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인의 미학산책] 미적개념-美的槪念 Ⅳ

미를 정의하거나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하는데 복잡하게 휘감기기 쉬운 것은 원래 형용사인 것에서 유래한다. 명사는 대체로 일정한 물체를 가리키고 있어서 일의적인 명료성을 가지고 있지만, 형용사는 각양각색으로 대상에 분산되어 인정을 받는 속성이 있다. 

특히 ‘아름다운’과 같은 형용사는 주관적 판단의 계기를 포함하고 있어서 제1 성질이나 제2 성질이라는 객관적 성질과는 다르다. 또한 이 판단은 대상의 제1 성질이나 제2 성질을 근거로 행해진다. 거기에서 정확히 제2 성질이 제1 성질을 근본으로 하는 미의 성질은 제1 성질과 제2 성질에 근거하는 것으로서 ‘제3 성질’이라고 불리는 것도 있다.

그러나 미적인 가치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대상의 객관적 성질만이 아니다. 회화를 예로 하면, 형이나 색에 의해 표현되거나 시사되고 있는 대상의 개념, 이야기, 문화권이나 개성과 같은 여러 가지 정감적ㆍ정신적인 코노테이션Connotation) 등을 이해해서 처음으로 그 미를 포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종교화는 그 종교성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 미는 일체의 가치를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감성적인 표식이다. 미의 본연의 자세를 말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야스퍼스의 용어인 ‘포월자(包越者, das Umgreifende)’가 가장 적절하다. 전제되는 감각적ㆍ정감적인 모든 성질이나 모든 가치를 미는 초월해버리지 않는다. 모두 생생하게 포착하지 않으면 미는 나타나지 않는다. 상술한 정의에서 다룬 ‘단적인 완전성’과는 이러한 종합적인 가치적 성질이 있다.

바이마르의 바이하우스 유적
바이마르의 바이하우스 유적

 

이 포월성 개념은 소위 미의 보편성 논의에 대하여 하나의 해답을 초래한다. 확실히 미의 정의에 변함없는 것도 어떠한 것을 미라고 볼 것인가에 있어서 문화적ㆍ시대적ㆍ개인적인 편차가 있을 수 있고 문화혁명의 시기에는 미관(美觀)이 격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상(現象)의 다양성을 근거로 미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것은 경솔하다. 문화의 국경을 넘을 수 없는 예술미가 있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런 다양성은 여러 가지 미술민속학이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특수성은 미를 구성하는 제성질ㆍ제가치에 있어서이며 포월자로서의 미에는 그것에 한해서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족에 의해, 개인에 의해, 미라고 인정하는 것은 각양각색이여서 직관되는 훌륭함이 있다고 하는 점은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것이다.

미는 일체의 가치를 포월(包越)한다. 따라서 소위 미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이 ‘미는 가치와 무관계’라는 의미라고 하면 미의 실태를 왜곡하거나 개념 내포를 편협하고 빈곤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진(眞)이나 선(善)과의 관계에 대해서 논급해 두고 싶다. 우선 진과의 관계에서 미와 진을 분리하려는 주장의 중핵(中核)에 있는 것은 미와 결부시킬 수 있었던 진실다움과 가상(假想)의 개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 ‘진’의 개념이 단순한 사실이라는 지극히 평판(平板)한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사실과의 일치를 진이라고 보는 것은 조응설이라는 진의 고전적인 개념이지만, 이 사고방식에서의 진은 명제 검증에 지나지 않은 것이고 진을 경험하는 본연의 생각은 아니다. 예술에 있어서 진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검증의 필요성이 아니다. 사실 이상으로 완전한 것, 적극적으로 진짜라고 생각되는 질이며, 그러한 진은 대부분 미와 불가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실재에 대한 가상의 개념은 진실다움에 상당(相當)하는 변형이라고 볼 수 있다. 단지 독일어의 미(Schön)가 가상(Schein)과 같은 근원어(根源語)라는 사실을 지적해 두고 싶다. 이 Schein은 ‘보다=가상’과 동시에 ‘빛’을 의미하며 상술에서 말한 빛의 은유에 속한다. 이 개념의 연관에서 보면 미는 가상임과 동시에 빛이며 그 빛에 대한 설득력이 된다.

발터 그로피우스
발터 그로피우스

 

미와 선의 중합(重合)은 보다 용이하게 이해된다. 도덕미의 사실에 주목하면 거기에 도덕적인 선이 직관상(直觀像)에 주어졌을 때 미로서 빛나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미와 선을 관련되게 만드는 것은 사상적으로도 진귀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18세기의 영국 예술사상은 미학을 도덕론에서 포착할 수 있다. 특히 인간의 행동을 표출하는 예술(문학, 연극, 영화, 무용, 경우에 따라서는 음악이나 회화)이 선을 사상(捨象)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 그리고 그 대부분 미는 선과 별개로(선은 내용, 미는 형식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인 선의 완전성이 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기하학적 형태에서도 도덕적 감성 없이 미적 판단이 행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화려한 미를 좋아할 것인가, 수수한 고담(枯淡)한 미를 좋아할 것인가 하는 취미는 분명히 도덕적인 태도와 같은 동근(同根)인 것이다. 미를 인정하는 체험에 존재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전체적인 관계이며 자세다. 다른 제가치의 관계에 있어서의 미의 포월성을 포착한 사상으로서는 기능주의 미학이 있다.

예를 들면, 바우하우스의 조형과 같이 의자를 일체의 장식을 배제하고 그것의 기능만을 추구했을 때 아름다운 형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입장이다. 인공품에 있어서는 기능이 그대로의 개념, 즉 본질 규정이기 때문에 기능주의 미학은 완전성에서 미를 인정하는 입장이라고 말해도 좋다. 기능주의는 통례적으로 장식을 부정한 현대적인 디자인의 이론만 여겨지고 있지만 미학적으로는 정통적인 사상의 하나라고 볼 수 있고, 반대로 그 입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는 미의 포월성을 두고 있다.

플라톤 이래 미는 자주 사랑과 결부시켜 생각되어 왔다. ‘연애에 대해서’라는 부제로 플라톤의 대화 편 「향연(饗宴)」의 주제는 연애의 신을 찬양하는 연설로 서로 경쟁하고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그 연설에서 무당 데이오티마의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칸초니에레 - 페트라리카
칸초니에레 - 페트라리카

 

‘사람은 누구나 육체적ㆍ정신적으로 몸담고 있어서 어떤 연령에 이르면 출산을 열망한다. 그러나 출산하기 위해서는 미적개념이 필요하다. 아름다움을 언급했을 때 열망으로 인해 출산이라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이렇게 하여 정신적으로 임신 중인 자는 아름다운 것을 언급하고 철학적인 지식, 기술적인 발명품을 만들어 낸다.’

미는 창조가 필수적인 매체지만 미를 주제로 해서 사랑을 조목조목 쓰고 그것에 의해 창조 활동을 매개하게 된다. 이 사상을 전개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예술작품이며, 그것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면 다음 창조를 자극하고 미는 연쇄적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미의 창조성은 예술창조의 일면을 밝히고 있다. 확실히 예술가들이 창작 의욕에 의해 구상을 이해해 온 것은 아름다운 여성이거나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에 있어서의 라우라(Laura), 베를리오즈(Louis Hector Berlioz)에 있어서의 H·스미손, 아름다운 자연이거나 또한 예술작품이거나 했다(들라크루아에 있어서의 섹스피어, 보들레르에 있어서의 들라크루아). 미의 창조성은 또한 창조과정과 작품을 연결하지 않고 작품과 해석을 연결하여 창조성의 연환(連環)을 만들어 낸다. 예술작품의 해석은 창조성을 취지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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