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센트 빌럼 반 고흐

브뤼셀로 온 고흐는 화가가 되기 위해 브뤼셀의 미술 아카데미에 들어가는게 상식적이고 일반적 코스이긴 했지만 고흐는 독학으로 실력을 쌓는 것을 더 좋아했다. 고흐가 브뤼셀에 왔을 때 동생 테오는 화상의 길을 가면서 회사에서 승진 중이었다. 한편으로 테오는 파리 미술계에 불던 인상주의나 종합주의 같은 새로운 미술 사조들을 편지를 통해 형 고흐에게 알려주기도 했지만 원래 미술이란 게 글로 쓴다고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흐의 인상주의나 새로운 미술사조에 대한 이해는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오히려 고흐의 독특한 화풍이 생겨날 수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의 외사촌이자 화가였던 안톤 모베에게 몇 년간 그림을 지도받았다. 하지만 고흐의 괴상한 성격 탓에 자주 마찰을 빚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모베는 어려운 고흐를 돕기도 했고 나름대로는 그림을 가르쳐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흐는 크리스티네 클라시나 마리아 호르니크이라는 여인과 동거를 하게 되면서 상황이 심각해졌다. 고흐는 그녀를 시엔이라고 불렀는데 그녀는 매춘부인 데다가 딸이 하나 있었고 고흐와 만났을 때는 임신 중이었다. 그녀는 딱히 용모가 뛰어나다거나 한 건 아니었으나 고흐에겐 사회에서 버림받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데다가 고흐 자신이 비극적인 풍모의 여성들에게 끌렸던 점이 그녀를 사랑하게된 요인이 되었다. 목사인 아버지는 물론이고 그동안 그를 정신적, 물질적으로 지원해주던 동생 테오마저도 시엔과의 동거를 반대하면서 그녀와 헤어질 것을 종용했다. 모베는 고흐가 매춘부와 동거한다는 사실에 그와 절교를 선언했다. 설상가상으로 고흐의 구필 화랑 시절 상사이자 좋은 친분관계를 가졌던 테르스테흐가 고흐가 시엔과 동거한다는 사실을 알고 과도한 분노를 표출해서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고흐의 아버지가 시엔과의 동거를 알게 된 것도 테르스테흐가 편지를 보내서였다는 의혹이 있을 정도다. 상황이 이리되자 고흐의 아버지는 '우리 아들이 마침내 완전히 미쳐버렸어'라고 하면서 고흐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시도했다. 이 소식이 테오의 편지를 통해서 고흐 귀에 들어가자 고흐는 아버지에게 격한 분노를 품었고 이때껏 아버지를 존경해오던 고흐는 이를 계기로 아버지는 물론 조직화된 기독교회 자체에 심한 분노와 거부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러나 매춘부 생활로 돌아가려는 시엔과 시엔의 가족들 때문에 시엔과의 관계는 결국 파탄나고 큰 양심의 가책을 안고서 고흐는 그녀와 결별하게 된다.

1883년 5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
1883년 5월 테오에게 보낸 편지

 1883년 9월, 헤이그에서 시엔과 결별한 고흐는 드렌테 남부의 호헤벤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고흐는 알베르튀스 하르트소이케르라는 사람의 집에서 하숙하며 화가의 길을 모색했다. 그곳에서 보름 후에 화가들이 있다는 곳을 전해들은 고흐는 다시 호헤벤에서 니암스테르담까지 가게 된다. 니암스테르담에서 고흐는 운하의 도개교를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별이 빛나는 밤, 사이프러스 나무
별이 빛나는 밤, 사이프러스 나무

 한편으로 생레미 시절에 고흐의 후기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여러 개 나왔다. 저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이라든지 사이프러스 나무를 소재로 한 작품 등이 그것들이다. 별이 빛나는 밤의 경우는 미국의 시인 휘트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시기 그림들에서 일부 연구자들은 고흐의 죽음에 대한 움직임을 읽을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이런저런 우여곡절들이 있던 가운데 고흐는 이때까지의 작업들을 총결산하는 의미의 대작을 구상하게 된다. 대작의 실마리는 우연한 기회에 찾아왔는데 1885년 3월의 어느 날에 고흐는 호르트라는 농부의 집을 지나치다가 그 집에 들어갔다. 그때 호르트의 가족들은 석유램프 불빛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었다. 고흐는 이 광경을 그림으로 그리기로 결심한다.

 비오는날의 다리 1887년
 비오는날의 다리 1887년

 일본의 우키요에에 영향을 받아 그 동안 렘브란트와 밀레의 어두운 화풍이 주류였던 인상주의를 밝은 화풍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곧 대도시의 생활에 싫증을 느꼈고 그는 프랑스의 시골 아를로 이주해 그곳에서 계속 그림을 그린다. 사실 그것보다는 그가 네덜란드나 파리의 광선이 너무 어둡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의 화풍이 변화함에 따라 밝은 광선의 남프랑스를 동경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동생이 결혼하면서 사회적으로는 거의 백수취급받는 시아주버니가 신혼집에 있는건 민폐이기 때문에 떠났다는 얘기도 있다.

빈센트 빌럼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빈센트 빌럼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83년 일하는 사람
1883년 일하는 사람

이 시점에서 고흐는 유화를 그리고는 있었지만 작품의 기법상으론 물감으로 소묘를 하는 것이라서 유화라고는 해도 결국 소묘와 다를 것이 없었다. 아직 고흐는 색채의 활용이라는 측면에는 미숙했던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는 가운데 고흐는 혼자서 그림의 기법을 익혀나갔다. 외딴 시골의 황야와 습지에서 고흐는 순수한 자연을 동경하면서 고독하게 살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그림 실력에 다른 화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

고흐와 갈등이 결정적으로 폭발한 그림은 바로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였다. 고흐의 그림에서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뚜렷한 눈동자를 보여주지만, 고갱이 그린 고흐는 흐리멍텅한 모습으로 보여졌다. 고흐는 고갱이 자신이 제정신이 아닌 거라고 조롱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고 결국 고흐는 술집에서 고갱과 술을 마시다가 술잔을 집어던지는 걸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 결국 고갱이 온 지 두 달이 약간 지난 1888년 12월 23일,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고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렸다. 고갱의 회고에 의하면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며 나타나서 자신을 찌를 듯해 보였지만 노려보기만 하고서는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 뒤에 귀를 잘라버린 걸로 보이며 잘라낸 걸 가끔 만나던 사이인 라셸이라는 창녀에게 건네주었고 그걸 보고 기겁한 라셸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한다.

한편 고흐의 친구였던 화가 에밀 베르나르는 테오의 미망인 요한나에게 테오가 세상을 떠난지 한달 쯤 지난 시점에 고흐의 회고전을 한 번 더 열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지난 회고전으로 고흐의 이름이 알려졌고, 고갱이 당시 명성을 얻으면서 고갱과 같이 작업했던 고흐의 이름도 덩달아 언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신이 없었던 요한나는 이 회고전을 거절했다. 베르나르는 1911년 자신이 고흐와 주고받았던 편지를 책으로 출간하며 고흐를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생각해보면 고흐가 그림을 그린 기간이 10년이다. 초창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로부터 계산하면 고흐가 대작을 그렸던 기간은 약 5년이다. 사람들에게 빨리 인정 받으면 좋겠지만 이 정도 무명 기간을 거친 후에 인정 받는 화가도 적지 않다. 고흐가 1930년대면 전세계에서 사랑 받는 것을 고려했을 때 고흐가 장수했더라면 말년에 명성을 누렸을 수도 있다. 물론 고흐의 정열적인 성격이 목숨을 빨리 앗아간 만큼 걸작을 그릴 수 있는 원동력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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