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는 2023년 11월 01일(수) ~ 11월 07일(화)까지 해리 작가의 ‘봄날은 간다’가 전시를 마쳤다.

해리 작가는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5, 60년대의 우리나라는 한국전쟁(1950년 6월 25일 ~ 1953년 7월 27일)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모든 것이 부족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어 노점이며 행상, 품팔이로 하루하루를 연명했고, 일본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신 우리의 부모님들은 그 힘든 세월을 오직 가족의 안위를 위해 온몸으로 살아내셔야 했다.”고 말했다.

해리 작가는 “아버지께서는 우리나라를 바로 세우셔야 한다며 다니시던 관직을 그만 두시고 국회의원에 여러 번 출마하셨고 단 한 번의 성공도 이루지 못하셨다. 한번 낙선하실 때마다 우리의 세 끼니는 두 끼니로 두 끼니는 한 끼로 줄어들었다. 집도 점점 작아지고 변두리로 밀려나 버스도 닿지 않는 서울 끝자락 산 중턱에 무허가 집을 짓고 살아야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어머니는 고만고만한 육 남매와 어려운 살림을 고스란히 당신 몫으로 짊어지신 채 하루하루를 꾸려 가셔야 했다. 어머니는 삶이 너무 힘드실 때면 깊은 한숨과 함께 낮으막 하게 ‘봄날은 간다’를 부르셨다. 그 끊어질 듯 이어지던 노랫소리는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드라마의 주제곡처럼 남아 있다. 나의 작업들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기억하며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해리 작가는 “어느새 나도 생전의 두 분 만큼이나 나이가 들어 있다. 문득 되돌아보니 나의 가슴 한 켠엔 늘 그분들이 함께하셨다는 것을 느낀다. 끝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 침잠 되어 있는 나의 내면의 어린아이를 꺼내어 작품화할 수 있게 끊임없이 조언과 격려를 해주고 자칫 슬픔으로만 남았을 나의 조각에 색을 넣어주고 표정을 만들어준 나의 베프, 아내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한다.”고 아내 사랑을 표현했다.

해리 김은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를 졸업하고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다 2000년도에 뉴질랜드로 이민을 떠나 지금까지 뉴질랜드에 살고 있다.

한 일 수 ‘경영학 박사/칼럼니스트’

과거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어

모든 것이 디지털화 되고 첨단 문명의 이기들이 범람하고 있는 현대 생활에서 우리는 과거를 잊고 현대에 매몰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가 없는 현대가 있을 수도 없고 우리는 과거를 잊고 살 수도 없을뿐더러 뿌리 없는 나무가 미래를 기약할 수도 없는 일임은 당연하다 하겠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해리 김 작가의 목각 작품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일깨워주고 있다.

작가의 어린 시절, 청소년 시절을 겪으면서 내면에 침잠되어 있던 추억들을 섬세한 감성으로 표출해낸 목각 예술작품들을 감상해보면서 1960년-1980년대의 우리들의 자화상을 떠올려본다. 특히 중년이 되어 한국을 떠나 다른 문화권에 이주해 살고 있는 이민자들에겐 아련한 고향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나태해지기 쉬운 이민 생활에서 새로운 활력소를 발견하고 있다.

그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작품을 창작해온 작가의 노고에 깊은 찬사를 보내며 이들 작품을 통해 많은 감상자들이 영감(靈感)을 얻고 삶을 충전하는 기회로 삼기 바란다.

한 일 수 (경영학 박사/칼럼니스트)

꿈 Dream

단칸방에 온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이불 끝자락에 자는 아이는 이불을 빼앗긴 채 밤새 웅크리고 자야 했고, 어머니는 오늘도 귀가가 늦으시는 아버지를 기다리시며 밤늦게까지 일을 하신다. 누이는 새로 산 신발을 꼭 껴안고 잠이 들었다. 나는 다락방 구석에 나의 작은 아지트를 만들어 놓고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종이로 오리고 붙여 비행기와 비행장도 만들고 집들도 만들며 나의 작은 세상을 만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내가 만든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마음껏 날아다녔다. 꿈속에서는 무엇이든지 될 수 있었고 나만의 디즈니랜드였다. 하루 종일 분주했던 아이들도 이제 행복한 꿈나라를 여행 중이다.

꿈

 

변소
블록이 모자라 윗부분은 플라스틱 슬레이트로 대충대충 마무리한 화장실. 문도 제대로 닫히지 않아 볼일을 볼 때는 안에서 문고리 끈을 잡고 있어야 했고 여름철이면 지독한 냄새에 코를 쥐고, 겨울철에는 숭숭 뚫린 벽이며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매서운 찬바람에 엉덩이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더구나 집과 떨어진 마당 한구석에 있어 어린 형제들은 밤에 혼자 가기를 무척 무서워했다. 그래서 어린 형제들은 돌아가며 두 명이 함께 가서 한 명은 문 앞에서 기다려주기로 서로 약속을 했다. 물론 각자의 차례가 되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안 가려고 싸움이 나고 그러면 또 어머니께 야단을 맞고, 한밤중에 단체로 집 밖으로 쫓겨 나가기도 했다. 그런 날은 서로 네 탓 타령을 하며 아버지께서 귀가하실 때까지 문 앞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여름에는 모기와 겨울에는 추위와 싸워야 했다.

변소
변소

 

얼음가게
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한여름, 아버지가 사 오신 수박과 얼음 한 덩어리를 큰 양은 대야에 얼음은 송곳으로 깨어 넣고 수박은 숟가락으로 퍼 넣은 다음 설탕(그 당시 설탕은 귀하고 비싸서 인공 감미료인 뉴슈가를 주로 썼다.)을 적당히 넣고 휘휘 저어 온 가족이 평상에 둘러앉자 먹으면 무더위가 언제 있었냐는 듯이 시원하고 꿀맛 같아 비어가는 그릇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이렇게 맛나게 먹고 남은 수박 껍질은 그냥 버리지 않고 칼로 겉껍질을 벗겨내고 하얀 속살은 채로 썰어 어머니는 맛있는 수박 나물을 만드셨다. 독특한 수박 향이 나는 수박 나물은 그날 저녁상의 별미였고 지금도 그 수박 향 가득한 어머니의 수박 나물이 문득문득 그립다.

얼음가게
얼음가게

 

메리를 기억하며
복날이 가까워지면 ‘개나 고양이 삽니다’ 하고 소리치며 다니는 개장사들이 나타나고, 온 동네에서도 때도 없이 밤낮으로 시끄럽게 짖어대던 개들이 개장사가 나타난 것을 알아차렸는지 약속이나 한 듯이 조용해진다. 우리 집 메리는 언제나 대문 입구에 묶인 채 집을 지키기도 하고 우리가 학교 갔다 오면 꼬리가 빠질 듯이 흔들어대며 반기던 개이다. 여러 번 새끼를 낳아 쏠쏠하게 살림에도 보태고 우리가 야단맞고 시무룩해 있을 땐 곁에서 갖은 애교를 떨며 동무가 되어주던 그런 식구와 같은 개였다. 오늘 메리는 우리의 곁을 떠납니다. 평시에 꽁보리밥에 시장에서 구해온 생선 찌꺼기를 넣어 푹 끓인 개밥도 아무 말 없이 잘 먹던 메리가 오늘은 도통 입에 대려고도 안한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논산집 아줌마네 가셔서 갈비뼈 하나를 구해다 먹여보려 하지만 끝내 눈길도 안 준다. 우리는 너나 없이 울면서 팔지 말라고 애원해 보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걸 압니다. 어머니는 우리의 그런 모습이 안쓰러우신지 아끼시던 씨암탉 한 마리를 잡아 저녁 식탁에 내놓으셨다.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모처럼의 닭백숙을 먹고는 있지만 이 백숙을 먹게 된 이유를 모두 다 알고 있다. 메리는 이제 집에 없다.

메리를 기억하며
메리를 기억하며

 

대폿집
오늘도 아버지 심부름으로 주전자를 들고 막걸리를 사러 간 논산댁 아줌마네 대폿집은 아저씨들의 흥겨운 노랫소리와 장단을 맞추는 젓가락 소리로 한참 흥이 나 있다.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나는 막걸리 심부름을 아주 좋아했다. 논산집 아줌마의 따뜻한 관심도 좋고 또 늘 무언가 맛있는 것을 챙겨 주시니 아줌마가 솔직히 엄마보다 좋았다. 가끔씩은 얼큰하게 취하신 아버지를 모시러 갈 때도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 까슬까슬한 수염 난 얼굴을 우리의 뺨에 비비셨고 그런 아버지에게서는 달콤한 홍시 냄새가 풍겼다. 그 달콤한 홍시 냄새는 아버지를 기억하는 냄새다. 아버지는 늘 우리들에게 너희는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하셨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훌륭한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무사히 살아냈다.

대폿집
대폿집

 

자전거 수리점
옛날 자동차가 많지 않던 시절 자전거는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배달과 운송 또한 리어카나 자전거 또는 지게를 이용했었다. 웬만한 거리는 머리에 이고지고 걸어 다녔고 다섯째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영등포에 있는 자전거 수리점에서 보조 일을 시작했다. 어떻게든 고등학교까지는 마쳤으면 좋으련만 자기는 돈을 벌고 싶다며 학교를 그만두고 말았다. 부모님은 처음에는 말리셨지만 하나라도 돈을 벌어 집안 살림에 보태야 했기에 나중에는 더 이상 말리지 않으셨다. ‘다섯째는 머리가 명석해 그때 공부를 계속했으면 크게 성공을 했을 텐데’라고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자전거 수리점
자전거 수리점

 

이발소의 추억
까까머리, 이부 가리, 삼부 가리 등 좀 생소한 일본 말이 마구 섞인 용어가 옛날 이발소의 머리 길이를 나타내는 말이었다. 중학생은 까까머리나 이부가리를 했고 고등학생이 되면 스포츠가리라는 위쪽은 좀 길고 뒤쪽은 짧게 깎는 머리 모양이었다. 멋을 낸다고 조금 길게 기르다 혹여 교문 앞에서 지도 선생님에게 걸리면 가운데를 이발기로 쭉 밀어 고속도로를 내셨다. 그렇게 깎이면 정말 곤란한 게 이발소에 가도 마땅히 모양을 낼 방법이 없어 이부나 빡빡머리 스타일 밖에 할 수 없었다. 한동안은 교모를 푹 뒤집어쓰고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동네이발소는 어르신에서부터 갓난장이까지 온 동네 남자들의 집합소였다. 이발사 아저씨는 어른들의 얼굴에 흰 비누 거품을 바르고 면도칼을 가죽 벨트에 쓱쓱 문지른 다음 솜씨 좋게 면도를 하셨다. 무언가 전문가의 포스가 물씬 풍기는 그 모습이 어린 시절 저의 눈에는 정말 멋져 보였다. 아주머니는 손님들이 머리를 깎고 나면 물뿌리개에 더운물과 찬물을 섞어 잰 손놀림으로 머리를 감아 주셨고 머리를 감으려 고개를 숙이면 눈앞에 보이던 듬성듬성 이가 빠진 세면대의 작고 푸른 타일이 지금도 눈앞에 아련하다.

이발소
이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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