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욱의 회화

신항섭(미술평론가)

  그림 그리는 일은 행복할까? 생뚱한 질문 같지만, 행복하지 않고서야 어찌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러고 보면 그림 그리는 일은 행복을 나누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행복한 기분으로 그린 그림이니, 보는 사람 또한 행복의 아우라를 느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보편적인 소재 또는 주제라면 행복의 아우라는 한층 커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림으로 누군가에게 행복을 전할 수 있는 일이야말로 축복받은 삶이 아니고 무엇이랴.

'권순욱의 회화' 신항섭 미술평론가
'권순욱의 회화' 신항섭 미술평론가

 

  권순욱의 작업을 보면서 인간의 조형적인 상상력이 얼마나 풍부한 것인지 새삼 실감한다. 지금 순간에도 수많은 화가가 캔버스와 마주하고 있을 터이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남과 다른 새로운 그림을 그릴 것인지 고민할 것이다. 그런데도 새로운 조형적인 세계를 찾아낸 화가는 극히 소수에 그친다. 그만큼 새로운 그림을 모색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성공적인 화가와 그렇지 못한 화가의 차이는 타고난 재능과 함께 풍부한 조형적인 상상력에 있는지 모른다.
  그는 20대 초반의 작가이다. 인생의 행로 그 시작 지점에서 멀지 않다. 그러니 그림에 대한 경험과 시간의 축적 또한 많지 않다. 그런데도 그의 작업은 적지 않은 걸 성취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독특한 자기만의 표현 방법과 기법을 구사한다. 따라서 작품 하나하나는 독자적인 언어 및 어법을 가지고 있다. 외부로부터의 간섭이 없는 나만의 시각, 나만의 생각으로 그림을 그려온 결과이다. 독자적인 언어 및 어법은 그림 세계의 시작이자 궁극이다. 모든 작가가 개별적인 언어 및 어법을 찾아내기 위해 고심하면서 작업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그는 독립적인 작가, 즉 개별적인 형식의 실마리를 잡은 셈이다.       

'권순욱의 회화' 신항섭 미술평론가
'권순욱의 회화' 신항섭 미술평론가

 

  그의 작업은 세 가지 형식으로 나뉜다. 추상적인 작업과 정물 그리고 건축물을 소재로 한 일련의 연작이다. 추상적인 작업은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시기에 해당한다. 이때의 작품 가운데 하나는, 나이프로 물결문양과 같은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화면 전체를 덮는 전면회화 방식이다. 아크릴물감과 혼합매체를 사용하는 형태의 작업이었는데, 질감이 강하네 느껴지는 굵은 횡렬의 선과 선 사이에 사각형 형태의 점으로 채워지는 스트라이프 구성이다. 
  또 다른 하나는 크고 작은 사각형 형태의 평면적인 이미지가 화면 전체를 채우는 전면회화이다. 회색 중심의 단색화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중간색의 자잘한 사각형 형태의 평면적인 이미지가 화면을 가득 채우는 작품이 있다. 이들 추상적인 작업은 사각형 형태의 평면적인 이미지를 불규칙적으로 화면 전체를 메워나가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특정의 이미지가 없는 화면구성에서는 반복적인 이미지의 집적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단조로운 이미지의 집적이 만들어내는 심미적인 효과도 주시하게 된다.  
   

'권순욱의 회화' 신항섭 미술평론가
'권순욱의 회화' 신항섭 미술평론가

 

  또한 정물화의 양식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작업은 아주 감각적이고 세련된 조형미를 보여준다. 20대 초반의 나이를 전혀 감지할 수 없는, 세련된 조형감각이 돋보인다. 이는 기술적인 완성도와는 크게 연관성이 없는 예민한 미적 감수성이 뒷받침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기술의 축적이나 완성도의 문제를 넘어서는 탐미적인 시각의 소산이다. 어쩌면 타고난 감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 자신의 나이를 초월하는 감각이기에 그렇다. 
  무엇보다도 선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머뭇거림이 없이 단숨에 형태의 윤곽선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선은 사실적인 형태를 의식하지 않은 채 개략적인 이미지만을 보여준다. 그러나 채색이 덧붙여지면서 형태가 드러난다.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형태 묘사가 없음에도 최종적인 완성에 이르면 소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정물화에서 취하는 일반적인 소재, 즉 과일과 병, 그릇, 탁자와 같은 일상적인 생활 기물이 함께 한다. 이들 소재가 한 몸이 되듯 아름다운 모양으로 모아진다.    

'권순욱의 회화' 신항섭 미술평론가
'권순욱의 회화' 신항섭 미술평론가

 

  채색은 중간색 중심인데 아주 옅고 얇게 보인다. 유채나 아크릴물감이 아닌 색연필과 크레파스를 이용한다. 캔버스를 갈색으로 칠한 뒤 그 위에 분필로 소재의 형태를 윤곽선으로 살리고, 크레파스로 채색을 입히는 순서로 진행된다. 아주 간결한 작업방식인데, 색채 조합이 아주 세련돼 보인다. 갈색으로 덮인 캔버스 바탕이 드러날 정도로 얇은 채색기법이라서 시각적인 편안함이 느껴진다.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온화하며 정겹게 느껴지는 색채감각이다. 
  그는 조형미에 관한 타고난 재능이 있는 듯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길지 않은 작업 경력에 그렇듯이 안정된 조형감각을 획득할 수는 없는 일이다. 기술적인 완성도와는 완연히 다른 조형감각이자 표현기법인데, 이로 인한 비정형의 미는 탐미적인 시선을 유혹할만하다. 정물화의 사실적인 형태를 변형하거나 왜곡함으로써 얻어지는 비정형의 미에는 고도의 미적 감각이 요구된다. 20대 초반의 그에게 이런 감각이 있다는 것은 기대치 못한 일이다.  

'권순욱의 회화' 신항섭 미술평론가
'권순욱의 회화' 신항섭 미술평론가

 

  한편 건축물을 밀집시켜 빈틈없이 채우는 독특한 구성 및 구도의 작업은 그 발상이 놀랍다. 일반적인 거리풍경을 떠올리게 하지만 도로가 없이 단지 집들 또는 아파트나 빌딩 같은 구조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풍경이다. 하나의 주제를 이처럼 확장성을 가진 구조물로 발전시키는 조형감각이 예사롭지 않다. 특정의 소재를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지루할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특정의 소재를 밀고 나가는 힘이 있다. 

'권순욱의 회화' 신항섭 미술평론가
'권순욱의 회화' 신항섭 미술평론가

 

  실제로 골목길이 거의 드러나지 않은 채 단지 집들 또는 빌딩이 밀착되고 있는 구도는 그 발상이 신선하다. 오로지 가옥 또는 건축물에 관한 관심의 집중이 만들어낸 효과이다. 이러한 구도 개념은 현대미학의 관점에서는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일반적인 시각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창의성의 결과이기에 그렇다. 밀집하고 밀착되는 가옥 또는 빌딩은 구조적으로는 매우 간결하다. 그런데도 반복적이고 집적하는 이미지에서 자연스러운 일상적인 건물풍경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된다. 


  작품에 따라서는 고층빌딩의 구조를 가져오기도 한다. 창문과 일체가 되는 일자 형태의 고층 건물은 아파트처럼 보이는데, 높은 키를 자랑하듯 다투듯 도열하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층층이 다른 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중간중간에 지붕이 보이는가 하면 창문의 형태가 일정치 않다. 이처럼 일상적인 시각과 전혀 다른 조형 개념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생각하지 못하는 자유로운 조형적인 상상력이야말로 그만의 개성일 수 있다. 이 역시 타고난 감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특히 작은 집들이 엉키어 있는 듯싶은 구조의 풍경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구체적인 형태를 드러내지 않으나 집들이 모여 있는 작은 동산 같은 이미지를 보여준다. 자유롭고 풍부한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집 모양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지붕과 창문으로 집의 형태를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 작은 삼각형이나 사각형의 평면적인 이미지로 빼곡히 채워진 하나의 덩어리처럼 보인다. 얼핏 가우디의 왜곡된 건축물을 연상하기도 할 만큼 형태의 심한 변형 및 왜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비뚤어지고 틀어진 삼각형 및 사각형의 기하학적인 이미지가 다양한 색깔의 평면적인 이미지를 결속시킨다. 

'권순욱의 회화' 신항섭 미술평론가
'권순욱의 회화' 신항섭 미술평론가

 

  이처럼 단순화되고 변형 및 왜곡된 형태미는 미적 쾌감을 유발한다. 정형화된 형태미에서 느낄 수 없는 시각적인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잘 정리되고 정돈된 구성이 가지고 있는 질서의 아름다움과는 상반되는 미적 체험이다. 예술가적인 미적 감수성과 풍부한 상상력, 즉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조형감각이 만들어낼 수 있는 형태 해석이다. 이는 실재하는 집의 이미지를 해체하여 조형적으로 재해석한 결과이다. 물론 이러한 형태의 작업은 단계를 밟는 게 아니라 예술적인 영감의 작용에 의해 단숨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는 그림에서 보여주는 조형적인 성과만을 본다면 나이를 짐작하기 어렵다. 그만큼 새로운 조형적인 감각이 돋보인다. 화가로서의 행로에서 이제 그 시작점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먼 길을 걸어온 듯이 느껴진다. 조형미에 대한 특별한 감각이 주어졌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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