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인의 미학산책] 개념과 대상 Ⅳ
과학은 자신의 수법에 비판적 통찰을 가할 수 있게 되면 과학의 대상과 직관적 지각 또는 직관의 대상과 마찬가지 유사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일체 털어 내게 된다. 과학은 과학의 대상이 직관의 대상에 일관해서 관계되어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전자가 결코 후자에 환원될 수 없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한 환원은 모두 과학적 사고가 특수한 작업을 후퇴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세계나 세계연관의 개념적 파악을 소여의 단순한 이중화로 변해버리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 차이가 있는 것을 승인하는 것은 물론 동시에 하나의 논리적 딜레마(dilemma)가 따르는 것도 문제되지만 이 차이에 의해 대상의식의 내부에서 제시되는 내적인 다형성(多形性)은 바로 대상의식이 고유의 과제와 모순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대상은 완전히 일의적인 것으로서 사고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다양성, 운동, 그리고 어떤 단계로부터 다른 단계로 이행하는 의식에만 속하는 것이며, 그 의식이 표현하고자 하는 존재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적어도 존재는 운동의 대극(對極) 또는 대립자로써 운동이 확고한 불변부동의 목표로서 이해될 뿐이다. 존재에는 이미 어떠한 분화(分化)도 계층화도 있을 수 없으며 존재할지 존재하지 않을지 양자택일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단순한 사고내용이라면 일반성이 다른 정도로 응해서 계층(階層)을 형성하는데 용이하다고 할 수 있지만, 공간 안에서 격렬하게 서로 부딪치는 사물의 영역에서는 이러한 협조는 일어날 수 없다. 사물의 영역에서 한 사물이 점유하고 있는 장소에서는 다른 사물은 손을 떼는 수 밖에 없다.
즉, 사물의 영역에서는 자신이야말로 현실적이라고 주장하며 등장하는 둘 사이에서 명확하게 결착(決着)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결착은 모두 동시에 어떤 희생을 수반한다. 의식의 내재적 내용, 다시 말해 직접적인 감각ㆍ지각ㆍ직관으로 제시되는 현실과 이론을 과학적 개념으로 인도해 가는 별종의 존재, 즉 그 현실을 넘어 초월적 존재의 어느 것인가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 초월적 존재야말로 참된 존재, 본래적 존재라고 고집한다면 최초의 세계는 감각기관의 단순한 환영으로 해소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색이나 소리라는 주관적 성질은 자연과학적 대상으로 이루어진 실재적 세계에서는 하나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천칭(天秤)의 한 편 접시에 현실의 추를 올려 놓으면 이론상의 객관, 예를 들면 원자나 전자는 단순한 추상물이 되어버린다. 자연과학이 말하는 물질은 순수한 지각 앞에서는 나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지만 순수한 지각에 맞부딪치면 틀이 깨져 버린다. 그렇지만 인식문제의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이 양자택일이야말로 이미 독단적 전제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양자택일은 처음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요하고 있다.
거기에는 페티쉬오 프렌시페어(petitio principii)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실재적 세계관은 존재 가운데에서 완전히 불변부동인 것을 탐색하고 그 존재를 어떤 주어(主語)에는 귀속할 수 있어도 다른 주어에는 귀속할 수 없는 하나의 귀속과 술어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식에 관한 비판적 사고방식에 있어서의 이 양자택일은 이미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이 사고방식에서 존재한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실재를 나타내는 술어를 표시하는 것에서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 사고방식에 있어서 인식의 대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인식이 있는 특정한 형식, 인식이 있는 기능에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에 의해 처음으로 특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그리고 이것들의 기능 사이에는 단순한 항쟁이나 상반이 생길 일은 없고 오히려 그것들의 기능은 상관적으로 서로 대응하여 서로 보족(補足)하는 관계에 있다.
그것들의 기능은 각각 단순하게 다른 기능을 부정하거나 무효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은 서로 다른 기능을 수용할 때마다 다른 체계적 연관을 바탕으로 새롭게 형성하거나 새롭게 규정한다. 그리고 바로 이 종류의 통합이야말로 인식 대상의 해명과 기초를 확고히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칸트의 말에 따르면 인식의 대상이란 ‘그것에 대해서 개념이 종합적 필연성을 표현하게 되는 것 같은 무엇인가’에 다름 아닌 것이기 때문에 그 대상의 존재에 관한 질문은 종합적인 필연성을 무엇인가 의미하고 있어서 그 필연성은 어떠한 조건에 의해 질문과 관계없이 대답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근본구상의 범위 내에서라면 이 의미는 의미로서 현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 단계로 일련의 조작 가운데에서 처음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 즉 그 의미는 각양각색의 일련의 의미 위상을 빠져나가서 처음으로 참된 규정, 충분한 규정을 손에 넣게 된다고 말해도 결코 모순되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