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눈_여행의 흔적' 김용환 작품에서
이홍원 미술평론(여주시 미술관 ‘아트뮤지엄 려’ 학예실장, 철학박사)

누구나 현실의 일상을 내려놓고 발을 내딛는 순간, 눈에 보이는 모든 일상이 그림이나 영화의 한 장면이 된다. ‘나’라는 주체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서 ‘나’를 객체로 인식하면서 일상은 낯선 풍경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일상이라는 무대에서 내려오는 그 순간 나는 주인공에서 관객이 된다. 늘 그렇게 있었던 건물과 길들, 상점과 거리의 풍경들은 무대의 배경이 된다. 그러나, 때로는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사회에서 하나의 도구로 인식되던 자기 자신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현실에서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베니스 근교의 여명
베니스 근교의 여명

물리적 의미의 여행이 있다면, 시공간을 넘나드는 여행도 있다. 미디어와 SNS가 보편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간접경험을 통해 지구 반대편의 일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몸소 경험하는 것에는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진정한 여행은 자기성찰의 기회를 얻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나’라는 자아를 한 걸음 떨어져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다시 인식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은 외부의 세계로부터 자신을 인식하기보다 나로부터 외부세계를 인식하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은 외부세계에 영향을 주고, 외부 주변환경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는 다시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의 순환을 경험하게 된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 Ponty, 1908~1961)는 ‘나’ 자신이 지각하는 주체임을 전제했을 때, 정신과 몸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고 보았다. 본인의 정신이 지각했을 때,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육체이고, 그 육체는 구체적 상황들과 상호작용하면서 존재함을 깨닫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베니스의 오후

퐁티는 우리가 지각되는 대상임과 동시에 주체자임을 강조하면서 ‘동화(同和)’를 이야기한다. 동화는 주체성과 대상성이 상호 작용하면서 얽혀 있음을 설명한다. 그의 ‘살 이론’ 중에 '살(Chair_프랑스어)'은 피부 표면과 그 밑에 숨겨진 피부 조직의 속성에 대해 설명한다. 퐁티는 “피부 아래의 조직은 겉 피부로 느껴지는 '지각'보다 둔하고 애매하여 파악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분명하게 느껴지는 그 '무엇'이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지각과 육체가 유기적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설명한다. 즉, 체험하고 느끼고 자각할 때, 행동이 따른다는 것이다.

퐁티의 살의 존재론을 통해 볼 때, '몸'의 체험은 단순히 지각된 경험 이상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미디어나 스마트폰의 이미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본 풍경과 실제로 여행 하면서 그 시공간과 관계를 통해서 느낀 경험에는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지각(知覺)’ 이라는 깊이의 차이다. 작가 김용환은 일상과 낯선 여행의 체험을 통해 '나의 존재'와 외부세계, 그리고 타인의 존재가 서로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퐁티는 “체험하지 않은 장소에서 의미를 느끼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작가 김용환은 실제 그 삶에 참여하고 여행을 통해 자신과 대상을 객관화하면서 미처 느끼지 못했던 자아와 관계성에 대해 더 깊은 통찰을 경험한다. 이렇게 한계 지어진 존재론적 의미의 지각을 감지하는 것이 '살'이며, '살'은 지각함과 동시에 그 잠재해 있는 존재 의미에 대한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준다.

부하라의 오후 (2)

작가 김용환이 그린 일상과 주변의 풍경에서 자신의 모습을 느끼고, 이국적 풍경을 보면서 ‘나’라는 존재의 삶을 되돌아본다. 이러한 행동의 기저에는 지친 일상으로부터의 일탈과 동시에 현재 삶에 대한 깨달음, 그리고 다른 세상에 대한 동경이 함께 내재해 있다. 각자의 일상은 틀에 갇히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누리게도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낯선 곳에서는 자유로움과 불편함이 함께 공존한다. 그렇게 접해보지 못한 세상은 작가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때도 있고, 동서를 막론하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음에 동질감을 느끼게도 할 것이다.

또한, 작가는 여행을 통해 자신도 알지 못했던 본인의 모습을 발견한다. 실존주의 철학가 장폴 샤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 는 ‘존재성’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자각함과 자아의 본래 모습을 발견함과 동시에 자아를 부인하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서 ‘자기기만’을 이야기한다. 어떠한 사건과 상황을 통해 자신의 본래 모습을 확인하면서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결국,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특히 인간은 교육과 이성으로 본성을 제어하고 사회화되면서 다듬어졌던 자신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볼 때,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그것을 인정해야 진정 자아를 이해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그것을 가두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마르칸트의 인상

작가는 그러한 자아의 본성, 존재성, 그리고 삶과 일탈에 대한 고찰을 작품으로 풀어낸다. 그가 보는 풍경들을 보면 대단히 아름답고 특별함을 담고 있지 않다. 있는 그대로의 일상과 평범한 이국적 풍경을 담고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Heidegger, Martin 1889~1976)가 말하는 ‘예술의 본질’은 이러한 일상적 대상을 작가의 눈과 통찰력, 그리고 창조적 표현을 통해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김용환의 그림 또한 아주 일상적인 풍경을 그린 것 같지만, 설명하기 힘든 다른 특별함이 있다. 그것을 새롭게 만드는 그 무엇 중 하나는 바로 ‘색(色)’이다. 그가 표현한 거리와 인물의 느낌은 어디서 많이 본듯하지만, 왠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렇다고 대상의 이질적인 색감을 구사하는 것도 아니고 형태를 크게 왜곡한 것도 아니다. 그가 선택한 색채는 일반적인 색과 묘한 차이가 있다. 김용환의 색은 따듯함에 쓸쓸함이 배어 있다. 그리고, 대상지에 따라 정감있게 다가오기도 하고 이국적 느낌을 더욱 강조하면서 자기만의 화면을 구축해간다.

순천 정류장의 오후

그의 풍경이 새롭게 보이게 하는 또 하나의 장치는 상징적 기호들이다. 거리의 인물, 골목의 자동차, 또는 낡은 대문의 표정이 김용환의 그림에 함축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아주 일반적이고 평범해 보이는 대상을 기호화하여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막다른 골목이 주는 답답한 느낌, 그리고 좁은 골목을 지나 연결되는 산의 풍경, 휘감아 돌아가는 굵직한 길의 모양은 우리의 인생의 질곡을 말해주는 듯하다. 또한, 건물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단순히 빛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어두움이 아니다. 그림자 안의 미묘한 색의 변화는 우리 삶의 다양한 이야기와 감정을 투영해 주고 있으며, 단순해 보일 수 있는 공간을 깊이감 있게 만들어 준다. 이번 그의 전시는 우리 주변의 풍경을 다시 바라보면서 이국적 풍경에 젖어 들게 한다. 그의 눈과 발길이 머물렀던 그곳을 보면서 단지 내가 아닌, 또 다른 ‘나의 존재와 삶’에 대해서 자각해본다.

히바의 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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