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인의 미학산책] 창조와 수용 Ⅰ

칸트
칸트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모더니즘의 원점에서 생각된 것이 ‘미와 예술의 자율성’을 설명한 칸트의 미학이었다. 칸트는 또 당시의 포멀리스틱(formalistic)한 고전주의 미학에 대하여 예술창조의 원리를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 이래 ‘천재’라는 예술가가 자유로운 창조적 개성에서 찾아낸 것이며 거기에 바로 칸트미학의 근대성이 특질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다음과 같이 이 명제를 보충하고 있다.

‘천공(天空)을 날아다니는 천재도 방자해질 때 좋은 취미가 이것을 조교(調敎)하기 위해 천재의 날개를 베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R. Rosenblum, pop Art and Non-Pop Art, in 『Art and Literature』5, Summer 1965, pp, 80-93〉.

칸트는 여기에서 예술가의 창조적 개성을 중시하면서도 천재의 독선적인 예술이 아니라 사람들을 알게 하는 예술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이 미와 예술의 자율성을 추구한 모더니스트(modernist)들이 전개한 예술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1910년부터 1920년에는 모던 아트(Modern Art)의 순수지향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지만 문예의 영역에 있어서의 모더니즘을 리드한 T·S·엘리엇(Eliot Thomas Stearns)은 1917년 중반부터 자기의 예술적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가로서 철저한 만큼, 점점 보통 사람으로서 예술을 누리는 부분과 예술을 창조하는 정신으로서의 자신과의 갭(gap)이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열려 간다’라고. 〈Ende der Kunst-Zukuft der Kunst(Hrsg, von Bayerishen Akademie der Schö?nen Kü?nste 1985), S. 71〉

르네상스 문학
르네상스 문학

 

모더니스트였던 엘리엇으로서도 자신의 현실체험에 비추어 볼 때, 칸트와 같이 예술작품을 둘러싼 창조와 수용이 원리적인 이원대립, 혹은 이율배반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반성은 반성으로서, 실제로 모던 아트의 궤적을 되돌아 보고 수용자 측에서의 시점이 예술해석에 즈음해서 표면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많지 않았다. 결국 이 시점이 부상하기 위해서는 모던 아트가 자기자신을 해소하는 임계점(臨界點)에 달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술적 창조와 수용의 이율배반은 예술가가 자신의 창조 활동을 예술이라고 자각하는 순간부터 자가당착이며 자기모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항상 미학·예술학에 있어서 보편적인 아포리아(aporia)이다. 예를 들면, 귀족사회를 표준으로 삼는 음악을 대중적인 서민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예능이었던 것에 있었다. 귀족 중심의 예술, 바꿔 말하면 미와 예술의 자율성의 자각에서 뒷받침된 천재의 예술이다. 칸트는 이 자유로운 천재적 창조성에 취미라는 말로 예술작품을 누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감성에 적합한 표현을 줄 수 있는 것인가를 논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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