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종숙 기자] 현대미술가 양혜규가 브라질 상파울루 피나코테카 미술관Pinacoteca de São Paulo에서 남미 최초 대규모 개인전 《의사擬似-구어체Quasi-Colloquial》를 3월 4일부터 선보인다. 피나코테카 미술관의 신관 피나코테카 컨템포라네아Pinacoteca Contemporânea의 개관을 기념한 전시이자 양혜규의 첫 브라질 개인전인 《의사-구어체》는 모더니즘과 토착문화라는 브라질 문화의 대조적인 전통을 두 중심축으로 상정, 밀도 있는 개념적, 문화적 연구에 기반한 총 다섯 종류의 작업군을 소개한다.

양혜규 작가, 브라질 상파울루 피나코테카 미술관 첫 개인전 '의사擬似-구어체Quasi-Colloquial'
양혜규 작가, 브라질 상파울루 피나코테카 미술관 첫 개인전 '의사擬似-구어체Quasi-Colloquial'

 

광활한 전시장을 점유하는 〈적재된 모서리들Stacked Corners〉(2022)은 작가를 대표하는 블라인드 조각으로, 브라질 출신의 미술가인 칠도 메이어레스Cildo Meireles의 작품 〈가상 공간: 모서리들Espaços Virtuais: Cantos〉을 참조한다. 갤러리 천장에 매달린 다섯 점의 조각 중 세 점은 모터로 작동되어 관람자 위에서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나머지 두 점은 바닥까지 이어져 정적으로 서 있는 탑 형태를 띠는데, 모두 물리적, 잠재적 움직임에 대한 양혜규의 오랜 관심을 보여준다. 〈적재된 모서리들〉은 삼원색 중 두 가지 색을 결합한 이차색(보라, 초록, 주황)과 파란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서구 모더니즘과 대비되는 브라질의 대중적 근대 건축을 기리기 위함이다. 이러한 색 조합은 브라질 일반 주택 건축에서 벽과 바닥 칠에 가장 흔히 쓰이는 산화철의 붉은색으로 구성된 전시장의 긴 벽면과 조응한다.

전시장을 에워싸는 〈생경한 구어체Alien Colloquial〉(2022)는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벽지 콜라주 작업으로, 집요한 자료 조사에 기반한 양혜규의 작업 과정을 조명한다. 작가는 작업에 앞서 외국인의 관점으로 브라질의 배경에 대한 다층적인 조사를 실행했고, 이는 예술, 건축, 음악, 춤의 문화적 주제부터 자연, 이민, 범죄, 등 오늘날에까지 이어지는 사회적 갈등 상황에 대한 연구로 뻗어 나갔다. 작가는 “길들여지지 않은 영토”를 정복하지 않은 채 그 시간과 지형을 보다 총체적으로 여행하고 횡단하는 브라질의 예술가들을 소환한다. 토미 오타케Tomie Ohtake, 미라 쉔델Mira Schendel, 리지아 클라크Lygia Clark, 칠도 메이어레스Cildo Meireles, 리나 보 바르디Lina Bo Bardi, 오스카르 니에메예르Oscar Niemeyer, 카에타누 벨로주Caetano Veloso, 마리아 베타냐Maria Bethânia 등 예술가들의 눈, 귀, 손은 특정한 모양으로 재단되고 얽혀 헬로키티, 풍경, 동물, 열대과일, 악기와 기계 등 파편적인 이미지의 조합을 만들어낸다.

《의사擬似-구어체Quasi-Colloquial》 전시전경 브라질 상파울루 피나코테카 미술관, 2023
《의사擬似-구어체Quasi-Colloquial》 전시전경 브라질 상파울루 피나코테카 미술관, 2023

 

이번 전시의 기획을 맡은 미술관의 총괄 디렉터 요헨 볼츠Jochen Volz는 〈생경한 구어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양혜규의 작품은 예술품과 일상생활의 관계를 탐구하는 오랜 전통을 가진 브라질 미술사와 강렬한 대화를 형성한다. 고유의 변형 문법을 활용한 그의 예술은 다양한 사회, 문화, 경제 구조를 지시하며 대안적 언어 구조와 전위, 번역, 차용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한편 이번 전시를 기념해 동일한 벽지 작업이 국제갤러리 2층 ‘더 레스토랑The Restaurant’에도 설치되어 손님들을 맞이한다.

이번 전시에는 의인화된 조형물이 특정 안무를 수행하듯 배치되어 공연적인 차원으로 발전해 온 양혜규의 대표 연작 〈소리 나는 접이식 건조대Sonic Clotheshorses〉(2018-)도 포함된다. 빨래 건조대의 표면을 방울로 감싸 다양한 변주를 연출하는 이 작업은 동력을 가하는 공연자들에 의해 활성화되는 잠재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수많은 방울들이 자아내는 음향 효과는 조각에 생동감을 더하며, 사물의 부동성과 인간의 활력 사이의 경계를 탐구한다.

샤머니즘과 같은 반권위적인 영적 지향을 다루는 한지 콜라주 연작 〈황홀망恍惚網Mesmerizing Mesh〉(2021-)도 선보인다. 방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한 본 연작 중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은 종이의 물성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해당 시리즈의 초기 작업에서 작가는 샤머니즘 및 민간 신앙의 의례에 사용되는 모티프와 사물에 중점을 둔 한편, 최근에는 손으로 염색된 다색의 배경 위에 콜라주들을 진열하고 슬라브 전통 종이공예인 비치난키wycinanki에서 비롯된 동식물 모티프를 콜라주에 결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지를 접고 자르고 구멍 내는 행위를 통해 양혜규는 예술가와 샤먼들이 공유하는 방법론, 즉 세속적인 물질 너머로 내딛는 “신비주의적 도약”을 탐색한다.

《의사擬似-구어체Quasi-Colloquial》 전시전경 브라질 상파울루 피나코테카 미술관, 2023
《의사擬似-구어체Quasi-Colloquial》 전시전경 브라질 상파울루 피나코테카 미술관, 2023

 

한편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 작업 〈융합된 분산의 연대기 – 뒤라스와 윤A Chronology of Conflated Dispersion – Duras and Yun〉(2018)과 〈융합된 분산의 연대기 – 뒤라스와 오웰A Chronology of Conflated Dispersion – Duras and Orwell〉(2021)은 프랑스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1914-1996), 한국 작곡가 윤이상(1917-1995), 영국 소설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1903-1950)을 한자리로 불러 모은다. 세 역사적 인물의 연대기를 주관적 관점으로 교차 편집한 이 작업은 식민주의와 냉전시대를 비롯한 사회적, 정치적 격변기를 살아낸 그들의 생애에 들어서게 하는 동시에, 아시아 및 유럽과 복잡하게 뒤얽힌 작가의 배경을 반영한다.

《의사-구어체》전은 그동안 양혜규의 전시와 프로젝트에 여러 차례 등장해온 ‘의사擬似quasi’라는 개념을 도입해 원본성, 온전함, 그리고 주류와 같은 명제에 대한 절대적 믿음과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원본과 거의 흡사하지만 결코 원본은 아니라는 의미를 지닌 ‘의사’라는 수식어는 일견 그 뜻이 명백해 보이는 ‘구어체’ 라는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브라질이 고유의 토착성을 바탕으로 서구적 모더니즘을 소화한 방식은 일찍이 작가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며, 이러한 방법론을 상기시키는 원색의 블라인드 조각이 전시장을 점유한다.
양혜규에게 각 전시는 해당 지역의 장소성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회인 동시에, ‘바깥’이라는 작가의 물리적, 사회적 위치를 강력하게 인지하게 되는 계기이기도 하다. 양혜규가 어떤 언어도 유창한 구어체로 구사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집요한 연구를 기반으로 한 작가의 예술은 그만의 고유한 구어체로 거듭난다.
브라질에서 첫 개인전을 선보이게 된 양혜규와 상파울루와의 인연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제2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초기 주요작으로 일컬어지는 〈일련의 다치기 쉬운 배열 – 블라인드 룸Series of Vulnerable Arrangements – Blind Room〉(2006), 〈비디오 삼부작Video Trilogy〉(2004-2006), 〈창고 피스Storage Piece〉(2004) 등 다수의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생경한 구어체Alien Colloquial〉(detail) 2022
〈생경한 구어체Alien Colloquial〉(detail) 2022

 

양혜규는 이번 피나코테카 미술관에서의 개인전을 필두로 올해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오는 4월 19일 작가는 일본 도쿄 모리 미술관Mori Art Museum의 그룹전 《전지구적 수업: 교과목에 따른 현대미술World Classroom: Contemporary Art Through School Subjects》에 신작을 선보일 예정이며, 같은 달인 4월 22일 벨기에 겐트 현대미술관S.M.A.K.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현재 준비 중이다. 양혜규의 첫 벨기에 기관 전시인 이번 개인전은 평면 작업 〈봄의 원천은 움직임을 추적하는 데 있다The Source of Spring is in the Trace of Movement〉(2021)를 비롯해, 작가의 집 곳곳에 설치된 라디에이터의 형상을 차용한 ‘가전기기 조각’ 〈얀가街 5번지Jahnstraße 5〉(2017), 금속 방울을 짜인 직물처럼 엮어 바닥에 펼쳐 보이는 〈의례진에 걸친 소리 나는 수호물Sonic Guard over Ceremonial Formation〉(2022) 등 주요작을 폭넓게 선보인다. 이후 5월엔 캔버라에 위치한 호주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ustralia에서 《양혜규: 부터-까지로부터의 변화로부터Haegue Yang: Changing From From To From》라는 제목의 개인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2024년 가을에는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서베이 전시가 예정되어 있으며, 유럽 순회전으로 이어질 계획이다.

〈생경한 구어체Alien Colloquial〉 2022
〈생경한 구어체Alien Colloquial〉 2022

 

한편 양혜규는 최근 호안 미로 상Joan Miró Prize의 최종 후보 5인에 선정되었다. 호안 미로 재단이 지난 2007년 제정한 이 상은 호안 미로가 남긴 문화적 유산을 바탕으로 그의 탐구, 혁신, 헌신 및 자유의 정신을 이어나가는 독창적인 현대미술가에게 수여된다. 호안 미로 상의 역대 수상자로는 날리니 말라니Nalini Malani(2019), 로니 혼Roni Horn(2013), 올라퍼 엘리아슨Olafur Eliasson(2007) 등이 있으며, 올해의 최종 수상자는 오는 5월 말 발표될 예정이다.

양혜규는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현재 베를린과 서울을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다양한 작품과 왕성한 전시로 동시대 작가들 중 단연 돋보이는 행보를 보여온 그는 1994년 독일로 이주하여 프랑크푸르트 국립미술학교 슈테델슐레Städelschule에서 마이스터슐러 학위를 취득하였고, 현재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18년 볼프강 한 미술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10월 문화체육관광부가 수여하는 대한민국문화예술상(대통령 표창) 미술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으며, 2022년 싱가포르 비엔날레가 주최하는 제13회 베네세 상을 수상했다.

 〈소리 나는 접이식 건조대 – 마장 마술 #9 Sonic Clotheshorse – Dressage #9〉 2021
 〈소리 나는 접이식 건조대 – 마장 마술 #9 Sonic Clotheshorse – Dressage #9〉 2021

 

코펜하겐 국립미술관(2022), 영국 테이트 세인트아이브스(2020), 뉴욕 현대미술관(2019), 마이애미 비치 더 바스(2019), 쾰른 루트비히 미술관(2018), 파리 퐁피두 센터(2016), 베이징 울렌스 현대미술센터(2015), 리움미술관(2015), 뮌헨 하우스 데어 쿤스트(2012), 미국 아스펜 미술관(2011), 미네아폴리스 워커아트센터(2009) 등 전 세계 유수의 기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으며, 카셀 도큐멘타 13 (2012), 제53회 베니스 비엔날레(2009) 한국관 대표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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