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서울시 용산구 한남대로 91에 위치한 가나아트 나인원에서는 2023. 11. 17. (금) – 2023. 12. 10까지 에르네스토 버고스 개인전 'Shape Memory'가 열린다.
이번 전시는 현재 뉴욕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작가 에르네스토 버고스(Ernesto Burgos, b. 1979-)의 아시아 첫 번째 개인전, 《Shape Memory》로 전시명 ‘Shape Memory’는 열과 같은 외부 자극에 노출되었을 때 특정 물질이 자발적으로 원래의 형상으로 돌아가는 형상기억을 뜻하는 단어로, 형태와 구조가 재구성된 오브제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버고스의 예술세계를 암시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태어난 버고스는 부친의 고향인 칠레에서 성장했으며, 이후 미국으로 돌아와 샌프란시스코 예술대학(the College of Arts in San Francisco)에서 미술학 학사, 뉴욕대학교(New York University)에서 미술학 석사를 취득했다. 또한 케이트 워블 갤러리(Kate Werble Gallery, 뉴욕), 더 고마(The Goma, 마드리드), 니노 마이어 갤러리(Nino Mier Gallery, 로스엔젤레스) 등에서 개인전을 한 작가는 2022년 가나아트 나인원에서 열린 그룹전을 통해 한국에 처음 소개된 바 있다.
에르네스토 버고스의 작업은 도예가 피터 불코스(Peter Voulkos, 1924-2002)의 도자 조각, 존 체임벌린(John Chamberlain, 1927- 2011)의 자동차 금속 부품으로 만든 역동적인 조각 등 1970년대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적인 조각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 어떤 부분은 거칠고, 또 어떤 부분은 매끄러운 유기적인 형태가 곡선을 따라 이어지면서 버고스의 조각은 기존 물성과는 전혀 다른 단단함과 묵직함을 발산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처럼 역동적이면서도 부드러운 형태는 작가가 물리적 개입을 통해 재료의 물성을 변형하면서 중력을 거스르는 것이 가능한지 오랫동안 실험을 지속해 왔기에 가능했다.
중력과 물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사는 소파와 같은 무거운 가구를 자르고 레진으로 봉합하며 다양한 형태로 재조립한 그의 초기 조각작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이때 우연히 가구를 절단하고 붙이는 격렬한 과정에서 레진이 작업실 바닥을 보호하는 두꺼운 판지에 떨어져 겹겹이 쌓이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 형태는 오랜 시간에 걸쳐 합성 레진이 스며들면서 뒤틀리거나 구부러지고 있었다. 조각 작업대 위가 아닌 발밑에서 시작된 이러한 의도하지 않은 변형과 그 형태에서 발견한 리듬감, 입체감은 버고스가 판지와 유리섬유를 주재료로 사용한 새로운 형태의 작업을 발표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번 개인전에 출품되는 신작들은 회화 작품처럼 벽에 걸 수 있도록 제작되었지만, 동시에 입체적으로 조각된 비정형적인 형태를 통해 평면성을 깨트리며 전통적인 추상화와 차별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처럼 최근 몇 년간 이어오고 있는 ‘벽면 조각’(wall-based sculpture) 작업에서 버고스는 작품의 윤곽선을 어둡게 처리함으로써 음영을 강조하여, 각각의 작품을 독립적인 프레임으로 구분하면서 깊이감을 표현했다. 또한 다채로운 색상과 뚜렷한 윤곽선 외에도 그의 작품에는 격렬한 신체적 개입과 리듬감이 돋보이는데, 이는 버고스가 합판, 마분지 등의 다양한 산업용 재료를 부수거나, 찢거나, 구부리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변형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재료 위에 물감을 붓거나 즉흥적으로 드로잉을 한 뒤 밀랍과 레진 등의 접착물로 그 형태를 고정했다.
이때 판지의 코팅에 사용된 액체 유리섬유는 완전히 굳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리며 작가가 처음 형태를 잡은 후에도 오랫동안 천천히 움직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일시적인 정지 상태에서의 우연한 순간을 포착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이렇듯 그간 눈에 띄지 않았던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면서, 의식적으로 우연성을 강조하는 버고스의 작업 과정은 우연을 '원재료’라 표현한 독일계 조각가 장 아르프(Jean Arp, 1886-1996)가 작업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찢어진 종이에서 영감을 받아 발표했던 콜라주 작업을 연상시킨다. 버고스는 이에 대해 “나는 개방적인 작업과정을 선호하기 때문에 조각의 방향성은 미리 잡아 놓지만, 그들이 움직이고 비틀리는 과정을 전면적으로 통제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버고스의 조각은 서서히 굳어서 유기적인 형태를 이루며, 재료 고유의 물성과 매체의 경계를 허물면서 새로운 각도로 현대 조각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