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인의 미학산책] 정신세계의 미학 Ⅳ

   세 번째로 상상의 미는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장식의 미도 아니다. 특히 사실은 두 번째이다. 여기에는 사실의 방식과 같은 실물로부터의 정신적 감동은 없다. 거기에 그것이 있다고 한다면 사실이 이 방식에 합류해서 한 폭의 작품이 된 것으로써 순수한 이 방식은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방식에서 주 되는 것은 첫 번째와 같은 장식의 미이다. 장식미술에 있어서는 자연의 형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지만, 이 경우에는 자연물의 형을 빌려서 나타난다. 그러나 사실의 경우와는 다르다. 순수한 사실의 경우는 자연물의 형 바로 그것의 아름다움이다. 물형 그 자체의 미를 찾아내는 것은 물형과 내면의 미와 일치한다. 그 때에 사실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세 번째 경우에 자연의 형을 빌리는 것은 그것과는 다르다. 이 경우는 자연물의 형 바로 그것의 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자연의 형에서 내면의 아름다운 장식의 미를 나타내는 합당한 형, 선, 색을 사용하는 것이다. 자연물의 형은 그러므로 기억에 많은 것들이 자유롭게 그 형을 바꾸어도 좋은 것이다. 자연의 현상으로서 있을 수 없는 것도 미술의 미에는 지장을 초래하지 않는다.

[박명인의 미학산책] 정신세계의 미학 Ⅳ
[박명인의 미학산책] 정신세계의 미학 Ⅳ

 

   이 방식에 있어서도 항상 자연의 아름다운 현상에 눈을 멈추는 일을 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을 자연으로부터 발견하면 그것이 내면에 잠들어 있던 미를 깨어나게 한다. 아름다운 상상을 내면에서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내외는 서로 호응한다. 장식 미는 자연의 아름다운 형을 불러 요구한다. 자연의 아름다운 선이나 색은 내면의 장식미를 깨어나게 하고 내면의 장식미는 자연의 아름다운 형을 불러낸다. 그것은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다.

   미술에 있어서의 문학적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개념, 심리 등을 다루는 것은 이 방식에 있어서이다. 미래 미술은 형의 예술이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니다. 미술에도 무형의 물질을 취급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이다. 인상파 이래 이 잘못된 생각이 일반 미술가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다. 미술에는 미술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문학적 요소가 있다. 그것은 미술의 훌륭한 영토이다. 예를 들면, ‘분노’라는 무형의 관념을 미술로 표현한다면 화가는 화낸 사람의 얼굴을 그려낸다. 거기에는 형의 미, 색의 미, 순수 미술적 자극도 있다. 그러나 그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분노라는 완전히 무형의 자극이, 미술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자극이, 그것들 유형의 자극, 즉 미를 빌려서 사람을 자극한다. 이것은 미술에 있어서 처음으로 할 수 있는 무형적인 표현이다. 미술은 따라서 유형물만을 다루는 예술이 아니다. 미술은 무형적인 관념이나 심리를, 문학과는 다른 표현으로 훌륭하게 나타내는 역할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할 수 없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근대인이 무형물을 취급하는 것은 문학만의 임무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다. 지나친 생각이다. 미술에 고귀함ㆍ장엄함ㆍ신성함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멸시와 같은 현상이 되어 가는 것이다. 바로 신의 얼굴을 그린다는 것은 웃음거리다. 사람의 얼굴에 신성한 느낌을 그리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다. 바보같은 얼굴에 태연함이 있다. 초상화에 혼이 들어간다는 것은 옛날 이야기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들은 미술을 너무나 형의 예술로 지나치게 본 결과이다. 근대에 이르러 점점 사실의 미가 발견되어, 물질 자체의 미를 점점 중시한 결과 그 생각에 지나치게 얽매였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조금 빗나갔지만 무형의 재료가 형을 주는 것에는 무형의 관념이나 심리 나름대로의 특성과, 어떤 형의 특성이 미적으로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를 들면, 사랑이라는 관념에 어울리는 형ㆍ선ㆍ색이 내면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두 개의 내면에서 일치하지 않으면 미술로서의 무형의 표현은 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내면에서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식 이상에서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개념적으로나 의식적으로 그것을 일치하게 한 것은 대충 저속한 느낌이 든다. 그렇게 되어서는 예술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것은 낮은 의미에서의 삽화이며, 도해이다.

   이상으로 내면의 미에 나타나는 세 가지 경우에 대해서 말했지만 미술을 그렇게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하나의 미술품에 이 세 가지 경우가 서로 혼합하고 조합해서 하나의 효과가 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이다. 단지 드물게는 상당히 순수하게 하나만을 자기 영토로 하는 미술도 있지만. 회화ㆍ조각이 아닌 순수한 장식미술에는 때때로 완전히 순수하게 다른 경우에 도움을 받지 않고 독립해 있는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회화라고 해도 사실에 있어서의 쿠르베나 세잔느의 어떤 그림은 상당히 대표적으로 순수로 가는 방법에 대한 독립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가는 방식 역시 혼합 쪽이다. 사실을 주로 하고 있지만 장식을 잊은 적은 없다. 하나의 화면에 장식과 사실과 상상을 구별하고 있는 것 같은 것을그리고 싶다.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말하면 사실에 실로 훌륭한 장식이 있다. 사실을 깊이 추구하면 불가사의한 이미지에 도달한다. 그것은 신비이다. 실재의 느낌의 깊이는 신비하다. 그것은 무형의 미이다. 그것은 불가사의한 장식적 리듬을 가진다. 자신은 사실로부터 들어온 신비파라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같은 용도로 구사해 보고 싶다. 어쨌든 지금의 누구보다도 이것을 혼연하여 살려 보고 싶은 생각이 들고 있다. 근대에 태어난 여덕(餘德)으로 옛날 사람보다는 사실의 미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이것을 지금까지의 그림보다 더욱 자유롭게 구사해 보고 싶다. 예술은 실제력만 있으면 자유의 세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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