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주의자의 미학 Ⅱ

   페트라르카는 아비뇽(Avignon)에서 가까운 반트 산에 오르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갖고 정상에 올라 발 아래 흐르는 구름을 기록했다. 브루크하르트는 여기에서 풍경의 아름다움을 지각하고 감동한 최초의 풍경미를 발견한 근대인으로서 페트라르카를 소개하고 있다.〈J·Burckhardt, 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an, S. 274 vgl〉페트라르카에 있어서 자연은 자신이 살아 있는 거울이며, 새로운 표현수단으로서 인간에게 봉사하는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페트라르카는 스콜라철학(scholasticism)을 비판하면서 인간이 자유로운 자립성을 존중했고 미의 사상에 있어서는 조형예술가가 거부 또는 경시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플로티노스를 중시했다. 또한 키케로(Cicero)에게도 심취하고 있었다. 더욱이 중세의 그리스도교의 교의,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미의 사상에 주목하여 그 생각을 계승했다. 따라서 페트라르카의 미적 사상에서 중세는 반드시 암흑만이 아니었다. 중세 미학은 르네상스의 사보나롤라나 미켈란젤로로부터 강하게 계승되고 있다. 그러나 페트라르카는 신학적 형이상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여, 인간의 존엄은 각각의 인간에게 자유로운 의지행위, 혹은 명예에 대한 욕구 형태가 갖춰져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이러한 엄중하게 볼 수 있는 새로운 인간상은 자연의 발견과 그것에 의한 자기행위의 자유, 자아존재로서의 자기의 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페트라르카는 새로운 시대의 예언자이며 근대 인문주의자의 원상(原像)이라고 말할 수 있다.

   페트라르카의 인간 존엄의 생각은 1세기 이후 플라톤 아카데미의 피치노, 거기에 피코 델라 미란돌라에서 한층 더 철학적으로 이론화되었다. 피치노는 플라톤, 플로티노스와 디오니시오스를 종합해 미는 신과 선의 반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피코의 『인간에 관한 연설』(1486년)은 ‘르네상스의 가장 고귀한 유산이다’라고 브루크하르트는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인간의 본성은 존엄으로 여겨지고 그 근저로 의지행위의 자유가 강조된다. 그리고 이 자유는 항상 불안과 마주치게 된다. 피코에 의하면 신은 우주창조 때에 또 다른 모든 존재에 각각 고유의 거처나 모습이나 역할을 주었지만, 인간에게는 자유의지에 의해 자기의 본질을 정하는 것만을 허용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의 의지에 의해 짐승에게도 천사에게도 신과 일치하는 것조차 가능한 것이었다.

   피코의 이러한 견해는 인간과 세계는 이데아나 신의 존재에 의해 일의적으로 규정되지 않고 어떤 생성과정 또는 형태로 간주하는 것으로 통한다. 이 생각은 현상의 생성에 강한 관심을 보이는 오늘의 클라게스의 이론과도 가깝다.〈Vgl. L.Klages, Grundlegung der Wissenschaft von Ausdruck, 7Auf, 1950 perpeet, das Kunstschne, S. 132f.〉 레오나르도의 해부학 습작이나 대홍수의 비전에는 이러한 유동적인 현실과 다양한 국면에 대한 강한 관심이 나타나 있다. 피코는 또한 인간은 모든 사물의 척도를 스스로 갖고 있다고 생각했고, 인간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생각과 연결된다. 

알배르티의 건축가에 관한 견해는 피코의 『인간에 관한 연설』의 주석에서 읽을 수 있다. 왜냐하면, 알베르티는 새로운 건축가에게 중세의 신과 같은 창조자이기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상 인문주의자는 미를 예술미에 한정하지 않고, 이교적 고대·그리스도교 중세의 미의 이론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피치노의 『플라톤의 향연-사랑에 대해서』에서 용이하게 볼 수 있지만 검증하기 어려운 사고의 극한에까지 이르렀다. 인문주의 운동은 어떤 예술미학도 만들어 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술미 개념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상이나 자유로운 의지행위에 근거하는 새로운 인간존엄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상의 고찰로부터 예술미의 기원을 종교적 구속성의 소멸에서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도 명확해진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는 일반적으로 결코 그리스도교 신앙에 적대해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조형예술가에 있어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우르비노공의 궁전에 성스러운 교회와 무사들에게 바치는 신전이 공존하고 있었던 것은 그 상징성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야말로 미적인 것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미에 입각해서 교화되어 눈의 즐거움에 양식화되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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