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박일순 신옥주 이경희 작가 특별전
[아트코리아방송 = 김종숙 기자] 2022년 1월 14일 ~ 3월 6일까지 김종영미술관(서울시 종로구 평창 32길 30)에서 네 분의 중직 女流 조각가 초대전이 전시 중이다.
2022년 첫 전시로 네 분의 중진 여성 조각가를 초대하여, <女流>전을 마련하였다. 동시에 한국 조각미술의 여류의 2세대라 할 수 있는 조각가들며, 조각이라는 분야는 흔히들 노작(勞作: ‘힘’을 들여 조각함) 의 결과라고 하여, 남성적이면서도 폐쇄적인 장르였다. 이번 전시에 함께한 여류 조각가들의 작품을 보면 성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에너지 넘치며 깊고 진지하다. 또한 그들이 걸어 온 발자취는 여성으로서 엄마로서 또 교육자로서 지치지 않고 본격적으로 현대조각의 장르를 이끌었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고, 알파‘맘’이라는 새로운 여성상이 등장하며, 여성의 사회적 역할도 확대되었다. 따뜻함이 그립고 희망이 절실한 계절,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에
네 작가의 작업을 통해 ‘새’ 기운을 충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김정희 작가는 사람을 소재로 한 설치작품을 선보인다.
전시장 한가운데 타원형의 스테인리스 미러 판이 깔려 있고
그 중앙에는 마치 용솟음치는 듯한 무엇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모든 형상을 스테인리스 철사를 용접해서 만들었다.
용솟음치는 그 무엇의 좌우에는 흑백으로 크기가 다른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그리고 전시장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사람 역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하늘에는 십여 명의 사람이 고개를 숙인 자세로 용소음치는 그 무엇을 바라보며 매달려 있다. 모든 사람은 기(氣)가 올라가는 듯 철사들이 머리 위로 향하고 있다.
인물 배치로 봐서 소외와 절망, 그리고 어떤 엄숙함 속에 성찰이 느껴진다. 철사라는 소재의 가벼움과는 판이하다. 어떤 신령한 공간에 들어서서 ‘나’를 돌이켜 보게 된다.
-김정희 작가노트 -
박일순 작가는 ‘Green’이라는 제목의 연작을 전시한다.
입체와 평면을 넘나 들은 작품들이다. 입체건 평면이건 모두 녹색을 사용했다.
입체 나무 작품은 거의 다 향나무를 사용했다. 그는 과거 제재소에서 향나무를 켤 때 날리는 붉은 톱밥을 보며 나무의 고통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언젠가 나무꾼이 숲에서 나무를 베면 나무들도 자신들이 감지한 위험을 소통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의 경험을 들으며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무가 살아있음을 상징하는 듯한 녹색을 통해 그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숭고함을 표현하고자 한 듯하다. 이러한 상징적인 요소(달걀, 원형)로 전시 공간이 가득하다. 평면 작품은 매우 섬세한 선으로 생명을 상징하는 여러 형상을 그렸다.
정확히는 그린 것이 아니라 칼로 한 가닥씩 새겼다. 그리고 커다란 실패에 가지런히 감은 실을 보며, 그 순간 작가가 무상무념에 빠진 모습을 그려보게 된다.
- 박일순 작가노트-
신옥주 작가는 오랜 시간 철판을 절단하고 펼쳐 조각의 오래된 과제인 작품과 공간의 문제를 탐구해왔다. 조각 재료 중에서 쇠를 다루는 일은 가장 고된 작업 중 하나이다. 그래서 신 작가 외에는 여성 조각가들 가운데 두꺼운 철판을 다루는 작가가 없는 것으로 안다. 불과 함께하는 철 일은 힘든 만큼 그 어떤 재료보다도 완성 후 작가의 성취도가 높다. 이번 전시에도 그는 철을 다룬 작품들을 전시한다. 전같이 공간에 펼친 작품과 함께, 이번에는 철사들을 철판 조각과 함께 뭉쳐 둥근 형태를 만든 작품들도 있다. 더불어 주물 작품과 함께 세월이 그린(?) 그림도 새롭게 선보였다. 오랜 시간 재료의 물성과 공간에 천착한 작업을 ‘투쟁적’으로 전개해 왔던 것을 고려하면 커다란 변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달리 말하면 만들기에서 발견의 미학으로 전환이라 할 수 있겠다. 연륜에서 비롯된 너그러워짐을 느낄 수 있다.
- 신옥주 작가노트 -
이경희 작가의 작업은 좀 독특하다.
조각가가 작품 제작을 하며 물리적 공간(space)과 연계된 성찰을 하는 것에 반해
그의 작업은 특정한 환경을 바탕으로 장소(place)가 사람과 관계를 통해 형성된 ‘장소성(placeness)’에서 비롯된 조각적 연구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특정 장소는 시간 속에 축적된 기억이 함께할 때만 의미가 있다. 압축성장을 한 우리 사회에서 우리는 기억이 온전한 장소를 찾아보기 어렵다.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장소성의 상실(placelessness)’이라고 한다. 이러한 장소에 놓이는 조각 작품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조각가로서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어쩌면 그의 시도는 자코메티가 작업하면 할수록 ‘초상화’를 완성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시도하는 것과 유사하다 할 수 있겠다.
- 이경희 작가노트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