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회 김달진미술사이야기

 

[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제117회 김달진미술사이야기에서는 강남구 가로수길에 위치한 예화랑이 45주년을 맞아 기념전에 맞춰 ‘밤하늘의 별이 되어’를 진행하고 있는 김방은 대표의 인터뷰를 위해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김달진 관장과 2023년 4월 12일 오전 11시 전시장을 찾았다.

문화건설
문화건설

예화랑 1, 2, 3층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번 ‘밤하늘에 별이 되어’전을 층별로 김달진 관장이 리포터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이번 ‘밤하늘에 졀이 되어’에 나오는 작가들은 오지호, 구본웅, 남관, 임군홍, 이인성, 김환기, 윤중식, 최영림, 김향안, 유영국, 손응성, 장욱진, 이준, 임직순, 이대원, 홍종명, 문신, 권옥연, 정규, 천경자, 변종하 작가로 21분의 작가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번 전시회의 21분은 미술계에서는 동양화가 주류였던 시기 이 땅에 서양화가 유입된 초기 시절에 서양화를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의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독자적인 예술로 승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일생을 사셨던 분들이다. 

농자천하지대본야
농자천하지대본야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쳐 해방과 6.25 전쟁이라는 한국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 속에서 오늘의 대한민국 미술을 반석 위에 올려준 미술 문화 건국의 주역들을 모시는 전시이다. 김방은 예화랑 대표는 “지금은 모두 세상을 떠나 이 자리에 함께 하시지는 못하지만 연락이 닿는 유족분들과 함께 이분들을 기리며 이분들을 기억하고 이분들의 아름다운 작품들을 보면서 많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종이에 채색 1950년대
종이에 채색 1950년대

이어 “당시를 살았던 분들의 예술에 대한 진정성, 순수함과 열정을 느끼며 새삼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작가에 대한 존경심, 예술에 대한 경외감을 다시 한번 새길 수 있었으며 힘들었지만 아름다웠던 시기를 돌아보며 지금처럼 좋아진 세상을 보지 못하고 가신 분들의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들려드리고 싶다.”고 말하고 “비록 지금 모습은 볼 수 없지만 ‘밤하늘의 별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신 분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부연 설명을 했다.

서귀포
서귀포
임직순 정물
임직순 정물
손응성 석류
손응성 석류
유영국 work
유영국 work
윤중식 고향
윤중식 고향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관장이 김방은 대표에게 질문하고 있다.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관장이 김방은 대표에게 질문하고 있다.

 

오지호 (1905~1982)
1919년 3.1 운동 직후 나라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강경한 성품과 남다른 민족의식이 전 생애에 걸쳐 있었던 작가. 
1921년 한국의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으로부터 미술을 배우고, 1928년 서양화가 단체인 녹향회를 결성하여 전시를 열어 활동하던 중 일제의 탄압으로 중단되는 사태를 맞기도 했었다. 6.25 전쟁 때에는 인민군을 피해 산중 생활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적도 있는 고난 했던 우리의 역사를 피부로 느꼈던 작가이다. 

구본웅 (1906~1953)
1930년대 전반기 청년작가 시기에 전위적인 예술세계로 동료 화가들과 문인들 사이에서 “서울의 로트렉”이란 칭송을 받았다. 그도 로트렉과 비슷하게 유아 때의 병이 원인이 되어 비운의 곱사등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척추 장애 때문에 인버네스(유럽식 망토)는 구본웅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었고, 덥수룩한 머리와 창백한 얼굴, 수염이 뻗친 이상과 꼽추인데다 땅에 끌리는 인버네스를 입은 구본웅이 함께 거리를 거닐면 곡마단이 온 줄 알고 아이들이 뒤를 따랐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파리 중심의 전위 미술이던 야수파와 입체파 표현파, 초현실파 등의 방법을 과감하게 수용함으로써 한국 모더니즘 미술의 기수가 되었다. 
1927년 조선 미술전에 조각부로 석고 조소 “얼굴 습작”이 특선을 받았을 만큼 조소 실력도 뛰어났으나 스승인 김복진이 1928년 봄, 공산당 사건 때 핵심당원으로 체포되어 복역하게 되면서 조소 작업도 중단되었다. 그는 동경에서 미술과 미학을 공부하며 미술비평과 미술론 집필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남관 (1911~1990)
남관은 흔히 문자 추상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 작업을 완성해 가는 그가 창안한 데콜라주 기법은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물감이 아닌 종이, 천, 얇은 철판 등을 캔버스 위에 접착제로 붙이는 것을 콜라주라 한다면 데콜라주는 반대의 프로세스로, 붙인 이물질을 떼어내는 작업이다. 남관은 6.25 전쟁이 남긴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던 1954년 미도파화랑에서 도불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2월 프랑스 유학을 감행하였다. 이때만 해도 서울을 떠나 일본 요코하마에서 배를 타고 한 달에 걸려 파리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68년까지 14년간의 프랑스 생활이 시작되었다. 힘든 생활이 시작되었다. 몽파르나스의 반지하 셋집은 습기가 늘 흥건했고, 벽돌을 바닥에 놓고 그 위에 캔버스를 세워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극한의 상황이었지만 목숨 걸고 커피 한잔의 시간도 아까워 사람을 만나는 것도 피해가며 그림을 그렸다. 

임군홍 (1912~1950 월북 ~ 1979)
대한민국의 파란만장한 근대사를 고스란히 온몸에 떠 앉고 작업 활동을 했던 작가가 임군홍 이상의 작가가 또 있을까? 임군홍은 1930,40년대 서울, 신징, 베이징, 한커우에서 산업미술과 순수예술의 창작활동을 누구보다도 활발히 하였으나 1948년 교통부의 신년 달력에 세계적인 무용수 최승희 사진을 실었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수개월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이 1950년 9.28 서울 수복 때 임군홍은 가족을 남에 놔둔 채 일단 몸을 피해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월북을 하게 된다. 이것이 영원히 가족과 이별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르는 일이었을 것이다. 
1950년대 이후에는 평양, 개성, 함경북도 일대를 떠돌며 작업을 하다 68세에 세상을 떠나게 되는 그의 일생은 개인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무거운 시대의 아픔이었다.

이인성 (1912~1950)
한국의 서양화가 도입되면서 양화계가 형성되고, 화가와 학생들이 유화나 수채화를 공개적으로 전시하면서 확실한 정착기를 보게 된 1930년대에 혜성같이 등장한 이가 이인성이었다.

1929년 17세에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서 무난히 첫 입선을 하고, 1931년에는 일약 특선에 뽑혔다. 당시 화가이자 평론가였던 정규는 “이인성이 완성한 수채화의 독특한 수법은 아직도 (1957년 현재) 우리나라 화단의 가장 높은 금자탑이다.”라고 단언한 글을 쓴 적도 있다. <한국 양화의 선구자들>중에
 
김환기 (1913~1974)
이번 전시에는 김환기 작품과 예술적 동지이자 삶의 반려자인 김향안 (본명 변동림)의 그림이 함께 전시된다. 
두 사람은 1944년 고희동의 주례로 결혼하여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함께 겪고, 파리와 뉴욕에서 동고동락하며 예술 창작에 몰입하였다. 
김환기는 타고난 예술적 기질과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으로 추상미술의 최정상에 선 20세기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우리 산천과 달 구름 등 자연의 모습과 백자, 골동 민예품 등 민족정서를 일깨우는 화재를 선택해 서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사용해 서정적이고 추상적인화면을 완성시켜 나갔다. 

1930년대에는 일본에서의 교육과정과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전시활동을 하였고, 1946~49년 서울대 미술대 교수, 1952년에는 홍대 미술대 교수를 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56년 44세의 나이에 파리로 떠나 3년 동안 프랑스에서 창작 생활을 이어 나갔다. 
1959년 김환기가 파리를 떠나면서 몽파르나스 뒤 어두운 창고 같은 남관의 화실을 찾아 “자네는 파리에서 뼈를 묻게”라고 한말은 후에 남관의 글을 통해 알려졌다. 

윤중식 (1913~2012)
윤중식은 학창 시절 꿈이 연극배우, 연출가, 지휘자였다고 할 정도로 예술적이 감정과 적성이 타고났다. 어려서부터 사랑과 평화의 마음을 간직하게 되었던 윤중식의 성장 배경은 그의 회화세계에서 선명하게 연결된다. 그는 석양빛 찬란한 자연미의 정취, 비둘기가 나타나는 평화 염원의 시각이 내포된 서정적인 풍경미를 추구한 작가이다. 

1931년 2학년인 그는 서울의 미술가 등용문이던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출품하여 입선, 그다음 해와 다음다음 해에도 연속 입선하였다. 중학교를 졸업하며 화가의 꿈을 확정한 윤중식은 도쿄의 데이코쿠 미술학교 서양학과로 유학을 떠나 1940년 졸업하고 돌아온다. 1953년 6.25 전쟁 정전 직후 윤중식은 제2회 국전 서양화부에 출품한 <가을풍경>이 특선에 오르며 작가적 위상을 다진다. 그 후 몇 번 입상을 거듭한 그는 1959년 제8회전부터 추천작가 위치에 오른다.

최영림 (1916~1985)
최영림은 전설을 테마로 하는 작품 활동을 벌였던 전설의 작가이다. 전설은 옛날이야기의 한 종류이며 어떤 시대, 어느 민족에게도 전승되고 있는 인간적 염원의 반영으로 나타난다. 전설은 사람들을 같은 방향으로 인도하고 삶의 뜻을 바르게 잡아주는 말벗의 역할을 한다 볼 수 있다. 

최영림은 이렇듯 지난날의 말벗이 은밀하게 들려주던 전설의 맥락을 회화의 어법으로 번안하
여 현실의 우리들에게 들려주던 말벗으로서의 화가이다. 말벗으로서 최영림의 그림은 정령신앙적인 모티브가 농후하게 응용되고 있다. 그의 소지가 모래나 흙가루 같은 마티에르로 되어있어 더욱 그렇다.

김향안 (1916~2004)
김향안은 시인 이상과 함께 했고, 수화 김환기의 아내로 기억되지만 그들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 스스로도 그림을 그리고 수필을 씀으로써 자신의 미의식을 발전시키며 본인만의 예술세계를 펼쳤다. 그녀는 한국적인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여 해외에서 활동하는 김환기의 예술 토양이 되어주었으며 그의 작품을 가장 한국적이자 세계적인 작품으로 만드는데 일조한다. 

뉴욕의 화실에 들어오는 햇살이 아까워 그림을 그렸다는 김향안은 청명한 하늘의 빛과 같은 환한 색조의 섬세한 변주를 보여준다. 추상적으로 부드럽게 표현된 풍경은 보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떠올리게 만들며, 그녀만의 따뜻한 시선으로 펼쳐진 독창적인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유영국 (1916~2002)
유영국은 한국 근대미술의 전위에 서서 추상미술의 영역을 개척했던 선구자이다. 특히, 한국의 자연을 아름다운 색채와 대담한 추상 형태로 빚어낸 최고의 조형감각을 지닌 화가이다. 1935년 도쿄 문화학원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했으며, 비교적 자유로운 화풍을 자랑했던 문화학원에서 그는 당시 도쿄에서도 가장 전위적인 미술운동이었던 ‘추상’을 처음부터 시도했다.

유영국의 작품에서 점, 선, 면, 형, 색 등 기본적인 조형요소가 주체가 되어 등장한다. 이들은 서로 긴장하며 대결하기도 하고, 모정의 균형감각을 유지하기도 함으로써, 그 자체로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하다. 형태를 단순화하고, 절묘한 색채의 조화를 추구하되, 마티에르를 최대한 살리는 방식을 탐구했다.

손응성 (1916~1979)
우리의 양화사에서 손응성이 차지하는 명확한 예술적 성향과 비중은 철저한 내밀성의 표현 형태로 귀착한 독자풍의 사실주의 실현으로 정평돼 있다. 손응성의 독특한 사실주의 작업의 성립은 1950년대 중반부터 한국적인 미의식에 바탕을 둔 치밀한 시각과 정감으로 집안의 해묵은 기물 혹은 골동가게에서 입수한 옛 도자기, 토기 등을 소재삼은 정물화와 고궁의 역사적 분위기를 주제삼은 풍경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 수법은 세밀한 묘사로써 손응성의 집요한 사실주의 정신을 발현시킨 것이다.
손응성은 타고난 외곬 화가였다. 어려서부터 그림 이외에는 아무 흥미가 없었다. 학교 공부도 싫기만 해서 배재중학교 2학년 때 자퇴 후 곧바로 일본으로 미술학교 유학을 떠나 화가의 길을 택했다. 그 뒤 화가 생활을 시종 외곬의 사실주의 집착으로 일관하였다.

장욱진 (1917~1990)
장욱진은 소년시절부터 학생미전에서 빛나는 수상을 하는 등 천부적인 예술적인 소질을 발휘하였다. 1943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후배 양성과 조국의 빈곤한 문화예술 발전을 위한 터전을 개척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독보적 회화 세계를 펼친 작가로 꼽히며 장욱진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무엇보다 화가 자신의 생활과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단순히 바라보는 정경으로서의 향토적 풍경이 아니라 작가 자신이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고 느낀 정서가 응축되어 있다.

이준 (1919~2021)
한국 현대미술의 태동기를 함께 한 1 세대 미술가로 그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경험한 전후세대로, 수십 년간 교단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미술가이자 교육자로서 한평생을 보냈다.

이준은 초기 일본 태평양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귀국한 초기에는 야수파적 화풍을 구사하며 구상작업을 하였으나 1957년 ‘창작미술협회’에 참가하면서 비구상 작업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후 김환기, 유영국 등과 더불어 비구상 회화를 개척해 구상 회화가 이끌던 한국 화단의 지평을 넓혔다.

임직순 (1921~1996)
‘꽃과 여인의 작가’로 불리는 임직순은 특유의 색채가 인상적인 작가이다.
임직순은 빛의 대비와 색채의 변조를 통한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면서도 형식적으로 안정된 구도를 추구하였으며, 작품의 주제로 자연의 모습과 꽃과 여인을 화폭에 담아내 궁극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힘과 그 내면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작품의 바탕을 인상파적인 미학에 두었지만, 그보다 더욱 현대적인 감각이나 시각의 기쁨을 자아내게 하는 것이 임직순의 작품세계이다. 언뜻 보기에는 그를 색채화가로 보기 쉬우나 형태와 색채 화가 두 가지를 아울러 갖고 있다고 본다. 하나의 화상이 결정되면 그것에 알맞은 주조색을 설정하고 그 색을 중심으로 다양한 보색 관계가 성립된다. 
그의 작품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대상이나 자연을 올바르게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토대로 하여 전개시킨 굳건한 화면의 구조이다.

이대원 (1921~2005)
이대원 작가의 작품에는 진정으로 그리고 싶었던 충동과 남다른 심성의 자연관과 향토적 애정의 깊이가 진하게 묻어 나온다.
이대원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그림 재능을 보이고 있었으나 뜻했던 미술학교 진학은 집안의 반대로 좌절하고 경성제국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림을 포기할 수 없었고, 화가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려고 들었다. 전통적 미의식과 한국적 감성의 표출, 우리의 고화, 민화 민예품 등에 애정을 가지고 있던 이대원은 1960년대 전통적 미의식과 미의 유산의 본질을 자신의 현대적 화면에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홍종명 (1922~2004)
과수원 집 딸을 그리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 홍종명은 일제 강점기 때 데이고쿠미술학교에서 수학한 뒤 한국전쟁 중 남한으로 자유를 찾아 내려온 평양출신이다. 1951년 후퇴 때 제주까지 피난을 와 어려운 피난 상황에서도 제주시 칠성통에 ‘미술사’라는 화방을 열고, 오현중고등학교 미술교사로 일하는 동시에, 그림을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을 가르쳐 제주 현대미술의 주역들을 키워냈다.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이산이라는 아픔을 겪어 그의 작품에는 고향을 연상시키는 향토적 소재, 헤어진 큰 딸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자연스럽게 담겨있다.
작가는 향토적 정서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정립하였고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흙의 빛깔과 같은 색을 사용하여 고분벽화의 퇴락한 색조를 재현하려 했다. 

문신 (1923~1995)
문신은 유년시절을 마산에서 보내고 1938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일본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한 후 고국으로 돌아왔다. 마산과 서울을 오가며 회화작가로 활동하다가 돌연 1961년 프랑스로 떠나 60년후반부터 기존에 하던 구상회화에서 벗어나 추상조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는 도전과 실험을 통해 자신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만들어 나가던 때로, 구와 반구, 선이 만나 반복하고 변화하며 표면을 매끄럽게 연마하여 문신 특유의 개성적인 조형이 나타난다. 1970년 프랑스에서 열린 국제 조각 심포지엄에 출품한 13미터 높이 나무조각 ‘태양의 인간’으로 조각가로서 세계에 이름을 알렸다. 

권옥연 (1923~2011)
화가 권옥연을 떠올렸을 때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그만의 개성은 사물을 인식하고 자신의 내면 속에서 걸러내어 이를 화면 위에 개성적 이미지로 발현시키는 개인양식을 심화한 결과이다. 그는 독자적인 자신만의 양식을 확립한 작가들을 동경하면서 “전람회장에 들어갔을 때, 작품보다는 사람이 먼저 보이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하였고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체취, 자신만의 시, 자신만의 노래”를 갖기를 원했다.

이러한 면모는 권옥연을 어떤 사조나 운동의 흐름 속의 하나가 아닌 권옥연 자체가 가진 고고한 개성으로 작품을 바라보게 한다. 그가 일본 제국미술학교에서 수학 후 돌아와 활동한 초기의 구상적 화풍에서, 50년대 후반부터의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양식의 화풍, 70년대 이후의 인물, 정물, 풍경의 구상적 화풍으로 회귀하기까지 변화의 과정 속에서도 그의 감수성에 바탕을 둔 ‘스타일’은 또렷하게 드러난다.

정규 (1923~1971)
정규는 화가로, 판화가로, 도예가로 장르를 넘나들며 활발한 화단 활동을 하였다. 그는 20대에 일본 데이코쿠 미술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해방을 맞이했지만 곧 6.25가 터지자 부산으로 내려왔고 1953년 부산 르네상스 다방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이듬해 서울로 올라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55년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국립박물관 부설한국조형 문화연구소가 설립되자 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박물관에서 근무한 것이 계기가 되어 1958년에는 록펠러재단 초청으로 미국에 건너가 도자를 연구하였고 1963년 경희대학교 요업 공예과 교수로 부임하여 현대 도자 운동을주도하였다. 정규는 박대순, 남상교, 이신자 등과 함께 한국공예가회를 발족시키고, 공예 운동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천경자 (1924~2015)
천경자는 누구와도 닮지 않은 독특한 화풍과 강렬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컬러로 환상적인 작품세계를 확립한 작가이다. 그녀의 화가로서의 삶은 1940년 유학길에 올라 일본 동경여자미술대학에서 인물화를 익히고 1943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자신의 조부를 그린 작품이 입선하며 시작되었다. 

귀국 후 1946년에 모교인 광주여고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이후 1949년 서울에서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치르며 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그 무렵 동생의 죽음과 삶의 역경으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린 1951년 작품 <생태>는 수십마리의 뱀이 얽혀 있는 모습으로 화제가 되었다. 

천경자는 자신의 삶의 희로애락을 작품을 통해 가감 없이 보여주었으며, 특히 여성으로서 삶이 가진 한과 슬픔을 화려한 색채를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받았다. 대표적인 작품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는 55세의 작가가 22세 자신의 과거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린 것으로, 그녀가 그린 작품 속 수많은 여인들은 모두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분신이다.

변종하 (1926~2000)
변종하는 한국적 이미지를 서정적이고 은유적으로 담아낸 작가이다. 그는 1950년대 서울에서 활발히 작품을 발표해오다 196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의 아카데미 드 라 그랑드 쇼미에르와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62년 저명한 평론가이자 시인인 르네 드루앵(Rene Drouin)과 만나면서 이전의 표현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 작품 세계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르네가 말한 <테푸이예(depoailler)>, 껍질을 벗긴다는 뜻의 단어는 화가에게는 군더더기를 빼고 본질에 도달해야 한다는 의미로, 변종하 작품세계의 평생의 테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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