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의 분화보다는 신개념으로 진취적인 활동

제2의 도약을 도모하는 이노베이션 '장르의 분화보다는 신개념으로 진취적인 활동'朴明仁 '미술평론가·한국미학연구소 대표'

〈창립배경〉
대한민국 서양미술의 태동(胎動)은 일본으로 유학했던 1세대 미술인들의 선지적 프론티어 정신에서 유추할 수 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의 강점기였고, 사회가 피폐한 상태에서 밥벌이도 못하던 환쟁이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찾아 보기 힘들었다. 중세시대에도 머리로 창조하는 시문학은 미학으로 인정해도 손으로 하는 미술은 기능공 취급을 하며 미학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만큼 천시했다. 이후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미술이 미학을 주도하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봉건사상은 1930년대에 와서도 그림 그리는 화가들을 천시하는 경향이 만연하였고, 무명소졸에 불과했던 시절이라 감히 미술을 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러나 불과 몇 명일지라도 선지적인 미술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날 대한민국의 서양미술이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제40회 이형회 전
제40회 이형회 전

 

이들은 일본강점기에 일본 유학을 하면서 일전(日展)에 출품을 거부당하자 이에 대응하여 선전(조선미술전람회)을 창립했고, 나라 잃은 설음을 표현하겠다는 취지로 백우회가 결성되었지만 백우회는 흰 소를 상징함으로 조선의 백의민족을 과시한다고 해서 탄압받기도 했다. 그리고 1970년대는 생활경제가 향상되면서 잠시 삶의 리얼리티가 대두되었지만 세계 어디를 가도 대한민국의 풍경화만큼 서정성이 빛나는 작품은 없었다.

이러한 초창기 미술의 흐름이 안주하기도 전에 6·25사변이 발발하여 가난과 굶주림으로 허덕이며 곤혹을 치르는가 하면 서양미술이 자리잡기도 전에 추상미술이 유입(流入)되면서 구상미술이 또 한 번의 어려운 여건을 맞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상미술과 추상미술이 양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1970년대에 경제가 회복되어 급속도로 많은 미술단체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기에 추상미술이 강세를 보이면서 가장 문제로 제기된 것이 구상미술의 정체성이었다. 물론 편승해서 반추상이라는 장르가 생성하면서 특수를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너도 나도 유행하듯이 추상미술에 강렬한 의지를 보이고 있던 때라서 장두건 화백은 대한민국 미술의 미래지향성을 확립하기 위해 미술단체를 결성할 것을 결심하고 회원을 구성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장두건 화백은 ‘과거가 없이 현재가 있을 수 없고, 현재를 무가치하게 만들면 미래가 어두운 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러한 역사적 사명의식을 간과하고 있는 사람들이 색깔도, 목적도, 사명의식도 없이 너도나도 미술단체를 만들어 혼란만 야기하고 있다.’라고 말하며 서양미술을 개척한 선지자들을 잊고 있는 현실을 크게 우려했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과거의 구상미술을 간과해서도 안 되고 새롭게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추상미술을 간과해서도 안 된다는 의미였다. 장두건 화백은 고심 끝에 현대미술에 대한 의지가 굳은 미술인과   제자들을 결집하여 1984년 4월 아랍문화회관에서 첫 창립전을 열었다. 창립회원으로는 강광식(姜光植), 고화흠(高和欽), 김미혜(金美惠), 김상진(金相眞), 김수익(金守益), 김정연(金貞堧),노희정(盧熙政). 박복규(朴福奎), 유영희(柳英熙), 윤석원(尹錫元), 이규호(李圭晧), 이성자(李聖子), 이정자(李靜子), 이정혜(李晶惠), 이창규(李昌奎), 장두건(張斗建), 장지원(張志瑗), 전창운(全昌雲), 정영복(鄭泳福), 조국원(趙國元), 조영훈(曺永勳), 차경복(車慶福). 최동수(崔東秀), 최정룡(崔正龍), 허계(許桂), 홍순무(洪淳茂), 황유찬(黃有燦)이었다. 그리고 첫 창립전을 열면서 초대회장 장두건 화백과 회원들은 대한민국 미술발전에 공헌할 것을 다짐했다.

제40회 이형회 전
제40회 이형회 전

 

장두건 화백은 19세(1937년)에 일본으로 유학하여 태평양미술학교에서 구본웅, 이인성, 손응성, 남관, 김연펄, 김준식 등과 동문수학(1937∼1941년)하였으나 부유한 가정의 부친이 그림 그리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태평양미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명치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졸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미술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고 당시 일본인들에게 핍박받았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나머지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다시 붓을 잡기 시작하였다. 이미 일본에서 미래를 점철할 수 있는 많은 체험을 기반으로 서양미술의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에 당당한 미술인으로서의 희망의 주축이 되어야겠다고 각오하게 된 것이다. 유학에서 돌아 온 장두건 화백은 8·15 광복, 6·25사변, 4·19, 5·16과 같은 격동의 틈바구니에서 스스로 자중하며 창작에만 열심이었다. 미술에 대한 좌절만은 용납되지 않았다. 성신여대, 동아대학교 등에서 제자를 양성하면서, ‘그림이란 절대로 손끝으로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기술로 그린다고도 생각하지 말고 자기정신이 올바를 때 좋은 작품이 나온다’라는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의지가 뚜렷했던 장두건 화백의 교훈을 지켜 내기 위해 역사적 격동기를 묵묵히 헤쳐 온 이형회는 서양미술의 급변 속에서 굳건히 창립정신을 계승하여 왔지만 시대사조를 거스르지는 못했다. 그러한 환경은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급변하는 미술사조는 이형회의 어느 한 장르에 묶어 놓을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첫회 이형회상도 추상화가 받기에 이르렀고, 38회 회원전을 이어 오고 있는 현 시점에서는 구상이나 추상이라는 장르의 분화보다는 진취적인 회화를 추구함으로써 보다 광의적인 이형회를 유지해 가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이것이 제2의 도약이라고 할 수 있다.

〈이형회의 빛나는 발자취〉
1984년 4월 17일 서울 아랍문화회관에서 27명의 창립회원이 결성되어 미래를 향한 장도에 오른다. 이 때는 대한민국 미술이 추상회화와 구상회화가 양립하고 있을 때였고, 장두건 화백의 화의가 중심 축이 되었지만 기실 장두건 화백의 작품성향이 극사실화된 구상성향이 아니었으며, 좀 더 진보적인 성향의 개성미 넘치는 화풍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사실화에 연연하지 않고 개개인의 개성표출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형회 활동이 정상에 오르면서 불가 6년만인 1990년에 이형회 상을 제정하여 1회 입상자로 추상화의 임우경 선생이 받았고, 2회는 허계 선생이, 3회에는 김수익 선생이 받았다. 현재까지 37회 수상회원을 배출하였다. 심사위원으로는 이일, 이구열, 유준상, 오광수, 이경성, 박래경, 김복영, 윤진섭 제씨가 맡았고 현재는 운영위원회에서 심사를 맡고 있다. 당시만 해도 500만원의 상금은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장두건 화백이 타계한 후로는 이형회에서 소정의 상금을 수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포항시립미술관에 ‘장두건 미술관’개설을 계기로 장두건 상을 제정하여 1회에는 역시 추상화의 유익상 선생이 수상하였고, 제2회에도 추상화의 이도경 선생이 수상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구상이나 추상을 구분하는 단편적인 단체성향이 아니라 미래를 지향하는 혁신적인 단체라는 사실을 여실이 보여 주는 명증이었다. 이 같이 이형회의 진보적인 성향이 대내외적으로 알려지면서 활발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제2회전은 부산 유화랑 초대전으로 개최되었고, 불과 3회에 이르러 신일본미술협회 회원 39명과 이형회 40명의 회원이 함께 동숭동 미술회관에서 국제전을 펼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제4회전은 신일본미술협회의 초청으로 35명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미술관에서 일본화가 70명과 전람회를 개최하면서 일본으로부터 우수한 작품이 많았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창립 초창기부터 대내외적으로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2001년에는 일본인 아리카타 토시로(東方敏郞)상이 제정되어 2회 회장을 지낸 노희정 선생과 현재 회장인 고윤 선생, 강광식, 서창환, 최현주 선생이 수상하였으나 아리카타 씨가 사망하면서 5회로 끝났다. 이 밖에도 이형회 발전에 공로가 있는 회원에게 공로상, 장려상, 특별상을 수여하여 창작의욕을 북돋았다. 연륜에 비해 이형회상, 장두건상, 아리가다상을 비롯하여 공로상, 장려상, 특별상 등 많은 상이 제정된 것은 대한민국 미술단체에서 보기 드문 성황이었다. 또한 회원 상하간에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하여 장두건 화백을 중심으로 결집된 이형회는 대한민국 미술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이어 왔다. 이는 어느 단체도 범접할 수 없는 광의적인 업적이며 이형회가 탄탄하게 성장하게 된 동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내실을 다지며 성장한 이형회는 고궁화랑, 청담미술관, 대구 청학미술관, 롯데잠실점 화랑, 알파갤러리, 안젤리미술관 등 유수한 갤러리로부터 초대전을 받았고, 특히 2005년에는 〈한·일 우정의 해 기념전〉으로 일본의 히메이지 아오야마(靑山)호텔 초대전이 있었는데, 100호전을 위해 선편으로 운송되었으며 아오야마 호텔 전관을 특설전시장으로 꾸며 대전시회를 개최하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때 참석한 이형회 회원은 59명이었다.

또한 대구대백프라자, 춘천문화체육관 예술회관, 대구 봉성갤러리, 포항문화예술회관, 인천문화예술관, 인천혜원갤러리, 포항 포스코갤러리, 오사카한국문화원, 예산문화회관 등 지방순회 전시회를 통해 지방미술문화 활성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같은 궤적은 누구 한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의기투합하여 하나가 되어야 가능하다. 대한민국은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과는 달리 지원이 없다. 그러므로 화가들 스스로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단체가 해체되기도 하고 새로 생성하기도 했지만 이형회처럼 다양한 상을 제정하여 회원들을 격려하고 창작의욕을 고취시키며 검소하게 화맥을 이어 오는 단체도 찾아보기 어렵다.

〈정체성과 회화적 성향〉
대한민국 미술은 작금에 와서 600여 개의 단체가 난립하면서 선인들의 순수미술발전에 대한 노력을 무색하게 만들고 선배들의 유지를 간과한 채 예술지향은 간데 없고 상업적으로 곤두박질치며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형회만은 여타단체와 다르게 자정(自淨)하면서 38회를 맞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회원 확장에 급급하지 않고 뜻이 올곧은 미술인들만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단체에도 관여하지 않았던 변시지 화백이 몰년까지 이형회에 몸담고 있기도 했다.

하늘이 단지 허공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형태도, 소리도 없으면서 어디든 존재하는 자연의 규칙이다. 그러므로 하늘은 자연에 존재하는 너도 나도 우리 모두가 하늘이고 자연이다. 마찬가지로 이형회는 난립 속에 발을 담근 상업적 미술단체가 아니라 대한민국 회화의 정체성을 지켜 내는 하늘과 같은 존재로서의 너이고 나이고 우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형회가 가지고 있는 욕망은 이형회 모든 회원의 희망이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 미술인의 희망이 되어야 한다. 그것은 자연을, 그리고 미술을 애경하는 순수단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때에 이형회는 향후 어떠한 성격으로 정체성을 정립할 것인가 고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창립 당시 사실적인 경향은 미술을 사장시킨다고 추상을 선호하는 일부 계층의 위험한 발상의 강세를 자각하면서 보다 진취적인 미래 지향성을 찾았다. 그것은 추상으로도 구상으로도 분화하거나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표상의 정립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구상미술의 종언을 우려했던 창립 당시의 개념은 더욱 폭 넓은 신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것이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신개념이기도 하며 이형회가 추구하는 내면적 정체성이다. 이러한 내면의 의식이 안주하는 데는 모방도 모사도 없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종속되는 형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립 선배들의 취지를 존중하고 개개인의 개성을 존중하며 시대적 사고와 감성을 자유롭게 표현하도록 함으로써 구상, 추상의 분화를 따질 필요도 없이 유원(悠遠)한 미래를 바라보는 순수단체로 안주하고 있다. 이를테면, 거장 장두건 화백의 이념을 존중하지만 극단적인 아카데미즘이나 구상 또는 추상에 구속되지 않고 개개인의 다양한 개성을 존중하고 자연의 섭리로부터 발견된 미적 가치를 독창성으로 표현하는 것을 중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형회가 원로 고문들의 안정적 성향과, 중진들의 개성적인 미적 표현, 중견의 변화하는 의욕, 신진들의 시대감각이 한테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현상을 흐름으로 인식하는 가운데 존속하고 가야할 정체성 축성이라고 결론 내렸다.

현대미술은 다양한 사유, 다양한 질료, 다양한 표현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반면 어느 한 쪽에 종속되는 것이야말로 자멸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미술은 공간이나 시각의 미를 표현하는 총체적 학문이다. 말하자면, 연극이나 영화조차도 미술이 없이는 완성되지 못한다. 물론 이러한 분야에서 추상미술이 주도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미가 핵심이 되기 때문이다. 다물(多勿)이란 옛 땅을 되찾음이라는 고구려말이다. 이 옛말이 다시금 대두되는 것은 이제 대한민국 미술도 정체성을 확립하고 외국의 흐름에 뒤좇는 보편적 행위보다는 회화적 성향이 정립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미술은 시각을 통해 감상할 수 있도록 일정한 공간 속에 미를 표현하는 것을 말하며, 예술이란 일정한 재료와 양식이나 기교 등에 의하여 미를 창조하는 인간의 활동을 의미한다. 언뜻 보면 같은 것 같아도 같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미술은 인간의 생활공간에 미를 표현하는 것임으로 포괄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이형회의 미적 활동은 인간의 지혜로 인해 인간의 생활이 보다 편리하게 하는 진보향상을 목적으로 하며 정신활동에 의한 물질적 성과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을 탐구하고 자연에서 진미(眞美)를 찾아 냈을 때 비로소 훌륭한 작품을 창출할 수 있다. 자연의 탐미의식이야말로 자연과 동화되는 회합의 결정이기 때문에 자연을 가까이 하면서 심미의식에 의해 자연을 탐구하고 그 결과가 개개인의 개성을 만들어 내야 한다. 자연과 동화되는 데는 우주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 협화(協和)가 있어야 한다. 음악에서는 하모니라고 하는데 여러 가지 악기가 연주될 때 어떤 한 악기가 이질적인 소리를 내면 연주회를 망치듯이, 회화도 캔버스 위에 펼쳐지는 색의 오케스트라이기 때문에 어떤 색이나 화가의 감성이 일체화되지 않으면 개성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없고 결국 졸작이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과 동화되는 완성된 작품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미적체험(aesthetic experience)이 기반이 되어 사유, 상상, 연상, 정감 등과 같은 심미활동을 통해 의상(意象)이 구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감각적 미의 질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미적체험이 필수 요건이다. 이같은 체험에 의해 모티브가 설정되고 새로운 기술적, 정신적 노력에 의해 평가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형회는 장두건 화백을 위시해 창립 선배들의 숨결이 살아 있는 회화성을 기조로 심미체험에 의한 삶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인간의 삶이란 회화적으로 보았을 때는 생활환경, 생활주변의 사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정신세계가 표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제2의 도약을 추구하는 이형회는 이제 과거의 이론에 종속되지도 않고, 과거의 흐름에 매달리지도 않는다. 이형회 회원들은 전국에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화단의 중추적인 역할을 소임으로 하는 사명의식을 다지고 있다. 또한 새로운 미래 지향성을 캐치프레이즈로 내 걸고 고문, 회장을 위시해 모두 하나로 뜻을 모아 내일을 향해 정진하고 있다. 오늘날 순수하고 참신한 이형회가 대한민국 미술계에 버젓이 찬란한 모습으로 부각되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이형회는 38회를 맞는 동안 장두건 화백이 몰년까지 회장을 맡았고, 타계하면서 창립회원이었던 노희정 선생이 2대 회장, 그리고 현재 3대 회장으로 고윤 선생이 이형회를 이끌면서 후진들을 위한 교두보를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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