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인의 미학산책] 창조와 수용 Ⅳ

이것은 실제 착상에 이르는 전 단계를 두 가지로 설정하고, 구상의 현실을 설명하려고 한 것이지만, 그 전 단계는 결국 창조의 조건과 같은 것이며, 창조의 실태에 육박했다고 하기에는 좀 멀기 때문에  창조의 원점으로 돌아가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창조활동에 관한 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신의 창조를 모델로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인간의 한계를 전제로 하는 사고방식이다. 신의 창조의 특색으로서 일반적으로 허무로부터의 창조라는 무전제적인 창조다. 인간은 신의 창조를 모델로 할 수 없으며 어떠한 소재를 전제로 해서 처음으로 창조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허무로부터의 창조가 가능한가라고 근거를 물으면 그것은 신의 전지전능이라는 속성에 있는 것이고 여기에는 신의 창조를 인간의 창조모델로 하는 단서가 된다. 말하자면, 전지전능이기 때문에 신의 창조는 모든 가능한 세계를 비교하고, 최선의 선택에 의한 세계를 정확하게 실현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보면 그 성격상 과정이 없기 때문에 이 창조는 순시(瞬時)에 행해진다. 〈『창세기』에서는 창조는 6일간 걸린다고 하지만, 그것은 유대교가 오랜 신화적 사고법의 반영으로 보는 것이며 이론적으로 연역(演繹)되는 테제의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신의 창조성은 가능한 세계의 가치평가 국면에 집약되게 된다. 이것은 인간의 창조활동에도 적용할 수 있는 사고방식이며, 전술한 수사학적인 프로그램을 전형으로 서양의 전통적인 창작관(創作觀)을 유지해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신학적 개념에 따라 인간의 창조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처음의 구상에 있으며 그 후의 과정은 구상이 충실한 현실화에 지나지 않고, 그것 자체로서 적극적인 의의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게 된다.

이것에 대한 인간학적 개념은 당연한 것이면서 인간의 지력·실현력의 유한성을 근저로 하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지력(知力)은 유한한 것이지만, 남에게는 신과 같이 모든 가능성을 전망할 수는 없고 각각의 가능성, 즉 특정한 창작 플랜에 대해서도 그 전모를 미리 포착할 수도 없다. 그리고 실현하는 힘의 한계는 구상을 한정하는 요인으로서도 기능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의 창조성은 오히려 이 유한성을 적극적인 요인으로 전화(轉化)하는 것에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보통 장인이 만드는 도구와 같은 것은 만드는 방법의 처방에 충실하게 따라간다.

창세기 창조
창세기 창조

 

프로그램으로 보면 그것은 신학적 개념의 유형에 속하는 것이지만, 실제로 단순한 제작영역을 넘지 않는다. 여기에서 창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처음의 설계도와 정식화된 처방전에 따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예상을 넘는 무엇인가를 실현하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제작의 대상은 정확한 설계도를 쓸 수 있는 것인데도 교환, 창조의 대상은 그 자체를 실현하는 것보다 설계도나 기술에 의해 그것을 표현하는 수단이 없는 것이다. 구상과 실현의 이 지연은 인간의 능력의 유한성에, 다시 말하면 육체의 개재(介在)에 유래하는 것이며 사람의 창조에 있어서 본질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창조에 관한 인간학적 개념은 이 점을 부정적 계기로서가 아니라 적극적인 요인으로서 포착하는 사고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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