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넘나들며 융합하다
이은기, 서양미술사가, 목원대학교 명예교수
대학원 수업에서 그, 유영교를 만났다. 나는 공부 좋아하는 미술사 전공의 학생이었고, 그는 군대도 졸업하고 국전에서 큰 상도 탄 조각가였다. 이 만남이 평생을 이었다.
버스 뒷자리에 나란히 앉으면 그는 도사같은 말을 자주 하였다. “항상 기뻐하라. 매사에 감사하라”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한 나이가 30세 즈음이다. 석가모니도 29세에 출가하셨다.”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뭔 말인가 의아했다. 토요일 이른 아침엔 노자의 도덕경을 읽는 모임에 가곤 했다. 하숙집에 가보니 『성경』, 『미란타왕문경』, 『도덕경』 책들을 얼마나 읽었는지 손때 묻은 채 낡아 있었다. 그리스도교, 불교, 도교 등 한 곳에 구애됨이 없이 매달리는 모습이었다. 책꽂이엔 『사기열전』과 『대망』도 있었다. 종교심과 함께 야망이 느껴졌다.
결혼하고 일상 속에서 본 그는 모순덩어리였다. 가난을 감수하는 예술가인 줄 알았는데 금전욕이 강하였다. 가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갈구였다. 애욕도 강하였다. 그리고는 성경책을 읽고, 수도승을 만들었다. 어찌 보면 애욕이 수도승을 낳는 것 같았다. 종교를 갈구하는 근저엔 자신의 욕망과 고통이 있었다. 그리고 한편 작품에만 몰두하는 예술가인 줄 알았는데 가정생활에는 다정다감했다.
구도자
그는 유학가기 전 30대 초반부터 말년까지 꾸준히 구도자 작품을 제작했다. 어린 동자부터 늙은 승려까지, 무릎 꿇고 참회하는 자세부터 서서 합장하는 노승까지, 눈 코 입을 자세히 묘사한 사실적 인물부터 눈코는 없고 입만 있는 단순한 두상까지 다양한 양식의 수도승이다(p. ). 고통스런 표정부터 고요히 번뇌를 바라보는 듯한 승려, 깨달음에 만족한 듯한 은은한 미소까지 표정도 다양하다(p. ). 삶의 희로애락을 보는 듯하다. 이들 구도자의 표정은 법당의 근엄한 부처님보다 도 닦는 과정의 나한상에 더 가깝다. 몇 년 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였던 창령사 오백나한상들이 머리에 떠오른다(p. 과 그림1, 2). 유영교는 20세기의 조각가이며 오백나한을 만든 이는 이름 없는 조각승이었겠지만 돌을 다듬으면서 느꼈던 이들의 심정은 같지 않았을까. 아마 조각하는 매 순간, 삶의 희로애락, 자신의 역경과 이를 달래는 심정, 예술행위에서 얻는 위로나 카타르시스의 과정은 같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이탈리아 유학 중 집은 피사에 두고 남편은 매일 피에트라산타의 작업장에 오갔다. 하루는 내가 시험공부를 하느라 카라바지오의 <마태오를 부르심>(그림3)을 보고 있을 때였다. 그 그림을 보더니 무슨 내용이냐고 물었다. 그림에서 카라바지오는 ‘마태오의 부름’을 손 제스춰로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이 마태오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니, 세리였던 마태오는 설마 자기를 부르실까 하는 마음에 손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저 말입니까?”하고 예수에게 되물었다. 예수의 옆에 있던 베드로가 “그래 너를 부르신다.” 하며 손짓한다(마태복음 4장 18절-20절). 그리고 며칠 후 작품 <베드로를 부르심>(p. )을 집으로 가져와 보여주었다. 턱을 내밀며 손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손짓에서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베드로를 나타내는데 <마태오를 부르심>에서 본 손 제스춰를 혼합한 듯하다. 작품은 세워진 직사각형 대리석에 높은 부조로 새겨졌는데 이 부조도 어딘가 익숙했다. 바로 얼마 전 파르마(Parma) 여행에서 본 안텔라미(Antellami)의 조각이 떠올랐다.
파르마 세례당에 있는 12달의 조각 중 2월엔 위에 물고기 두 마리가 있는데(그림4), 그의 스케치에서도 같은 위치에 물고기 두 마리가 있으니 직접적인 연관을 느낄 수 있다(그림5). 그리고 물고기에서 어부였던 베드로가 머리에 떠오른 듯하다. 그러니까 주제는 세리로서 죄 많은 ‘마태오를 부르심’을 떠올리면서 물고기를 넣어 ‘베드로를 부르심’으로 변경한 셈이다. 작품은 안텔라미 작품이 지닌 프리미티브한 로마네스크 느낌이 강하다. 일상의 동작 속에 영혼이 담긴 육중함을 지니고 있다. 그는 미술사를 전공하는 내가 설명하면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냥 작품만 유심히 보곤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기회에 튀어나온다. 이미지를 어디엔가 저장했다가 어느 순간 그냥 툭 꺼내어 쓰는 듯했다.
그즈음 <욥>(p. ), <천신과 싸우는 야곱>(p. ), <잠자는 세 사람>(그림6, 2008도판 p.99) 등 성경의 인물들을 연이어 제작하였다. 온몸에 저주를 받으면서도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는 욥, 자기에게 복을 달라고 떼쓰듯 매달리는 야곱, 예수께서 잡히기 전날 기도하러 올라가시며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고 당부하셨지만 잠만 자는 세 사람, 모두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인물들이다.
이를 나타내기 위하여 작가는 매우 표현적인 조각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재료도 전통적인 조각에 적당한 하얀 대리석보다 다소 거친 돌들을 선택하고 있다. <욥>에는 구멍이 많은 석재를 사용하였다. 무릎꿇고 간절히 기도하는 욥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고, 흩어진 머리카락과 수염, 엉클어진 옷 주름이 깊이 패어 있어서 그의 이전 조각이 보여주던 정돈된 질서와는 사뭇 다른 고통의 표현이다.
<천신과 싸우는 야곱>(p. )에서 왼쪽의 하느님은 발을 밀어 벗어나려고 하시는데, 야곱은 하느님의 발을 붙들고 안 놓아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에게 복을 달라’고 무조건 떼쓰는 간절함이다. 작가는 이 표현을 위해 붉은 트라베르티노를 사용하였다. 붉은색에 다소 흰색이 섞여 있는 거친 돌이다. 기법에서도 정 대신 끌을 사용하여 거친 선 자국을 냄으로써 조각에서 회화적인 표현을 살리고 있다.
<잠자는 세 사람>(그림6)에는 거친 회색 돌을 사용하였다. 세 사람이 한 덩어리로 엉켜있다. 작가는 왜 이러한 주제의 작품을 하고 싶었을까. 하느님을 갈구하면서도 그저 현실에서는 잠만 자는 이들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일까 짐작해본다.
불교
그는 특히 석굴암의 부처님상을 좋아했다. 중국의 부처님상도 많이 봤지만, 석굴암 상이 최고라고 강조한다. 사진을 작업장 벽에 걸어놓기도 했다(그림7). 신체 비례도 아름답고 표정이 일품이라고 찬탄한다. 침묵의 얼굴이지만 웃는 듯하고, 근엄하지만 다정한 표정에 끌린다고 한다. 이러한 끌림은 부조작품으로 이어졌다(p. ). 정면의 얼굴을 넣기도 하고, 얼굴과 함께 불교 이야기를 넣기도 했다. 가로로 누인 부처님은 열반의 모습일까? 그 주위엔 부처님의 표정과는 상반된 성난 세 얼굴이 있다. 눈살을 찡그리고, 코를 벌렁벌렁하며 참고 있기도 하고,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p. ). 득도를 희구하지만, 현실의 자신 모습도 잊지 않은 듯하다.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융합
그의 작품 곳곳엔 그리스도교와 불교 도상이 혼재하고 있어서 흥미롭다. 부조작품 <부처의 득도와 바울의 회심>(p. 새로운 작품사진임)을 보면 왼쪽엔 반만 넣은 부처님의 얼굴이 있고, 중앙엔 나무가 있다. 그리고 오른쪽엔 말에 앉은 사람이 태양에 눈이 부신 듯 얼굴을 가리고 있다.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작가의 머리에 무엇이 맴돌고 있었을까. 작가가 제목을 남기지 않았으니 알 수 없지만, 보리수나무 아래서 득도한 부처님과 회심(回心)하는 바울이 함께 떠오른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던 사울(바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다. 사흘 동안 눈이 멀었으며 개종 후 눈을 뜨고, 적극적인 사도가 되었다(사도행전 9:3~9:19). 부처의 득도와 바울의 회심은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부분이 있다. 다른 세계로의 전환이다. 부처님에겐 열반이라고 하고, 바울에겐 기적이라 하고, 성인성녀들에겐 엑스타지라고 한다.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주제들이 함께 머리에 떠오른 것일까.
<신전III>(그림8, 2008년 도록의 p.109오른쪽)의 벽면엔 ‘유혹을 거절하는 수도승’이 새겨져 있다(그림9, 2008 도록 p.108). 왼쪽에 무릎 꿇고 있는 여자가 사과를 권하고 있다. 자세는 동양적이나 사과는 이브의 유혹을 연상시킨다. 아담의 자리에 있는 수도승은 돌아앉아 이를 거절한다. 그러나 눈은 여전히 여인에게 향해있고 얼굴엔 기분 좋은 느낌이 역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절하는 오른팔이 너무 완강하다. 몸은 수련의 길에 들어섰으나 마음은 아직 쾌락의 유혹에 있는 상황을 참으로 유머러스하게 나타내었다. 평소에 진지하기도 하고, 화도 잘 내고, 그러면서 웃기기도 잘 하던 남편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는 부처님의 손을 환조나 부조로 조각하기도 하였다. 아마 자비의 수인(手印)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작업장에 가보니 부처님 손에 못을 박아놓았다(p. , 2008도록 p.84 그림9). 못 박히심은 예수님의 희생과 사랑의 상징이 아닌가. 부처님의 자비와 예수님의 희생은 같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종교학으로 풀면 한 권의 책도 모자랄 이야기가 작은 부조 한 점에 담겨있다. 예수와 석가모니의 완전한 결합이다!
그와 삶을 함께하고, 제작하던 당시의 상황을 알고 있는 나에겐 그의 작품들이 그냥 조각작품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거기엔 그의 욕망과 깊은 그늘과 이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한 몸부림이 있다. 한국과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체화한 동양의 불교와 서양의 그리스도교 미술의 언어로 그 간절함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갔지만, 조각으로 남아있고, 조각이 말을 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