운무의 발현을 새로운 화격으로 승화시켜 또 다른 하나의 신선한 경지의 형식미를 이룬 것이다.
임전의 그림은 재현적인 듯싶으면서도 생략과 절제, 그리고 단순화를 통해 운해와 안개에 잠겨 있는 선계와 같은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다. 마치 신선이 소요하듯 아득한 공간적인 깊이를 실현함으로써 유현미의 구극에 도달하고 있다.
단순, 심미, 절제의 미학을 집약한 신개념의 수묵산수
자의식이 강한 민족일수록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 또한 강하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이어지는 전통을 지키고 있는 민족이 적지 않다. 전통이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생활양식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달리 보면 고유의 문화에 대한 체질화를 의미하기도 하다. 전통을 지키려는 건 그 문화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자부심의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전통이란 본질은 유지되는 가운데 시대에 따라 조금씩 그 모양이 변하기도 한다. 아무리 전통을 존중한다고 할지라도 그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 속 어딘가에서는 자의적인 해석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릴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인지 미술에 국한하더라도 각 나라 또는 민족마다 전통적인 양식이 존재하고, 그 명맥이 면면히 흐른다.
임전 허문의 운무산수는 단적으로 자의적인 해석에 관한 욕망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운림산방의 전통을 기반으로 하되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만의 조형적인 해석, 즉 개별적인 형식의 완성을 목표로 해왔기 때문이다. 이제 그러한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자신만의 형식미를 완결함으로써 전통적인 화풍과는 사뭇 다른 운무산수를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운무산수라는 명칭의 독자적인 형식은 이미 30대 후반에 시도되었다.
그의 초기 작업은 운림산방에서 형성된 화풍, 즉 남화의 전통을 의식하고 있었다. 특히 일상적으로 마주할 수 있는 남농의 화풍에 근사한 것이었다. 실경산수에 준한 서정적인 시골 풍경이었는데, 비록 다듬어지지 않은 거칠고 투박한 필치였으나 시적인 운치가 있었다. 이러한 작품은 20대를 거쳐 30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30대 후반에 이르면서 불현듯 운무가 깃들이는 산수로 넘어오게 된다.
새로운 도구를 이용한 극미의 선염 표현
1979년 즉 38세 때 <운중청산>, <하산운해>라는 작품을 통해 운무 풍경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예로부터 높은 산에 걸치는 운해 또는 낮은 지대에 피어나는 안개를 소재로 한 산수가 적지 않으나 대다수의 산수는 붓질로만 선염의 기운을 표현하는 정도였다. 옅은 수묵으로 농도의 변화를 줌으로써 운해 또는 안개를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표현기법으로는 신비스럽고 오묘한 변화를 일으키는 운해 또는 안개를 표현하는 데는 충분치 않다. 시각적인 효과에서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감동적인 표현이 약할 수밖에 없기에 그렇다.
그는 이처럼 전통적인 화법으로는 신비스러운 운무 표현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분무기를 사용하게 되었다. 분무기로 화선지를 흠뻑 적신 뒤 붓으로 번져 나가는 선염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의 선염은 정교한 그러데이션 효과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붓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난이도를 보여준다. 어쩌면 실제의 운해 또는 안개를 보고 있는 듯싶은 신비스러운 시각적인 인상은 기술적인 난이도를 극복함으로써 얻어진 결과이다.
그의 작가적인 욕망은 선염이라는 보편적인 기법을 통해 발현한다. 선염은 일견 누구라도 가능할 듯싶으나 그의 선염은 고도의 숙련된 기술에서 나오는 세련미를 수반해야 한다는 점에서 간단치 않다. 오랫동안 반복된 훈련과 자기만의 감각을 통해 터득한 오묘한 경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지의 선택부터 먹과 붓이 모두 조화를 이루었을 때 얻을 수 있는 표현이다. 단순히 숙련된 기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실패와 성취를 거듭하는 가운데 얻어진 묘법이다.
1980년대 후반의 선염은 대체로 실제의 상황에 근접하고 있다. 산과 산 사이의 골에 안개가 스며들어 봉우리와 능선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운무산수 풍경이었다. 근경에 소나무를 두고 중경에는 초옥과 야산을 두며, 원경에 바위산을 두는 삼원법에 근사한 구도였다. 수묵의 색깔은 짙었고 형태는 명확하게 드러났다. 한마디로 힘을 느낄 수 있는 형사와 운무가 강한 대비를 이루는 상황이었다. 운무 표현에서도 정교함보다는 실상의 존재감이 강하게 드러나는 가운데 강렬한 흑백 대비가 돋보이는 조형적인 특징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도 놓치지 않는 건 서정미였다.
기하학적인 선을 이용한 현대적인 해석
이러한 시기를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여전히 선염을 기조로 하되 형태를 단순하게 함축하는 독특한 조형적인 해석이 나타난 것이다. 여기에다 선염은 한층 정교하게 세련된 바림으로 진행하고 있다. 수묵이라는 하나의 색깔이 짙은 데서 점차 옅게 진행되다가 드디어는 그 존재조차 소멸하는 바림 기법은 명암의 단계적인 상황을 한눈에 보여준다. 어둠에서 밝음으로, 또는 밝음에서 어둠으로 진행하는 자연현상과 일치하는 바림은 신비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그의 운무산수가 지향하는 요체는 한마디로 바림에 있다. 2000년대의 바림은 정교하기 그지없다. 오랜 시간과 기술의 축적을 통해 어느 단계에서 감각적인 손을 뛰어넘는, 조형의 마법과 같은 경지에 들어섰다. 형태 자체를 좀 더 단순하게 처리함으로써 전체적인 인상이 한층 명료해졌다. 무엇보다도 수평의 선을 도입하고 바위를 단순하게 요약함에 따라 아주 간결한 구도가 만들어지게 됐다.
수평선과 함께 수직선이 함께 하는 독특한 산수가 탄생한 것이다. 수직선이나 수평선이라는 기하학적인 선이 산수에 등장한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이는 그의 산수가 전통을 살짝 벗어난 현대미학과의 동행을 의미한다. 자연에는 기하학적인 개념의 수직선과 수평선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유사한 직선적인 형태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적인 또는 물리적인 산물일 따름이다. 이에 비해 그가 보여주는 수직과 수평의 선은 조형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하는,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의도성이 확연하다.
수직과 수평의 직선이 지어내는 형상은 바위의 표현에서 두드러진다. 바위가 마치 날카로운 선으로 된 직각이나 예각의 형태를 띤다. 이러한 예리한 선은 지극히 이성적인 성향을 지닌다. 그것이 인위적인 형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하학적인 선은 본시 차가운 이성의 상징이기에 그렇다. 기하학적인 형상이 가지는 형태의 명확성은 오로지 이지적인 성향을 보일 뿐 감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운무는 이에 대응하는 부드러움과 너그러움, 온화한 정서와 감성적인 성격을 지닌다. 그러고 보니 상반된 시각적인 특징 및 정서는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다. 어쩌면 많은 걸 생략하거나 단순화했음에도 수묵산수로서의 가치를 온전히 지킬 수 있는 건, 이성과 감성이 한데 어우러지는 조형의 묘리 덕분이리라. 이러한 기법적인 또는 표현적인 특징은 상식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욕망, 즉 새로운 조형 세계에 대한 간구의 결실이다.
여기에서 개별적인 형식에 관한 욕망이 드러난다. 기존의 화법을 수용하지 않고 새로운 표현 방법을 탐구하고 개발한다는 건 창작에 대한 열망의 증표이다. 창작이란 모름지기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조형을 의미하건대, 전래의 수묵산수에 없는 수직과 수평의 선을 도입한 건 이에 부응하는 일이다. 수직과 수평의 기하학적인 선을 구사한다는 건 필경 형태의 단순화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기하학적인 구조를 가진다는 일 자체가 형태의 생략 및 단순화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하학적인 선을 구사하고 기존의 선염을 조합함으로써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의 산수화가 만들어졌다. 어찌 보면 바위와 나무가 있는 산과 물이 함께 하는 전형적인 산수의 기본 조건을 충족시키는 듯싶다. 하지만 기하학적인 선을 도입함으로써 형태는 극도로 생략되고 단순화됨으로써 마치 실루엣을 보는 듯싶은 시각 효과가 있다. 운무에 잠겨 있는 도시 곳곳에서 불쑥불쑥 그 존재를 드러내는 초고층 빌딩을 연상케 하는 산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운무산수가 여기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건 아니다. 오랫동안 필묵과 접하면서 이상적인 산수, 즉 전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부단한 동경과 열망의 끈을 놓지 않았기에 찾아든 영감의 산물일 뿐이다. 붓에만 의존하던 수묵화의 습속에서 다른 길을 탐색하다가 만난 선염과 그 기법이 지어낸 조형의 신세계이다.
명쾌한 수평적인 선이 지어내는 현대적인 조형미
이즈음 작품에는 또 다른 조형적인 특징이 추가된다. 하늘과 바다, 또는 하늘과 강이나 호수를 분별케 하는 수평적인 이미지가 현저하다. 일반적인 산수화에서 수평적인 이미지는 흔치 않다. 그런데 그의 산수는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서 선명히 드러나는 수평선이 마치 칼로 그은 듯싶은 명백하다. 이로써 모호하게 안개에 잠기던 상황과는 달리, 산의 밑둥치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칼로 자른 듯싶은 예리한 수평선 위에 올라선 형국이 되는 것이다. 자연미와는 전혀 다른 인위적인 미의 극치이다. 이는 오로지 새로운 미학적인 성과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나무와 바위 그리고 산봉우리만이 드러날 뿐인 운무산수는 현실을 떠난 초월적인 세상으로서 손색없다. 하고 많은 자연 물상은 안개 또는 구름 속에 잠긴다. 둥두렷이 떠오르는 만월처럼 고고한 자태로 자리하는 산봉우리는 선계처럼 보일 지경이다. 신선들이 노니는 신비스러운 세상, 우리 삶의 공간을 저 아래에 둔 채 구름을 타고 앉은 하나, 둘, 셋 그리고 몇 개의 산봉우리가 한적하게 존재하는 운무 풍경은 선경이 아니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러고 보면 그가 지어낸 운무산수는 생략과 절제 그리고 구성 및 구도의 간결함이라는 조형적인 공식을 통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생략과 절제라는 조형 방식은 극단적인 단순미로 귀결한다. 많은 걸 생략하거나 절제함으로써 더 이상 갈 수 없는 경계에 이르고 있다. 대다수 작품이 아득한 공간에 부상하는 듯싶은 산봉우리 하나이거나 둘 또는 몇 개가 이곳저곳에 산개하는 상태이다. 그 산봉우리는 전체 화면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따름이다. 나머지는 아득한 운무의 공간이다.
그처럼 넓은 공간을 운무로 채운다는 건 선염이라는 표현기법에 대한 치열한 기법의 숙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운무를 찬찬히 살펴보면 비어 있는 듯이 보이는 공간까지 수묵이 침투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무연한 공간 곳곳까지 보일 듯 말 듯 침투하는 수묵을 보면 기가 찰 따름이다. 일찍이 이처럼 깊은 수묵의 공간과 마주한 일이 없다. 그의 운무산수에 대해 단순히 시각적으로 인지되는 사실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품에 따라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하얀, 또는 비어 있는 공간이 존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 공간은 비어 있는 게 아니라 운무가 실재하는 공간이다. 다만 운무를 실제처럼 표현하지 않았을 뿐, 거기에는 엄연히 운무가 존재한다는 암묵적인 전제가 있다. 실제의 풍경에서 운무가 심할 때는 모든 걸 감추게 마련인데, 이때 운무는 그 형태를 문자로는 형용하기 어렵다. 다만 희뿌연한 상태일 뿐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안개가 없는 게 아니듯, 그의 화면이 백색으로 보인다 한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연한 공간이 아니라는 얘기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보이는 사실에 대응하는 비표현적인 이미지이거나 또는 그렇게 보일 따름이다.
이러한 상황은 수묵산수에서 말하는 유현이다. 시각적으로 인지되지는 않을지언정 깊고 아득한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이 유현의 세계는 작은 산봉우리를 실제와 같은 상황으로 느끼도록 하는데 긴요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아무것도 없는 비어 있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비어 있음으로써 자유로이 상상하고 사유하게 되는 공간이 된다. 운무산수가 지어낸 유현의 세계를 신선처럼 소요하는 꿈에 취해보는 건 어떨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