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인의 미학산책] 미학의 역사적 근간

Michel_de_Montaigne
Michel_de_Montaigne

중세로부터 근세로의 이행이 르네상스, 다른 방면으로는 종교 개혁에 의해 전개되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이스탄불의 옛 이름) 함락을 계기로 시작된 르네상스는 비그리도교적인 고대문화의 재발견과, 종교개혁은 종교 내부에 있었고 교회의 권위와 개인 신앙의 본질에 영향을 미쳤다. 고정된 질서, 중세의 세계관을 뒤집어  엎는 운동이었으며 가치를 유지하고 있었던 권위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여기에서 인류가 부닥친 것은 틀림없는 하나의 문화혁명이었다.

이러한 구세계의 붕괴는 가치의 상대화로 진행했다. 이 운동을 상징하는 것이 몽테뉴(Michel de Montaigne)이다. 프랑스의 걸출한 독서가이며 여행가였고 도덕주의자였던 그는 경험의 지평을 넓히고 사고방식을 상대화(相對化)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친숙해져 있는 삶의 태도가 유일하게 옳다는 편견을 수정해 갔다. 그는 ‘신대륙의 국민에 대하여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곳에는 야만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누구도 자신의 관습이 아닌 것을 야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의 사고방식이나 관습의 실례와 관념 이외에는 진리와 이성의 표준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또한 종교적 내전의 격동시대를 살면서 그 와중에 상대적 세계관을 실천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절대적 회의주의의 경지에 도달한 그는 유명한 ‘나는 무엇을 알고 있을지 Que sais-je?’라는 표어에서 표현하고 있다.

파괴 뒤에 재건이 온다. 확실한 것을 잃은 상황에서 기반이 되는 고정점의 깊은 노력이 시작된다. 그리고 이 노력에서 직관이나 느낌의 의의가 발견되는 것이다. 확실성을 추구하는 노력의 하나로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이다. 그것을 이성적 인식, 즉 추론(推論)이 이치를 좇아 어떤 일을 미루어 생각하고 논급함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확실성의 기초가 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삼단논법에 대해 데카르트는 강하게 부정했다. 그것은 단지 하나의 직관이라는 것이다. 인식의 기초로서의 직접 지식을 명료하게 말한 것은 파스칼(Pascal)이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은 이성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심정에 의해서이다. 우리가 제1 원리를 아는 것은 후자에 의한 것이다. 원리는 직관되어 명제는 결론하게 된다’. 그는 자연학적인 제1 원리 혹은 공리(公理) 이외에 신의 존재, 사랑을 심정의 직관(sentiment)으로 밖에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비논변적이며 직접적인 감정이나 감각이라는 정신의 움직임은 18세기에 중요성이 증가해 간다. 가장 큰 조류가 ‘도덕감각(moral sense)학파’라고 불리는 영국 사상의 계보이며 섀프츠베리(Shaftesbury)로 시작하여 허치슨(Hutcheson)을 거쳐 아담 스미스(Adam Smith)에게 이른다. 그들은 주로 가치판단을 감각에 돌리고 있었지만 그 대상에 미가 포함되는 것은 당연하다. 미나 예술의 관점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프랑스의 사상가 뒤보스(Jean-Baptiste DuBos)이다. 그는 가치판단이 감정에 따라야 할 것을 강조하고 보통 오감과 구별해서 ‘제6감(第6感)’의 개념을 제기하고 있다. 이 사상 동향의 큰 결정이 바움가르텐에 의한 감성학으로서의 미학이라는 구상이었다. 이 면에서 보면, 감성학으로서의 근대미학의 성립은 전통이나 추론에 의한 가치의 인정이 아니었다. 가치가 직접적인 지식이 근원적인 것이라는 표명이었다. 미는 이 가치론으로 원형의 위치를 차지한 것이다.

덧붙이자면, 현대철학에서 강조되고 있는 ‘지(知, 프랑스어의 savoir)’란 이 직관으로  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과학적이거나 추론적인 인식(connaissance佛語)에 대하여 그러한 논증 형태를 취할 수는 없는 근원적인 인식이다. 현대 인식론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감성론에 새로운 가능성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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