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신항섭(미술평론가)

  오늘의 사회현실에서 볼 때 수묵산수화는 그 존재감이 예전만 못하다. 수묵화 인구는 점차 줄어들고 전시회도 좀처럼 보기 어렵게 됐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평생을 수묵화에 전념해온 작가들은 자괴감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림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는 것만은 아닐지라도 수묵화를 경원하는 듯싶은 분위기에 힘이 빠지는 까닭이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보면, 창작이라는 행위는 누가 시킨 일이 아니라 스스로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 어떠한 현실적인 상황에서도 세상일에 너무 개의치 않은 것이 신념을 지키는 데 유익할지 모른다.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정산 홍기윤의 수묵산수화는 실경산수이다. 산천을 주유하면서 경승지를 찾아 그 빼어난 경관의 아름다움을 수묵으로 묘사한다. 비록 거대하고 웅장한 산세는 흔치 않을지라도 물과 산이 있는 곳 어디에나 아기자기한 풍경이 자리한다. 수묵산수화의 소재로서 딱 맞추었지 싶으리만치 산천경개가 수려하다. 그러니 수묵산수를 즐기는 문인 화가를 많이 배출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궁중 소속이었던 조선의 화원 화가들이 저마다 산수화에 심취한 것도 따지고 보면 산수가 아름다우니 저절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으리라.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그는 선인 화가들이 그랬듯이 명산대천을 주유하면서 실경산수를 취한지 수십 년이 됐다. 적어도 눈으로 보지 않은 풍경은 취하지 않는다는 자세로 실경산수로만 일관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수려한 풍경에 취하여 이름난 경승지 중심의 산수화에 심취하게 됐다. 자연을 즐기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연을 찾아 나서게 된 것인지 입장이 애매할 정도로 몰입한다. 그러한 마음과 자세가 산수화 속에 녹아들어 있다.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작품마다 크고 작은 정자가 빠짐없이 등장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수려한 산수를 배경으로 자리한 정자가 유난히 많다. 정자를 그림의 소재로 삼는 것은 실경산수를 추구하는 그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암괴석이 눈을 사로잡는 장중한 기세의 산은 웅혼한 기상을 뽐내지만, 대작이어야 한다는 어려움이 있다. 반면에 정자가 있는 풍경은 규모를 따지지 않고 작품 한 점을 얻는데 수월하다. 근거리에서 마주하므로 모양을 찬찬히 살피며 그 정취를 살리면 한 작품이 된다.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정자가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소나무가 함께 한다. 줄기는 튼튼하되 가지가 무성하지 않은데다 모양이 아름다우니 정자와 잘 어우러진다. 소나무가 제법 많을지라도 정자를 감출 정도가 아니어서 어느 시점에서 보더라도 성가시지 않다. 오히려 정자는 소나무에 살짝 가려지므로 빤히 드러나는 모양새보다 운치가 더하다. 그가 정자가 있는 산수를 선호하는 건 정자의 빼어난 건축미와 더불어 주변 풍경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그는 실경산수이면서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옮기지는 않는다. 부분적으로 생략하거나 재구성하는 등 그림으로서 갖추어야 할 조형미를 고려한다. 그렇다고 해서 없는 사실을 덧붙여 실제보다 근사하게 꾸미지 않는다. 실상을 바탕으로 하되 문인의 시각에 맞춰 부분적으로 재구성할 따름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보편적인 구도와는 다른 시각에서 접근함으로써 조금이라도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려고 한다. 따라서 이리저리 옮겨가는 시점의 이동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구도를 찾아내고자 노력한다.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실경산수라고 해서 반드시 사실적인 형태 묘사에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적인 묘사와 더불어 옛 문인 화가들의 작품이 그러하듯이 문학적인 정취, 즉 인격미가 바탕이 된 그림으로서의 격조를 놓치지 않고자 한다. 단지 사실 묘사에만 치중해서는 자칫 그 풍경이 안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이나 서정미를 간과하기 쉽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전체적인 분위기 즉, 서정적인 정취를 표현하고자 고심한다. 정자를 에워싸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배치하면서도 이러한 심의를 반영하는 데 최선을 다한다.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정자를 소재로 하는 작품과 달리 기암괴석으로 일관하는 설악산 풍경은 장엄한 산세와 그 기운이 커다란 화면을 가득 채운다. 수직의 절벽과 뾰족하게 솟은 바위 봉우리 그리고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한데 어우러지는 장중한 바위산은 숨이 막힐 듯싶은 기세로 다가온다. 이처럼 장대한 설악의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사실성이야말로 수묵산수화로서의 설득력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화면을 가득 채우는 시각적인 압박감은 근경이 지어내는 힘이다. 머리 위로 아득히 솟은 바위 봉우리를 올려다보는 앙각구도는 그 자체만으로도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전지 3장을 연결하는, 내설악을 소재로 한 대작에서는 화면경영에 대한 감각과 조형능력이 잘 드러난다. 거침없이 하늘을 치받듯이 날카롭게 솟는 바위 연봉이 설악의 위용을 한눈에 보여주는 이 작품은 다채로운 얼굴을 가진, 웅혼한 기운을 뿜어내는 내설악의 면모가 선명히 드러난다. 기존의 준법에 매이지 않는 실사 중심의 바위 표현은 실경산수가 가지고 있는 힘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숨 가쁘게 펼쳐지는 바위산의 호흡을 누그러뜨리듯 산 아래로 흐르는 계류로 인해 수묵산수의 운치가 제대로 갖춰진다.

  그의 최근 작품은 전체적으로 먹 빛깔이 부드러워지고 맑다. 10여 년 전 전시 작품과 비교해 한층 온화해졌다는 인상인데, 이는 아마도 먹의 빛깔과 연관성이 있지 않은가 싶다. 형태 묘사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으니, 먹의 농도가 다소 약해지더라도 필치의 힘을 잃지 않는 까닭이다. 담채도 그러하니, 전체적인 인상이 순화되고 형태에 대한 묘사 감각 또한 익어 있다는 느낌이다. 특히 최근 작업에서 이러한 특징이 뚜렷하다. 형태 묘사에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남으로써 필치가 한층 자연스러워지고 여유가 생겼기 때문인지 모른다.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특히 자작한 쪽빛 물감을 사용하는 일련의 작품들에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근경에 정자가 있는 풍경을 두고, 배경을 쪽빛으로 표현한 작품의 경우 신비스러운 정취가 짙게 느껴진다. 옅은 남색의 쪽빛 물감이 지어내는 은은한 색조에 신비스러운 공간이 형성됨으로써 원경의 공간과는 또 다른 의미의 유현미가 깃들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옅은 남색의 쪽빛은 수묵에 선명히 대비되면서 이전의 수묵산수에서 볼 수 없었던 아련한 정서가 생겨나고 있다. 선염 기법을 쓰지 않고도 아련하고 신비스러운 정서를 드러낸다는 게 신기할 정도이다.

  수묵과 담채의 조화를 모색해온 수묵산수화에서는 일부 작가들에 의해 청묵이 사용되었고, 수묵이 표현할 수 없는 정서를 만들어냈다. 옅은 청색을 보여주는 청묵은 먹빛에 청색이 가미된 듯싶은 미묘한 색조를 지닌다. 반면에 쪽빛 물감은 남색이어서 색채로서의 존재감이 명료하여, 수묵과 마찬가지로 단독적인 색채이미지 및 정서를 발현한다. 따라서 전경에 대응하는 후경, 즉 배경을 쪽빛으로 물들임으로써 두 색채가 지어내는 조화 및 정서는 확실히 새로운 수묵의 경지라고 할만하다. 수묵과 쪽빛은 위화감이 없다. 되레 서로의 존재감을 돋보이도록 이끈다.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쪽빛 물감으로 풀어내는 신비스러운 기운의 산수화

 더구나 설경에서 그 효과는 배가된다. 근경을 수묵으로 표현하고 중경과 원경을 각각 농도를 달리함으로써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눈이 맑아지는 듯싶은 선명한 시각적인 효과를 나타낸다. 기존의 채색 물감으로 표현했던 청색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청량감이 느껴진다. 쪽빛이 지어내는 발색은 시각적인 자극이 없을뿐더러 안으로 수렴하는 성향을 지닌다. 그러기에 다소 짙게 표현되더라도 투명한 가운데 심도가 깊어질 따름이다.

  쪽빛 물감이 수묵산수에 쓰이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다. 전통적인 염색에 쓰이는 염료의 영역에서 끌어내 수묵산수화와의 접목을 시도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부단히 연구하는 자세로 쪽빛 물감을 스스로 개발해, 전통 회화의 재료로 응용함으로써 수묵산수화의 신경지를 개척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러한 노력이 결실을 이루어 한층 평안하면서도 노련한 필치에 의해 전개되는 그의 산수 경치는 그 깊이가 더해 간다. 

  그는 그 어떤 세파에도 아랑곳없이 창작에 몰두하는 진정한 작가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수묵산수화의 이상은 어쩌면 신선들이 기꺼이 노닐만한 그런 아름다움과 신비스러움을 갖추는 데 있는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쪽빛 물감으로 표현되는 그의 수묵산수는 거기에 한층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는 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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