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림산방의 전통문화 가치와 미술사적인 위상
신항섭(미술평론가)
한 화가를 기점으로 하여 그 5대손까지 200여 년의 화업을 이어오는 건 세계미술사에서도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사례일 터이다.
피를 대물림한다는 말이 있는데, 단순히 혈연관계의 지속성을 의미하기보다는 특정의 재능이나 기술이 대를 이어 면면히 이어져 간다는 뜻에 가깝다. 특히 보편적인 재능이나 기술이 아니라 창의성이라는 특수성을 가진, 예술이라는 분야에서 대를 이어간다는 건 아주 희소한 일이다. 단순한 기능이나 기술의 전수로 이어지는 전통공예가 아닌 순수한 창의성을 기반으로 하는 순수예술 분야에서 대물림한다는 건 더욱 희귀한 일이다.
전라남도 진도에 자리한 운림산방은 지정문화재 51호로서 수묵화라는 분야에서 5대에 걸쳐 그 화맥을 이어가고 있다. 운림산방은 1대 소치 허련을 시작으로 하여 2대 미산 허형, 3대 남농 허건, 임인 허림, 4대 임전 허문 그리고 5대 허재와 허진으로 이어지는, 허씨 일가가 일군 장구한 화맥을 상징하는 당호를 일컫는다. 아주 작은 기와집 한 채와 초옥 한 채에다 연못이 있고,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는 풍경은 그대로 선경이나 다름없다. 여기에다 안개라도 깃들이는 날이면 그대로 한 폭의 수묵산수화 같은 경치가 만들어진대서 붙여진 당호가 운림산방이다.
운림산방은 소치 허련이 스승 추사 김정희가 세상을 떠난 그해 홀연히 고향으로 내려와 화실을 만듦으로써 그 역사가 시작된다. 한양에서 명성을 떨치던 그였음에도 스승을 보낸 적적함 때문이었을까 관직과 영화를 뒤로 한 채, 남은 생애를 오직 필묵의 향기만을 탐하였다. 이후 소치는 필묵에 몰두하였고, 기대하지 않았던 막내아들 미산 허형에게 운림산방을 대물림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로부터 5대손에 이르는 화맥은 어느새 두 세기를 넘기고 있다.
운림산방은 단순히 화가를 연이어 배출한 특정의 가계를 기리는 곳일 뿐일까. 그렇지 않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림이라는 예술의 장르에서 하나의 가문이 5대에 이르게 된 건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다. 피를 이어받은 타고난 재능이라고 할지라도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면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5대에 걸쳐 모두 일정한 수준을 넘는 경지에 이르는 결과물을 남긴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무엇보다도 예술은 아무리 재능을 대물림한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물은 오로지 한 사람만의 노력의 산물일 따름이다. 창작은 한 사람, 즉 한 작가가 쏟아부은 노력과 열정의 산물일 뿐이라는 얘기다. 천하의 피카소일지라도 자신의 재능을 자식에게 그대로 나누어 줄 수 없는 게 예술의 오묘함이기도 하다. 사정이 이런데도 직계 화맥 5대에 걸쳐 모두 큰 획을 그을만한 작품을 남기고 있으니, 그 어찌 경이롭지 않은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운림산방은 5대에 이르기까지 저마다 예술적인 성과에서 일가를 이루어, 전대미문의 큰 화맥이 형성되기에 이른 오늘 크게 칭송치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그 성과가 명백한 터이니, 이로써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받아 마땅한, 한국적인 정신문화의 요람으로 천거라도 해야 할 일이다.
한국 남화의 전통을 세운 운림산방의 시조
운림산방을 연 초대 소치小痴 허련許鍊(1808∼1893)은 부친 허각의 5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성장과 함께 그의 재능은 더욱 기세를 넓히더니, 28세 되던 해 해남 대흥사 초의선사에게까지 알려져 함께 기거하게 되면서, 그로부터 학문과 식견을 갖추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고산 윤선도의 생가 녹우당에서 공재 윤두서가의 화첩을 접함으로써 비로소 격조 있는 그림에 대한 개안이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화격이 날로 상승하였 다. 이를 지켜본 초의선사가 소치의 그림을 한양의 추사 김정희에게 보냈다. 이를 접한 추사는 주저 없이 소치를 문하에 두게 되었다. 이로부터 실력은 일취월장하여 왕실에까지 소문이 나게 되었으며, 급기야 현종의 부름을 받아 어전에서 그림을 그리는 영광을 안았으니, 그 명성이 성문을 넘어 한양에 자자하였다.
그의 작가적인 여정에서 가장 큰 행운은 초의선사를 비롯하여 강진 백련사의 아암 혜장스님, 추사 김정희 그리고 다산 정약용과 교유한 일이다. 모두 초의선사와 깊은 인연이 있어 맺어진 관계였고, 이들로부터 깊은 학문과 사상 및 철학을 깨우치게 되었다. 한마디로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 교유를 통해 그림의 깊이와 격조를 도모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추사로부터 북송의 미불과 원나라 황공망, 예찬의 화법을 익혀 산수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스승으로부터 ‘나보다 낫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빼어난 실력을 갖추었다. 특히 추사의 글씨체를 익힌 나머지, 화제와 그림이 서로를 부추기는 형국이어서 더욱 고졸한 맛을 풍긴다. 이는 문인화풍 산수가 자리를 잡는 데 한몫을 한 경위이기도 하다. 게다가 갈라진 붓끝이 지어내는 거친 필치에서 남다른 감각을 끌어낼 수 있었다. 기교에 능하면서도 그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 절제된 필치를 구사하였다. 스승 추사의 초상을 보면 형사에 막힘이 없는 터인데도 애써 그를 감추려는 듯 고졸한 화풍을 즐겼다. 기술을 버리는 자리에 문기가 들어선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으리라.
이러한 필치는 문인화에서 빛을 발하게 되는데, 매란국죽 사군자에서 문자향이 그윽하다. 농묵을 즐겼고, 단아하고 세련된 맛보다는 담백하면서도 까칠한 분위기를 선호했다. 어느 작품이나 문인화로서의 격조는 물론이려니와 기운생동이 휘감는다. 기술적인 완성도를 중시하는 화원의 그림과 달리 문인의 취향을 살린 남화의 화풍을 진도 운림산방에 정주케 하였으니, 그만으로도 너끈히 한국 근대미술사에 큰 획을 긋고도 남음이 있다.
뒤늦은 개안으로 얻은 품격 높은 문인화
2대 미산米山 허형許瀅(1861∼1938)은 소치의 네 아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전라북도 전주 태생임으로 보아 잠시 머물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진도에서 소치는 큰아들 허은에게 화업을 잇게 했으나 34세에 요절하자 크게 낙담하였다. 소치는 이후 다른 아들에게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는데, 막내 허형이 혼자 그림 그리는 걸 지켜보면서도 무관심하다가 문득 재주가 있다고 보였던지 16세 때 본격적으로 그림을 가르치게 되었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여의치 않아 입안 일을 도맡다 보니, 그림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틈틈이 붓을 들었지만, 화가로 사는 게 녹록치 않았다. 생활고 때문에 강진 병영으로 이사를 했고, 다시 목포로 주거를 옮겨 장남 남농 허건과 막내 임인 허림 그리고 의재 허백련에게 그림을 가르쳐 허씨 일가를 중심으로 하는 남화의 계보를 잇게 하였다.
그는 화가로서 남다른 재능을 보였으나, 생활고로 인해 그림에 전념할 수 없었다. 62세가 되어서야 허준이라는 이름으로 조선미술전람회에 <하경산수도>를 출품, 입선한 경력이 모든 사실을 말해준다. 뒤늦은 조선미술전람회 입선으로 이름자를 세상에 알리게 되었음에도 아버지의 그늘이 워낙 커서 그로부터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 건 애석한 일이다. 아버지로부터 재능을 물려받았다고는 하나, 특히 산수화에서는 시야를 넓힐 기회를 얻지 못함으로써 소치의 화풍을 이어가는 정도에 그쳤다. 그렇더라도 매화, 모란 등 문인화에서는 소치에 필적하거나 더러는 그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도 있다.
미산이라는 아호는 북송의 미불과 같은 화가가 되라는 의미에서 장자 허은에게 내린 것인데, 미산이 요절하자 막내인 허형이 물려받았다.
서정적인 실경으로 신남화를 제창한 진정한 묵객
3대 남농南農 허건許楗(1908∼1987)은 미산 허형에 이어 운림산방을 지켜낸 굳건한 버팀목이었다. 미산은 막내가 화가가 되는 걸 허락지 않았으나, 타고난 재능을 막을 길 없었던지, 15세에 전국소년전람회 2등상을 수상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그림을 가르치게 되었다.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한 이래 제23회까지 연속 입선하다가 1944년에는 마침내 최고상인 조선총독상을 수상함으로써 출중한 실력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이처럼 행운이 다가왔음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생계를 꾸려나가던 처지여서 한겨울 냉방에서 작업을 하다가 그만 동상에 걸렸고, 그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절단하는 불행을 겪어야만 했다. 화가로서의 역량은 조선미술전람회 최고상이 말하고 있듯이 더 갈 데 없는 경지에 올랐고, 이후 탄탄대로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화력 가운데 1946년 남화연구원을 개설하여 후진양성의 기치를 높였는데, 사숙이라는 형태의 교육과정을 통해 도촌 신영복, 아산 조방원, 춘구 이정남 등 제자와 많은 후학을 지도하는 등 한국화 화단의 중흥을 이끄는 데 기여했다.
남농은 선대 화가들이 다져놓은 관념산수를 익혔음에도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실사 중심의 새로운 산수화에 눈을 돌렸다. 실재하는 풍경, 또는 그에 준하는 구도를 통해 신남화라는 명칭의 산수화를 개척하는 데 힘썼다. 1940년의 <금강산보덕굴>은 실경산수의 정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출중한 형사 능력을 보여준다. 이처럼 견고한 사실 묘사는 남농의 전매특허가 되다시피 한 소나무로 이어지는데, 필치의 힘과 기세 그리고 생동하는 기운은 눈을 현혹케 한다.
하지만 남농의 진면목은 역시 산수이고, 관념적인 해석을 벗어나 실상에의 탐미로 일관하였다. 부분적인 생략 및 모호한 표현을 통해 시각적인 이해에 갇히지 않는 심미 표현을 탐하였고, 특히 한편의 아릿한 서정시와 같은 정서를 담아내는데 남다른 감각을 발휘했다.
시대를 초월하는 미적 감각을 묻어버린 요절한 천재
3대 임인林人 허림許林(1917∼1942)은 미산 허형의 5남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전라남도 강진 병영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 3년 과정을 마쳤는데, 이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18세인 1935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처녀 출품한 <아침(朝)>이 입선을 차지한 이래 내리 5년 연속 입선함으로써 천재 화가의 등장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1940년에는 도일, 천단회화연구소에 들어가 공부하게 됐는데, 다음 해 당시 일본 최고 등용문인 문부성전에서 <6월 무렵>으로 입선하였고, 그 이듬해에도 연이어 입선을 차지하여 천재성을 과시했다.
임인은 10대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당차고 자유로운 그림을 그렸다. 조부인 소치와 부친인 미산을 좇지 않고 현실에 시선을 돌려 실사 풍경을 추구했다. 닭을 소재로 한 일련의 작품들과 영모화에서는 이미 세필 묘사가 능수능란한 경지에 올랐음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자연풍경을 대상으로 한 일련의 산수는 기존의 화풍을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조형감각을 찾으려는 의지를 감추지 않았다. 1935년 <朝(조)>는 이와 같은 의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언덕과 산등성이를 선염으로 처리함으로써 모호하고 몽롱한 서정미가 돋보인다. 나무줄기와 가지에도 선염으로 씌움으로써 특이한 시각적인 이미지와 정서를 포착하는 감각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는다.
특기할 일의 하나는 1942년 문부성전 입선작인 <6월 무렵>은 당시로서는 너무나 독특한 조형미였다. 황토를 재료로 하여 점묘법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전답을 구획하는 구성과 평면적인 이미지에 근사한 파격적인 기법이 돋보인다. 이 작품이 박수근의 점묘화를 연상케 한다는 건 필자만의 시각일까.
전대미문의 선염법으로 일군 독창적인 운무산수
4대 임전林田 허문許炆(1941∼)은 전라남도 목포에서 출생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부친을 여의고, 7세 되던 해에 백부인 남농의 슬하에 들어가 성장했다. 남농의 8남매와 함께 자라면서 고등학교 시절에는 밴드부에 들어가 트럼펫을 불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붓을 들었고 결국 평생의 직업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전이 그림을 그린다고 했을 때 남농은 형편이 어려운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 극구 말렸다. 그런데도 임전은 그림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숨어서 습작하기를 거듭했다. 하지만 같은 집에서 오래도록 숨길 수 없는 일이어서 들키게 되었는데, 그림을 본 남농은 그제서야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허락했다. 한 번도 가르친 일이 없음에도 무언가 소질을 보았는지, 아버지의 솜씨를 타고났다고 여겼는지 문하에 두었다.
남농이나 임인 두 형제는 그림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음에도 가정형편으로 인해 고등수업을 받을 수 없었던 데 대한 한이 있었던지, 조카가 대학에 진학하는 걸 막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홍익대 미술학부에 들어가게 되었다. 1966년 제15회 국전에서 입선을 시작으로 제19회, 제20회 연이어 입선을 차지했으나, 이듬해 낙선하게 되자 화가로서의 등용문이나 다름없는 국전을 포기하고 말았다.
국전에서 벗어난 이후에는 선대의 그림을 보면서 전통에 관심을 보였다. 산수의 경우에는 남농이나 임인의 작품을 떠올리는 서정적인 풍경이었다. 실경에 기반을 두고 옅은 운무가 깃들이는 서정성이 짙은 산수였다. 이와 함께 문인화에도 관심을 가져 수묵화가 지향하는 문인적인 감각 및 취향에 관한 이해도를 높이고자 했다. 임전만의 조형적인 형식미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운무산수는 이처럼 선대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 인식 및 인간의 내면적인 욕망을 형상화
5대 허진許塡(1962∼)은 남농의 손자이고 서울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했다. 운림산방의 후손임에도 대학 졸업 직후부터 산수화와는 다른 길을 택했다. 전통을 잇겠다는 의무감 같은 게 있을 법한데도 이에 개의치 않고 현실에 시선을 돌렸다. 그럼에도 수묵을 견지하겠다는 의지를 통해 전통에의 무관심이 아님을 천명한다.
그의 관심사는 인물과 동물에 초점이 모아졌다. 정적인 이미지의 산수가 아니라 동적인 존재로서의 인간과 동물에의 관심은 내용 중심의 작업임을 암시한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존재가 가질 수 있는 이동성, 즉 자유로운 움직임(자의적인 의지에 의한)은 개체의 온전한 자유의지에 따른 독립성을 보장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인간이나 동물을 회화적인 제재로 끌어들임으로써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사회적인 규범과 그에 반응하는 자의식은 열렬한 자유의지를 지지한다. 따라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주체적인 존재로서의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사회와 역사를 거역할 수 없다는 자아 성찰의 인간상으로 비친다.
이처럼 회화적인 제재로서는 무겁기도 한 인간의 내면적인 욕망과 갈등을 비현실적인 해석 및 복잡한 구성으로 형상화한다. 원시와 문명, 자연과 문화라는 공존 또는 대립이라는 등식은 암각화를 연상케 하는, 즉 스토리의 연결이 난해한 구성으로 진행된다.
전통과 현대, 사진과 수묵을 조합한 신표현
5대 허재許在(19∼)는 남농의 손자로서 홍익대학교 동양화과를 졸업했다. 동양화를 전공한 것은 아무래도 집안 내력, 즉 운림산방 소치의 후손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정작 그림을 보면 전통적인 남도 문인화 풍과는 다른 현대미학에 경도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과 완전히 결별한 건 아니다. 여전히 실재하는 풍경을 사생이라는 방식으로 도입하고 있을뿐더러 그 결과물을 보더라도 수묵산수의 존재감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작업방식은 기존의 수묵산수와는 연결고리가 없다. 무엇보다도 실사 대신에 사진을 이용하고 있기에 그렇다. 사진 촬영을 한 이미지를 기반으로 하여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흡사 수묵화처럼 보이는 풍경이 만들어진다. 선명한 이미지와 흐릿한 이미지가 화답하는 화면 구성은 얼핏 보아서는 수묵화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수묵담채만으로도 이러한 시각적인 이미지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보이는 사실의 재현이 목표는 아니다. 보이는 사실을 가져오되 여러 차례를 거치는 다소 복잡한 작업 과정에서 미의식과 미적 감각이 개재하면서 관념적인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보이면서도 또는 보이지 않는 듯싶은 미묘한 이미지 변조는 관념의 그림자일 수 있다. 그 관념의 그림자는 전통 산수가 지어내는 이상적인 풍경과는 다른, 순수한 조형미에 관한 주관적인 해석일 따름이다. 그의 조형 세계는 세상 풍경을 가져오되 기존의 정형화된 형식과는 완연히 다른 형식미를 탐색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