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의 역사적 근간 Ⅴ
   
미적 관심은 셸링(Friedrich Willhelm Schelling)이래 예술작품에 그 중심을 두고 있다. 미학이 철학에 하나의 자리를 준 인식론적 문제의식은 데카르트에서 칸트(Kant)에 이르는 근세적인 철학에 속해 있다. 그런데 근대사상에서 미학이 쟁취한 중요성은 인간의 창조로서의 예술을 주제로 하는 것에 있었다. 르네상스 이래 문화의 세속화 경향이 19세기가 되어서 크게 결실을 맺은 하나의 대표적 형태이다. 그로 인해 미학은 인식론과 함께 창조론이라는 두 번째 뿌리를 갖기에 이른다. 이 양의성은 드디어 피들러(Fiedler)적인 미학과 예술학의 분리 주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예술의 인식론에 독서론이 속한 것은 근자에 이목을 끌게 했다.

르네 데카르트(1596~1650년)
르네 데카르트(1596~1650년)

 

칸트 이후의 독일 관념론 철학에서 미학은 협의(狹義)의 철학, 윤리학과 함께 세 개의 주요한 영역을 형성하게 된다. 오늘날 미학이 대학에서 독립된 학과가 된 것은 그 전통에 의한 것이 크다. 또한 그와 동시에 현대에서는 예술이 주요한 문화영역으로서 대부분 제도적인 보증을 얻고 있는 것이 예술철학으로서 미학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그러나 상황은 변화되어 오고 있다. 그리고 역사의 전환점에 당도한 현재의 예술이나 미학의 기반과 존재 이유와의 사이에 직면해 있는 것은 미학의 중요한 과제이다.

학문은 필연적인 말에 의한 논술이다. 플라톤적인 미의 관상(觀想)은 언어에 의해 기술할 수 있는 것인가? 플라톤이 거기에 이르는 도정을 이야기하면서 미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은 불가능한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말로 이해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보다 직접적인 논술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의심이 철저할 때 미학 자체가 파라독스이며 모순개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미학에 대한 혐의(嫌疑)는 종종 존재한다. 미학을 배울 때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이 아름답지 않은 것인지는 납득할 수는 없다. 즉, 미학은 평론가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미학이 예술가를 만들지 않는다는 것도 주지할 일이다. 이렇게 무익하다는 것은 미학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기획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미학에 대한 의념(疑念)의 유명한 예는, 폴 발렐리의 상계서 논고이며, 1937년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미학회의에 초대되어 강연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미학은 존재하고 있다. 평론가나 예술가를 육성하거나 그들의 지침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며, 미의 정의나 언어적인 기술을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면 미학은 어떠한 것으로 존재하는 것인가? 미학의 과제에 대해 일본의 미학자 고바타 준조(木幡 純三)가 ‘미적 이성의 자기 성찰의 기록’이라고 한 말은 실태에 가까운 것 같이 생각된다. 미적 이성이라는 개념은 반드시 명확하지 않지만 그 의미는 미나 예술에 접촉하고 의문을 품거나, 확신을 갖거나, 곤혹하거나 하는 것에 반성을 더해 인식을 깊게 해 가는 것이다. 그 의미에서의 미학은 진지한 예술 체험, 자연미의 체험 안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어서 제약이나 조건이나 규정 없이 자연스러운 발전이 학문으로서의 미학을 구성해 간다고 할 수 있다.

미학이 저절로 발생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미의 창조성과 특히 현대 예술에 있어서 지적도발(知的挑發)의 성격이 중요하다. 미는 그것에 접한 사람을 고양시켜 창조적 상태로 이끄는 특성이 있다. 미는 사람을 새로운 창조로 유혹하여 사색을 자극하고 근세에 이르기까지 미를 취지로 하는 예술에 대하여 근대 이후의 예술은 지적 성격을 강화해 왔다. 근대예술은 특히 소설을 중심으로 사상을 구체적으로 전개하는 장이 되었고 현대의 전위예술에는 그것이 무엇인가, 어떠한 사상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인가 라는 수수께끼 풀기를 강요하는 것이 적지 않다. 이러한 작품에 대한 반응은 철학적인 사색의 맹아(萌芽)이다.  따라서 미학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이미 어떠한 의미로는 미학을 시작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여기에서 지적한 현대예술의 특질은 예술 일반의 성질이 극단적인 데서 현재화해 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예술창조는 그런 점에서 자각적이지 않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어떤 예술관, 즉 예술은 무엇인가, 또는 있어야 하는 것인가라는 것에 이해나 사상을 전제로 행해진다. 그리고 그 사상은 필연적으로 작품에 담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학문 이전의 미학이며 사상적인 개성이 문제가 되기 이전의 시대에 있어서는 각각의 문화권, 각각의 시대에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었던 상식으로서의 예술관과 일치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미학은 학문 안에서 논할 수 있는 것은 적지만, 행위와 삶에 의해 짊어진 사상이며 공허한 추상성을 모면하고 있다는 의미로 무시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또한 학문 외의 일반 사회에 있어서 미학이라는 단어 용법에 자주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예술작품이 어떤 암묵적인 미학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미학연구의 소재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인물·용어 색인

고바타 준조(木幡 純三) 일본의 미학자
데수와르(Max Dessoir, 1867-1947) 네오 칸티안 철학자인 그는 수년 동안 편집한 Zeitschift fü?r Ä?sthetik und allgemeine Kunstwissenschaft를 설립하고 Ä?sthetik und allgemeine Kunstwissenschaft라는 다섯 가지 주요 미적 형태를 공식화한 작품 『Ä?sthetik und allgemeine Kunstwissenschaft』를 출판했다.

데카르트(Descartes, René?, 1596-1650) 프랑스의 수학자ㆍ철학자.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해석 기하학의 창시자이다.
뒤보스(Jean Baptiste DuBos, 1670-1742) 장 바티스트 뒤보스는 성직자이며 뒤보스 신부라고도 한다. 그가 받은 최초의 교육은 신학이었다. 그는 1724년 비로소 부제가 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영적인 수행보다는 외교관으로 활약했다. 1696년 이후에는 함부르크, 이탈리아, 런던, 헤이그, 브뤼셀, 뇌샤틀 등으로 연이어 임지를 옮겨 다녔다. 1710년에는 유트레히트에서 평화협상에 참여했다.

라이프니츠(G0ttfried Wilhelm von Leibniz, 1646-1716) 독일의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신학자. 신학적ㆍ목적론적 세계관과 자연과학적ㆍ기계적인 세계관과의 조정을 기도.
몽테뉴(Michel de Montaigne, 1533-92)   프랑스의 수필가, 사상가.
몽테스키(Montesquieu, 1689-1755)   프랑스의 사상가·정치 철학자.
바움가르덴(Baumgarten, 1646-1716) 독일의 철학자, 미학자.

비코(Vico, Giovanni Battista, 1668-1744) 이탈리아의 철학자. 법학ㆍ정치학ㆍ역사학에서 업적을 남겼다. 데카르트 철학에 반대하여, 행위에 진리 기준을 두고 역사철학 내지 민족심리학에 대한 시야를 열었다. 봉건적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미래를 전망한 내용을 평가받고 있다. 그의 기본 사상은 인간 역사의 발전에 대한 고찰에 있으며, 신적 원리가 역사적 법칙의 기원이라고 인정하고 있다. 역사 그 자체에 내재한 법칙이 있고 발전은 이를 따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어떤 민족도 발전 과정을 세 개의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그것은 신적ㆍ영웅적ㆍ인간적이라는 단계이다. 저서에 《여러 민족의 공통 성질에 관한 신과학 원리》가 있다.

비투르비우스(Vitruvius, 1C.B.C.) 리니우로마의 정치가ㆍ학자ㆍ작가(B.C.106~B.C.43). 집정관이 되어 카틸리나의 음모를 폭로하고 ‘국부(國父)’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의 문체는 라틴어의 모범으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국가론』, 『법률론』, 『의무론』등 
섀프츠베리(Third Earl of Shaftesbury, 1671-1713) 3대 백작, 영국의 철학자, 사상가.
셸링(Friedrich Willhelm Schelling, 1775-1854)   독일의 철학자. 관념론 및 낭만파의 대표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폰 셸링은 독일의 관념론의 완성자로 불리기도 한다. 저서에 『인간적 자유의 본질』

소크라테스(Socrates, (B.C.470?~B.C.399)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문답을 통하여 상대의 무지(無知)를 깨닫게 하고, 시민의 도덕의식을 개혁하는 일에 힘썼다. 신(神)을 모독하고 청년을 타락시켰다는 혐의로 독배(毒杯)를 받고 죽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384~B.C.322)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B.C.384~B.C.322). 소요학파의 창시자이며, 고대에 있어서 최대의 학문적 체계를 세웠고, 중세의 스콜라 철학을 비롯하여 후세의 학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저서에 『형이상학』, 『오르가논』 등.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스코틀랜드 커콜디 출생의 고전경제학의 창시자, 철학자.

에밀 우티츠(Emil Utitz, 1883-1956) 유태인 혈통의 체코 철학자이자 심리학자. 뮌헨, 라이프치히, 프라하에서 공부한 후 로스토크 교수가 되었고, 1925년부터 할레 비텐베르크대학교에서 철학 위원장을 역임했다. 1933년 강제 은퇴한 후 프라하에서 교수로 취임했다.1945년 테레지엔슈타트가 해방된 후 그는 프라하로 돌아 와 1956년 예나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동독을 여행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장 쟈크 루소(Rousseau Jean Jacques, 1712-1778)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이며, 철학자, 사회학자, 미학자, 교육론자. 그의 철학적 입장은 물질과 정신은 함께 영원히 존재한다는 이원론과 영혼은 불멸하다는 이신론(理神論)을 주장했다. 도덕적 관념을 생득적이라고 보았으며 사회학적으로는 봉건적 전제 지배를 공격하면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시민의 자유를 강조했다. 그리고 출신에 관계없이 인간은 평등하다고 보고 불평등은 사유재산에 있다고 했지만, 소소유(小所有)를 인정하고, 노동을 높이 평가하는 쁘띠 부르주아적, 수공업자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이성보다는 감성을 중요시하는 낭만주의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인위적인 문명사회의 타락을 비판하고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역설하였다. 그는 사회계약론을 주장했지만, 홉스와는 달리, 인간의 자연상태는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우정과 조화가 지배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자연상태를 회복할 것을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프랑스의 부르주아 혁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커다란 작용을 했다. 저서 『인간 불평등 기원론』

페스탈로치(Johann Heinrich Pestalozzi, 1746-1827)   스위스의 교육학자.
플라톤(Platon, 428-347/48 B.C.) 그리스 철학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사상가. 소크라테스의 제자이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 대학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고등교육기관인 아카데미를 개설하여 생애를 교육에 바쳤다. 대화편(對話篇)을 다수 쓰고, 초월적인 이데아가 실재(實在)라고 하는 사고방식을 전개하였다.
플로티노스(Plotinos, c.205-c.270) 이집트 태생의 고대 로마 철학자. 신플라톤학파의 대표자로 중세 스콜라 철학과 헤겔 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저서에 『에네아데스(Enneades)』가 있다.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 65-8 B.C.) 고대 로마의 시인. 풍자시ㆍ서정시로 명성을 얻어, 아우구스투스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의 『시론(詩論)』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함께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
칸트(kant Immanuel, 1724-1804) 독일의 철학자. 사고를 위한 이마는 침착한 유쾌함과 기쁨의 자리였다. 말에는 풍부한 사상이 넘쳐흘렀고 농담과 재치가 장기였다. 알만한 가치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어떠한 음모나 편견 그리고 명성에 대한 욕망도, 진리를 빛나게 하는 것에서 그가 조금이라도 벗어나도록 유혹하지 못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도록 부드럽게 강요했다.

코메니우스(Comenius, Johann Amos, 1592-1670) 체코슬로바키아의 교육 사상가. ‘범지학’을 구상하여 근대 교육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었다. 저서에 《대교수학(大敎授學)》, 《최신 언어 교수법》, 《자연학 개론》 등이 있다.
쿠인틸리아누스(Quintilianus, Marcus Fabius, ?35-?96) 에스파냐 태생의 고대 로마 수사학자.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고대 로마의 문인 철학자, 정치가, 집정관이 되어 카틸리나의 음모를 폭로하고 국부(國父)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의 문체는 라틴어의 모범으로 일컬어진다. 저서에 《국가론》, 《법률론》, 《의무론》.
파스칼(Pascal, Blaise, 1623~1662) 프랑스의 사상가ㆍ수학자ㆍ물리학자. 현대 실존주의의 선구자로, 예수회의 방법에 의한 이단 심문(異端審問)을 비판하였다. 《원뿔 곡선론》, 《확률론》을 발표하였다.

플리니우스(Gatus Plinius Secundus, 23-79)  로마 제정기의 장군·정치가·학자. 학문, 특히 박물학에 관심이 깊었다.
피들러(Fiedler, Konrad), 1841-1895) 독일의 예술학자, 근대예술학의 선구자로 조형예술을 대상으로 예술 고유의 독자성을 주장하였고, 저서에 『예술론집』이 있다.

허치슨(Francis Hutcheson, 1694-1746)   영국의 사상가. 18세기 영국의 도덕감각학파. 인간의 심성에는 이기적 경향과는 독립된 이타적 경향이 있다고 하였다. 또한 미적 감각과 마찬가지로 정사(正邪)를 판단하는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도덕감각이 있다고 설파했다. 공리주의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영국의 도덕감각학파의 대표자이다. 그는 인간의 심성에는 이기적 경향과는 독립된 이타적(利他的) 경향이 있고 또한 미적(美的) 감각과 마찬가지로 정사(正邪)를 판단하는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도덕감각이 있다고 설파하였다. 그는 심리분석적 수법을 원용(援用)하여 그의 주장을 체계화함으로써 후일의 공리주의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주요 저서로 『미(美)와 덕(德)의 관념의 기원』(1725) 『도덕철학체계』(2권, 1755) 등이 있다.

코기토(Cogito)  라틴어로써 방법서설에서 서술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Gogito, ergo sum의 약자.
파라독스(paradox)  일반적으로 모순을 야기하지 않으나 특정한 경우에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는 논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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