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철 개인전 ‘제주적 추상’전에 부쳐

 원초적 기억에서 찾는 글로컬리즘의 길 
-고민철 개인전 ‘제주적 추상’전에 부쳐
                                
미술평론가 김유정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로서의 추상 
  어떤 그림이라도 화면에 눈을 점점 가까이 댈수록 형체는 모호하게 나타난다. 보이는 것은 오로지 겹치거나 반복되는 선들과 색채의 음영(陰影), 내가 한 눈에 보았던 사물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만드는 평면의 어지러운 흔적들뿐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그렇게 확실하게 보이던 사실적인 형상이 하나의 속임수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당황하게 된다. 어떤 3차원의 입체적인 대상에 대해 믿었던 확신이 무너져 그것이 2차원의 평면이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고민철 개인전 ‘제주적 추상’전에 부쳐
고민철 개인전 ‘제주적 추상’전에 부쳐

 

  20세기는 평면의 언어들에 주목했다. 과거 르네상스와 더불어 원근법의 등장한 이후 건축술이 발달하면서 현실에 존재하는 건물에 더욱 주목하게 되고, 급기야 현실 세계의 실재를 화면으로 가져오기 위해 그 현실과 똑같이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무려 500년 동안 그 신화는 깨지지 않고 세상을 지배했는데 이것이 환영주의(illusionism)라고 하는 조형적 방식이었다.   

  갑골문에서 그림(畵)은 한 손으로 붓을 잡고 무늬의 선을 그리는 모습이다. 어떤 행위에는 아름답게 꾸미거나 자신이 즐거운 놀이로서 행하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예술은 시대마다 개념이 변하면서 그것의 인식과 형식, 제도마저 달라진다. 그렇지만 그림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창작행위 중 하나이며, 사물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사물의 대상이나 그것을 직관한 심상(心象)을 ‘나타내는 행위로써 무엇인가 떠올리는 것, 의미를 부여하거나 구상(構想)하는 고차원적인 정신 활동인 것이다.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미술사에서 회화는 구상화(具象畵)와 추상화(抽象畵)가 있다. 구상화의 전통에서는 그리스어 테크네라는 단어는 수공업적 기술(예술)과 장인(匠人, 기술자)을 강조했지만, 마르틴 하이데거는 이를 달리 해석하고 있다. 오히러 테크네는 앎의 한 방식이라는 것이다. 앎이란 ’보았음‘을, 넓은 의미에서 ’봄‘을 뜻하며, 이러한 ’봄‘은 현존하는 것으로써 인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그러니까 창작은 현존속으로 나타내게 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의미에서 테크네는 오히러 화가가 지각하고 있는 인상(印象)과 기억의 관념(觀念)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게 하는 추상에 더 가깝다.    

고민철 개인전 ‘제주적 추상’전에 부쳐
고민철 개인전 ‘제주적 추상’전에 부쳐

 

 

  오늘날은 그 장르를 넘어선 새로운 조형 기술들인 설치, 영상 미디어가 등장했다. 그렇지만 가장 오래된 형식과 기법에 기반을 둔 화가들은 여전히 많다. 전자매체의 시대가 왔음에도 회화가 자신의 감성을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추상화의 시간을 잠시 돌아보면, 인류 문명의 시작과 함께 발견된 동굴벽화의 그림들이 들소와 짐승 무리, 손바닥 그림이었다는 사실에서 보는 것처럼 어떤 사물의 재현이 그림의 시작이 되었고, 이후 상징 기호의 시대(신석기 시대)를 거쳐 다시 3차원의 세계를 구현하다가 20세기 초에  다시 2차원의 추상주의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현실 세계의 모든 형태들은 입체이지만, 거기에는 무수한 평면의 패턴들이 얽혀 있다. 그러니까 구상 속에 추상이 있고, 추상 속에 구상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의 형태는 보는 시점, 보는 방향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우리의 세계는 빛의 작용이 매우 중요하다. 빛이란 전자기파의 주파수인데 그 빛으로 인해 사물들의 형태와 색채를 분별하게 된다. 만일 빛 파동이 더 빨리 진동하면 그 빛은 더 파랗게 되고, 조금 더 느리게 진동하면 그 빛은 더 붉게 나타난다. 색은 빛의 파동에 의해서 달라지면서 우리 세계의 사물들이 여러 가지 색으로 보이는 것이다.         
 

고민철 개인전 ‘제주적 추상’전에 부쳐
고민철 개인전 ‘제주적 추상’전에 부쳐

 

  그렇다면 세계 최초의 추상 화가는 누구일까? 우리는 통념적으로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진실은 스웨덴 출신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1862~1944)라는  여성화가가 1906년 추상화 연작을 그린 것이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바실리 칸딘스키가 자연적 요소에 음악성을 살려서 1910년(1913년)에 그린 수채화 <무제(untitled)>가 세계 최초의 추상화로 알려졌었다. 오로지 색채를 가지고 면(面)의 경계를 만들고, 다양한 크기의 선의 리듬으로만 이루어진 <무제>는 원근법적인 재현과 사실적인 장식의 전통을 일거에 배제한 작품이었다. 러시아의 화가 말레비치(Malevich, Kazimir Severinovich, 1878~1935)에 의해서 시작된 기하학적 추상주의(geometric abstractionism) 또한 1913년에야 등장했다.  

 여성화가 클린트는 칸딘스키보다 2살이나 위였고, 두 사람 모두 1944년 같은 해에 사망했는데 칸딘스키와 말레비치에 앞서 그녀는 이미 1906~1907년 두 해에 걸쳐 기하하적 추상주의 작품을 제작했으나 세간에 주목받지 못한 채 서양미술사에 뒤늦게 알려졌던 것이다. 과거 여성이 처한 사회적 위상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사람들은 선구자, 또는 역사적 시원(始原)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최초의 시작이라는 상징적인 의미가 크기도 하거니와, 역사의 시간에서 보면, 맨 처음 자각한 자, 실행한 자의 위치가 새롭게 조명되기 때문이다. 

고민철 개인전 ‘제주적 추상’전에 부쳐
고민철 개인전 ‘제주적 추상’전에 부쳐

 

  20세기 미술에서 추상의 등장은 형식주의(formalism) 미술의 시대를 열었다. 미국의 미술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 1909~1994)가 형식주의 미술의 대표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림의 2차원적인 평면성을 옹호했다. 입체적 사실주의에서 평면성으로의 전환은 폴 세잔(Paul Cezanne, 1839~1906)이나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1840~1926)에게서 쉽게 발견되고 조르죠 브라크(Georges Braque, 1982~1963)와 파블로 피카소의 큐비즘을 거쳐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와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 ~ 1970),  바넷 뉴먼(Barnett Newman, 1905~1970), 클리포드 스틸(Clifford Still, 1904~1980) 등의 색면회화(Color Field)에 이르러 평면성이 극에 달한다. 재현 중심의 서사화(敍事畵)의 자리에 순수한 미술의 형식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영상 시대에 거꾸로 가는 행보 
  지금은 로컬리티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서울과 지방이라는 2분법적 구도의 경향론(京鄕論)은 중심부와 주변부로 차별하면서 문화의 지배구조를 이루었지만, 오늘날은 그 구조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다원주의(多元主義)의 영향도 한 몫을 하고 있고, 지역으로 향하는 이주 인구의 확대, 시장경제의 세계화 전략이 지역의 특성들을 균일하게 일반화하면서 차이가 사라지고 있다. 오히려 새로운 문화적 대안으로서 로컬리티가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어디에나 있다. 지역 간 색깔이 점점 줄어들면서 제주 로컬리즘이라는 정체성은 과거 농업사회와 해양·목축사회에 기반을 두었던 풍토적인 삶에서 드러났었지만, 점점 그 정체성마저 해당 삶의 방편들이 산업사회로 대체됨으로써 사실상 점점 축소되거나 소멸되고 있다. 

  지금의 현실은 하이브리드 시대이다. 이 혼성(混成)의 시대는 세계적인 추세이기도 한데 마치 구산업(석유)이 신산업(전기)으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병존하는 과도기처럼, 혹은 이주하는 종족과 원주민이 새로 섞이면서 하나의 퓨전 문화가 되는 변화의 운동단계가 되고 있다. 갈수록 인류가 지구인으로 모아지고 있다는 생각은 모두가 느낄 수 있는 체감온도일 것이다.  

고민철 개인전 ‘제주적 추상’전에 부쳐
고민철 개인전 ‘제주적 추상’전에 부쳐

 

  현재 추상화를 선호하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 그러므로 제주 추상화에 대한 모색은 형식주의 미술에 대한 깊은 미학적 고민과 새로운 창작방법론의 과제를 안겨준다. 추상화는 사회적인 내용을 다루기보다는, 오로지 조형언어라고 할 수 있는 색채, 선, 형태의 아름다움에 기반을 둔 미술의 양식사적인 전통에 닿아있다. 제주에서는 1960년대에 서울에서 수학한 서양화가 김택화, 강태석에 의해서 추상화가 처음 시도되었다가 1970년대 후반 ‘관점’그룹의 등장으로 일시적으로 회자되다가 지금은 다시 추상주의가 쇠락한 상태에 있다. 당시 추상주의는 서울을 중심으로 일었던 국제주의적 경향성을 띤 미학적 실험정신에서 출발했으나, 이후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한국적 미학의 반성적 태도가 일면서 다시 그 기운은 사그라들고 말았다.  

  이로써 고민철의 등장은 매우 중요한 추상화의 새로운 계기가 되고 있는데 그가 구상화에서 추상화로의 방향 전환은 제주 추상화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신선한 행보가 되고 있다. 고민철은 백광익, 양묵 등 제주의 추상작가들의 대열에 새롭고 서면서, 처음부터 강한 로컬리티적 특성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대세가 된 영상 미디어 작가들의 등장은 시대의 추이로써 전자매체의 대중화에 따른 것이어서 앞으로 예상될 미래의 방향을 위한 조건 반사작용과 같은 것이다. 상대적으로 이제는 전통 장르가 돼버린 추상화의 존재가 매우 불확실한 위치에 서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가듯이 보이는 고민철의 행보는 어느 정도 소수자라는 희소가치의 장점을 활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영상의 시대에서 추상화라는 남다른 선택을 한 것은 ‘사실상 많다는 것의 대세’에서 오히려 ‘소수이기에 특별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글로컬리즘을 구현하는 제주적 추상     
그렇다면 고민철의 추상화의 미학은 무엇에 바탕을 두고 있고 그가 구상에서 추상으로 방향을 바꾼 이유가 무엇일까. 서양미술은 이미 중세부터 스토리에 기반을 둔 문학주의의 영향, 즉 신화나 성서에 영향으로 그것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충실한 설명을 요하는 삽화들이나 그리스 로마신화, 그리고 기독교 역사화, 전쟁화가 성행했다. 이런 문학주의는 미술을 서사구조의 보조자, 또는 삽화적 성격, 교회 화가로 전락하게 만들었고, 신고전주의에 이르러서 역사화는 정점에 달한다. 사물은 반드시 정점에 이르게 되면 다시 쇠퇴의 길로 되돌아간다. 미술에 대한 순수한 욕구는 새롭게 창작하는 계기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빛을 재해석한 인상주의 출현이었다. 우리에게 시간은 변화를 일으키는 새로운 형식들을 가져다 준다. 

  1980년대 삶의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계급주의 미학이 남한을 흔들다가 잠잠했던 한국미술의 무풍지대와 같던 시기에, 지역주의 열풍이 서서히 일고 있었다. 2000년 초 제주는 올레코스가 개발되었고, 이주민의 급거 입도하는 등 미술 형식에서도 로컬리티를 모색하는 기운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4·3미술로 모아졌고, 한편에서는 미술의 크기가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두 편향 모두 뾰족한 미학적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단체 미술행사 중심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이럴 때 개인의 태도는 중요해진다. 고민철은 돌연 오랫동안 추구하던 인상주의 화풍을 버리고,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주저 없이 풍경화를 버리고 마음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자유로운 미술 형식을 찾으려고 한 것이다. 아파 본 자만이 실존의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다. 그에게는 분명 어떤 심적인 자각이 크게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지난 1월. 고민철은 ‘환희-바람 속으로’라는 개인전을 통해서 제주적 추상의 시작을 본격적으로 알렸다. 액션이 큰 붓질과 임파스토 드리핑(dripping) 기법을 중심에 둔 화려한 색채의 대작들을 선보이면서 제주적 색채와 형태를 지향하는 로컬리즘의 특질을 보인 것이다. 임파스토(impasto)란 ‘두껍게 칠하는 물감 기법’을 말하는 것으로 이탈리아어 ‘반죽하다’라는 임파스타레(impastare)에서 유래했다. 물감을 나이프나 붓으로 화면에 두껍게 바르거나 자유롭게 흘릴 경우 굳으면 마치 조각처럼 도드라지는 입체감이 나타나기 때문에 작업시 화가의 감정 상태가 잘 드러난다. 칠하지 않고 붙게 함으로써 마티에르가 살아나기 때문에 즉흥적이고 격정적인 동작에 적합하다.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1956), 루시안 프로이트(Lucian Michael Freud, 1922~ 2011) 등이 이를 선호했던 화가들이었다. 

  고민철은 이 임파스토 드리핑을 용암이 흘러내리는 과정으로써 보여준다. 돌의 고장 제주에 걸맞는 용암의 물질적인 성질을 염두에 둔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어릴 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물색(物色, color)이 강렬함이 배어난다. 그의 기법은 단순한 형식 찾기의 문제만으로 볼 수는 없다.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형식에서 자신의 원초적 기억들과 삶의 환경에서 몸에 밴 시간적인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도록 노력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민철 개인전 ‘제주적 추상’전에 부쳐
고민철 개인전 ‘제주적 추상’전에 부쳐

 

  그의 말에서 불현듯이 화가의 할머니와 가족에게서 받은 ㅇ관습적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 아비투스(Habitus)가 그의 작품에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원초적인 사회심리 표현은 매우 우발적이며,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 아비투스적 표현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마음을 차분하게 한 후 순식간에 자동기술적인 액션으로 주요작업을 수행하는 것이다.    

  고민철의 화면에는 대개 반복적 행위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같은 것 같지만 다른 대칭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난다. 작품의 중심 구조는 무의식적 행위들의 속도감 있는 표현으로 채워지고, 세부 디테일들은 우연적인 효과들을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절묘한 조합을 만들어 낸다. 자동기술이란 우연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액션으로 매우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을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그는 사물을 그린다, 표현한다는 행위를 넘어선 질료의 특성들, 흩뿌려지고 중첩되는 색으로 만들어진 화면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핵심적인 것은 바로 “발견하는 형태, 발견되는 색채”라는 의미를 가진 제주 로컬리티를 지향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의 작품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제주 로컬리즘으로 맞춰져 있다. 제주 추상이라는 담론을 상정했을 때 단연코 풍토적인 양상(樣相)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인데, 상징적으로 돌담, 태풍, 바다, 해저라는 주제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이의 상징들은 모두 사물과 공간의 관계 속에서만 비로소 제대로 보이게 된다. 바람은 바다와 하늘과 땅의 춤이면서 태풍이 돼 혼돈으로 치달음으로써 마침내 세상을 정화시킨다. 돌담은 그 구멍 사이로 바람을 보내버리는 리듬을 조절하며 안정된 호흡으로 역할을 고수한다. 바다는 변화무쌍하여 하늘과 대지의 기운을 받아 인간에 이롭다가도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해저는 또 다른 신들의 세계로서, 해양 타계(他界)의 이어도와 같은 유토피아가 된다. 따지고 보면 세계는 모두가 연결돼 있어서 나의 작품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싼 문화적 환경이 나의 의식과 감정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듯 고민철에게 줄곧 연관되어 흐르는 하나의 미학적인 원리가 있다면, 인생이라는 생생한 삶의 실체는 화가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원초적 기억으로 형태와 색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한다. 그것은 마침내 제주섬 만이 가능한 제주적 추상이라는 이름으로 구현될 것이며, 글로컬리즘의 새로운 근원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아트코리아방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