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스트로서의 나의 삶

내 삶이 도전적이고 기적 같은 일의 연속이다.
우리 갤러리 소장품이 족히 1만점은 넘을 것이란 말을 했더니 사람들이 놀란다. 
나는 컬렉터로서 이것 저것 사 모으는 걸 좋아했고 따라서 갤러리를 시작하기 전 그림도 꽤 있었다. 

[김수열 갤러리스트] 소장품이야기 39 '갤러리스트로서의 나의 삶'
[김수열 갤러리스트] 소장품이야기 39 '갤러리스트로서의 나의 삶'

시골이지만 신도시 중앙에 4층 상가 주택도 두 동 있었고, 일명 빌라라고 불리는 다세대 주택도 2채 있었다. 갤러리를 시작하고는 곧바로 상가 두 동은 팔았고, 대출과 전세 보증금 등을 정리하고 남은 돈으로 서울옥션. 케이옥션 경매에 뛰어들어 그림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건용 선생을 모시면서 그 그림들을 팔아서 아트페어에 쏟아부을 수 있었다. 국내는 물론 독일, 중국, 미국 등의 아트페어에 그 큰 부스를 만들고, 선생을 모셔가서 퍼포먼스를 선 보일 수 있었던 것도 컬렉션한 그림들을 팔아서이다.   
그러나 2012년 이건용 선생님이 구름처럼 사라질 땐 남은 건 온통 빛 덩어리였다. 집도 경매로 날라간 뒤였다. 팔아먹을 그림은 커녕 하물며 갤러리에 걸려 있던 에어컨도 빨간 딱지가 붙어 있었으니 나는 완전 망한 것이었다. 

[김수열 갤러리스트] 소장품이야기 39 '갤러리스트로서의 나의 삶'
[김수열 갤러리스트] 소장품이야기 39 '갤러리스트로서의 나의 삶'

남은 것은 겨우 이건용 선생님이 남겨두고 간 그림들뿐이었다. 아무리 팔려고 노력해도 팔리지 않아 오늘날 나를 망하게 만든 그 원흉만 덜렁 남았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넋 놓고 있을 수 많은 없었다. 살 길은 작가라도 꾸려 아트페어 부스 장사라도 해야 갤러리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산 넘어 산이었다. 나와 친분이 있다고 생각한 갤러리들이 한결같이 나에게 각을 세웠다. 이건용 선생과의 결별이 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으로 만들어져 우리 갤러리를 화랑계에서 완전히 퇴출 시켰던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살 길은 이건용 선생이 잘되는 길 뿐이었다. 

[김수열 갤러리스트] 소장품이야기 39 '갤러리스트로서의 나의 삶'
[김수열 갤러리스트] 소장품이야기 39 '갤러리스트로서의 나의 삶'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이건용 선생의 팬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누구든 조금만 관심을 보이면 그림을 선물을 하고, 책임지고 비싸게 팔아 주겠다며 설득하여 헐값에 작품을 팔았고, 손님을 소개시켜 주면 그림을 선물하면서 컬렉터 수를 기하급수적으로 늘려 나가기 시작했다. 2016년이 되었을 땐, 그 수가 족히 200명은 되었다.
그리고 2016년 현대갤러리 전시가 열리던 날 그 구름 관중의 사진을 받았을 땐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내가 만든 팬덤이 이건용 선생의 열렬팬이 되어, 거의 대부분의 컬렉터가 행사장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손님 중 최소 절반은 이건용 선생님의 작품을 한두 점이라도 가지고 계시는 내가 만든 컬렉터였다.

[김수열 갤러리스트] 소장품이야기 39 '갤러리스트로서의 나의 삶'
[김수열 갤러리스트] 소장품이야기 39 '갤러리스트로서의 나의 삶'

이후부터 내가 팔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선생의 작품을 찾는 분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팔기 어려워 애물단지였던 단색화 시장이 폭발하며 박서보, 이동엽, 정상화 선생님들의 작품이 고가에 팔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건용 선생이 떠난 2012년 이후 위기감을 느끼며 그림이 팔리면 반드시 팔린 그림 값의 20%는 다시 그림으로 채웠다. 그렇게 한 점을 팔면 두 점을 다시 사는 공식으로 작품을 구매해 왔으니 작품 수는 점점 불어났다. 그러나 매출이 적으니 그림 구매는 비교적 가격이 저렴한 100만 원 이하에서 작품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안전한 투자가 될 만한 작가를 찾는 것이었고, 이때 가장 많이 사 들인 작가가 무라카미 다카시의 판화였으며 간간히 일본을 건너가서 헐값에 나온 단색화 작가의 작품 정도를 사들이는 일이었다. 
그랬던 단색화가 때를 만나 비싼 가격에 팔리면서 한 점을 팔면 웬만한 작가의 아트페어 출품작을 싹쓰리할 만큼의 여유는 만들었다. 아니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매출의 20%는 그림을 산다는 철칙을 반드시 지켰다. 

[김수열 갤러리스트] 소장품이야기 39 '갤러리스트로서의 나의 삶'
[김수열 갤러리스트] 소장품이야기 39 '갤러리스트로서의 나의 삶'

그렇게 그림이 점점 많아지면서 수장고만 만들면 1년을 못 넘겨 다시 포화 상태가 될 지경이었다. 그리고 이건용 전성기가 열린 2022년, 드디어 내 소장품은 1만 점이 넘을 것이란 추측에 도달하게 된다. 
지나고 보니 나는 운이 너무 좋았다.
내가 선택한 값싼 작가 대부분은 불루칩이 되었고, 무명작가들은 전성기를 맞아 활동 중이다. 각 경매사들의 기획전에는 나에게 출품 요청이 끊이지 않고, 대형 전시의 작품 대여 요청도 심심찮게 들어오니 이제 나의 목적과 본분에 겨우 안착해 가는 것 같다.  

[김수열 갤러리스트] 소장품이야기 39 '갤러리스트로서의 나의 삶'
[김수열 갤러리스트] 소장품이야기 39 '갤러리스트로서의 나의 삶'

나는 세계적인 컬렉터로 남는 것이 목표다. 
비록 당장에 고가의 작품은 아니지만 100년 200년 후, 내 소장품들이 세상의 주목을 받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다만, 보관에 대한 어려움이다. 그래서 얼마 전 소장품의 보관 문제를 다루다가 새로운 도전을 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나의 소장품 중 복제 가능한 작품들은 모두 소각하여 NFT로 보존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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