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감각과 절묘한 선. 서희선 작가
김종근 미술평론가

“지금에 와서는 거의 어떤 것이든 다 미술이라고 통하고 있다, 그리하여 무엇이나 다 신성불가침하게 된 것이다 ” 미술사가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오늘날 미술의 최대의 적은 아름다운 미와 추함에 대한 식별 불능과 미술적 상대주의라고 지적한다.
렘브란트나 베르메르의 작품이 절대적으로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상대주의가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이다.

Mercy,__76x56cm,_Pencil,_oil_color_on_paper,_2018(1)

요즈음 예술이라는 호칭 속에서 우리는 실로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에 대해 구별을 한다는 것이 점점 불가능한 지점, 혹은 그 경계에 와 있다.
미적인 판단의 문제가 주관적인 탓도 있겠지만,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이 훨씬 다양해지고 표현의 영역이 확대되어 그 가치가 급격하게 변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작가들이 새로운 표현에 대한 욕구가 더욱 강해졌다.
그럴수록 우리는 예술의 가치를 정의하기 위해 예술의 본질적인 내용이나 원칙들로 되돌려 볼 필요는 없는 것일까.

그리고 예술은 우리에게 어떤 울림 아니면 떨림을 주는 것이면 어떨까?
서희선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이미지를 종이에 찍어내는 판화형식을 따르고 있다. 재론의 여지 없이 판화의 특성은 일정한 이미지를 균일하게 복수로 제작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처음부터 판화가 전달과 보급이라는 기본적인 형태와 목적성을 전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판화가 예술적으로 높게 표현된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이제 판화는 그림의 종류가 아니라 엄연히 그림 그 자체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판화는 하나만 존재하는 유일한 회화 작품과 동등한 가치를 누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Mercy,__76x56cm,_Pencil,_oil_color_on_paper,_2018

서희선의 작업은 처음부터 이러한 한계를 가지고 출발한다. 그래서 그는 보다 다양한 표현 방법이라든가 기법에서 그 문제를 넘어서고자 하는데 그 가치와 의미를 두고 있다.
그는 그러한 적절한 시도를 성곡미술관에서 명료하게 보여준바 있다.
판화작업으로는 절대 쉽지 않은 규모와 크기, 그리고 오브제와 콜라주의 방법 등으로 판화예술의 또 다른 영역을 열어 보였는가 하면 극소수의 번호부여로 판화의 가치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또한 효과 중심의 판화에서 표현 중심의 판화로 이행하는 데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서희선의 이런 실험성이 짙은 작업 태도는 판화의 개념과 현실이 지극히 좁고 편협된 점을 고려 할때 그의 작업은 우리 미술계로 볼 때 신선하고 도전적이었다.
그가 이전의 작업에서는 기법의 혼용을 통하여 시각적인 형식미를 조화롭게 드러냈다면, 최근 보여주고 있는 작업들은 판화가 가지는 매력적인 미의 요소들을 화면 안에서 충실하게 결합하고 있어 주목을 끈다.
이전에 보통 판화들이 너무 기법 중심 그리고 시각적 효과 중심으로 안일하게 진행되어 온 작업 분위기에 도전적인 손짓을 보냈다면, 이번 작업은 그 자연의 이미지들을 한 화면에 집약시키려는 순수한 조형요소들로 아름다운 이미지를 줄 수 있을 것인가에 전적으로 의도되었다.

Mercy,_56x60.6cm,_Pencil,_oil_color_on_paper,_2018

물론 < A Floating Mercy >나 < A Secret of Garden >이라 붙여진 그의 작품들 속에 내재된 지향하고 있는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이미 뛰어난 조합을 기초 형태로 구성되고 있다.
그 기본적인 조형들은 조개라든가 꽃, 나비 등의 자연적인 것과 생물들의 원형에서 그 이미지가 추출되고 변용 된다.
우리는 그가 끌어들이고 있는 회화적인 모티브 그 대상 자체가 비례나 형태에서도 상당 부분 완벽한 아름다운 형태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 초점을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들 모두가 자연에서 연유된 대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선택하는 하나하나의 대상마다 그가 추구하고 있는 감각이 그 대상 속에서 이미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 대상들은 비례와 대칭의 형식들을 띠고 있는 공통의 속성을 충분히 보이지 않는가.

그런 점에서 이번 서희선의 작업은 판화예술에 기법보다는 회화적 조형성을 충실하게 지지하고 있는 정형적인 감각에 훨씬 더 비중을 표명하고 있다.
또한 그의 감정은 풍부하고 다양하다  < A Secret of Mercy > 의 작품에서 보이는 자연스러운 선의 감각. 그것은 마치 알레친스키가 그의 작품에 펼쳐 놓은 듯한 자연스러움과 유연성, 그 선의 절묘한 아름다운 만남을 떠올린다.
유리창에 그어진 낙서의 선처럼 덧칠해진 그 선들이 이루어내는 미적 태도 또한 평면 위의 드로잉 작품처럼 선의 감정과 맛을 강렬하게 회복시킨다. 특히 이번 작업이 얻어내고 있는 것은 조형적인 측면과 더불어 선의 쓰임이 강렬하면서 단아하게 쓰이는 것이 크게 평가받고 있다.

그 특징들은 사각형의 4귀에 같은 류의 이미지와 형상들이 다시 반복 등장하면서 그 위를 날카로운 선들이 덧붙여 지나가는 것에서 확인된다.
이제 그는 도입된 대상의 이미지 위에 추가로 선을 통하여 자유자재로 감정의 개입을 시도하면서 더욱 완벽한 조형적인 완성의 지평으로 정착하고 있다.
화면에서의 선의 역할이 강조된 다수의 작품들에서 우리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서희선만의 새로운 시각 이미지를 해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서희선이 만드는 그 이미지들은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새로운 형태들을 통하여 반복된 이미지들의 형상을 구축하기 때문이다.

빛나는 감각과 절묘한 선. 서희선 작가

그 이미지의 뿌리나 원형은 자연 일수도, 기억일수도, 상상력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러한 모든 이미지를 드러내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의 내면에 각인된 감각을 통해서 구체화 된다.
그러나 보다 창조적인 작업을 위해서는 단순한 이미지들을 분류하는 실제적 방법으로서의 그림이 아니고 그 감정을 지배하고 이미지를 지배하는 작가의 의식이 필요하다.
나는 그가 감각과 의식 그리고 세계를 드러내 보이면서 성숙해가는 작가는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곰브리치가 “미술의 역사라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미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가 존재 할 뿐이다.” 라고 하듯이 변함없이 미술은 색과 조형에 대한 감각을 천부적으로 지녔던 사람들, 뛰어난 감각을 구사하여 그 감각을 완성하려 했던 사람들. 미술의 역사야말로 이미 그런 사람들, 즉 천재들과 걸작들로 꾸려지고 있다.
그리하여 거기에는 합리적인 설명이 들어설 틈이 없고 그래서 그는 미술의 미래에 있어 어떤 것을 예측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고도 했다.

빛나는 감각과 절묘한 선. 서희선 작가

그러나 우리는 미술에 있어서 감각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 속에 갇혀 있다. 더욱이 예술적인 감각이라는 것은 그 시각적인 의미 이상의 내용까지를 포함하는 어떤 힘들을 아우르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서희선도 그 피할 수 없는 이미지의 형상화 전장에 나가 서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그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듯한 색채의 중첩과 균형감각 그리고 결정적인 선의 탁월한 하모니가 그의 무기가 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었다.

다만 그의 작업이 더 장르를 넘어서서, 재료의 한계, 기법도 우리식의 협소한 판화개념을 헤쳐나가길 기대한다. 그의 작품이 빛나는 감각과 절묘한 선의 마력으로 우리를 설레는 감정의 파문으로 이끌면서, 마구 흐트러뜨리고 싶은 욕망을 화면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고전적인 감각, 표현 그리고 그것을 종합하는 형식의 새로움만이 예술의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세자르의 눌린 조각처럼, 니키드 쌩팔의 조립식 퍼즐처럼, 브람 보가트의 30센티가 넘는 판화 입체작품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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