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풀이

4년 전인 2019년 5월,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에서 한국인 승객 33명이 탄 유람선 허블레아니 호가 크루즈 선박과 충돌 후 전복되어 침몰한 사고가 있었다. 그 후 수색작업이 이뤄지는 가운데, 계속되는 폭우로 강의 유속이 빨라지면서 실종자 수색작업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피해자 가족들이 머나먼 낯선 나라에서 잃어버린 가족을 애타게 찾고 있을 심정을 떠올리니 무척이나 괴로웠다. 그러한 괴로움을 풀어내기 위해 필자는 붓을 들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바로 100호 사이즈의 ‘고풀이’다. 고풀이란, 전라도의 씻김굿에서 무녀가 무가를 부르면서 매듭을 푸는 굿거리를 말한다. ‘고’는 매듭을 말하며 고풀이는 매듭을 푼다는 뜻이다. 또, 흔히 이를 해원(解寃)이라고도 하는데 ‘고’가 한을 뜻하는 고통(苦)의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19년 5월 헝가리에서 일어난 유람선 사고소식을 듣고 작업을 시작하여 7월에 완성하였다. 때로는 굿과 같았다.  타인의 고통을 대신 느끼고 대신 풀어내는 작업은. 
2019년 5월 헝가리에서 일어난 유람선 사고소식을 듣고 작업을 시작하여 7월에 완성하였다. 때로는 굿과 같았다.  타인의 고통을 대신 느끼고 대신 풀어내는 작업은. 

 

필자는 애초부터 타인의 고통이나 사회적 사건 사고에 민감하게 공감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필자 스스로 개인적인 고통을 겪으면서부터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사람이란 당장 자기 손톱 밑의 가시를 더 아프게 느끼기 마련이지만, 인생의 위기 속에서 절박한 아픔을 경험하고 나면 타인의 아픔에 비로소 공명하게 된다. 그러므로 상실은 때로는 타인과의 연결을 돕는 축복이기도 하다.

 

               백지상, 苦풀이_162.2x130.3_oil on canvas_2019
               백지상, 苦풀이_162.2x130.3_oil on canvas_2019

 

나는 고통의 탐구자이다.

처음엔 그저 상담심리사로서  내 가슴에 켜켜이 쌓인 수많은 이들의

고통의 스토리를 풀어내고 싶었다.

그런데 캔버스에 분출된 고통은 그 자체로서 생명력을 갖기 시작하면서

색과 형태로 변형되고 승화되다가

마침내 바람으로 휘발되기 시작했다.

-2019년 작가노트 중에서-

 

상담심리사가 된 후에도 처음엔 개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개인적 공감능력만을 지니고 있었다. 상담실에서 좁은 시야로 각 개인을 만나다보니, 각자의 주관적 고통에는 민감해도 사회적 이슈나 고통에 민감하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많은 개인을 만나면서, 점차 공감의 영역이 확대되어 가기 시작했다. 상담실에서 만나는 내담자들의 가족이 다치거나 아플 수도 있고, 또 그 지인이 사고를 당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한 다리 건너서 연결, 연결하다 보면 모두가 공감의 대상이 되어가게 되는 것이다.

‘사회적 공감(social empathy)’이라는 책을 저술한 엘리자베스 시걸에 의하면, 다른 집단 및 타인들의 상황을 인식하고 경험함으로써 이들을 이해하는 능력이 사회적 공감이다. 시걸은 사회적 공감이 일곱 가지 요소로 구성돼 있다고 제안하였다. 정서에 대한 정신적 이해, 자신과 타인에 대한 인식, 타인의 입장에서 관점을 수용하는 것, 자신의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과 같은 개인적 공감 요소에 더하여 맥락에 대한 이해와 거시적 관점의 수용이 더해져 사회적 공감의 요소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맥락에 대한 이해란 자신과는 다른 삶의 경험을 가진 타인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즉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의 현재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의 일들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거시적 관점의 수용이란 인종, 성별, 능력, 연령, 계급 배경 등 자신과는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들의 상황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사이코패스와 일반인을 구분할 수 있는 중요한 차이 중의 하나가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 여부다. 공감은 타인과의 관계를 열어주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중요한 능력 중의 하나이다. 또한 예술가의 개인적 고통은 예술의 중요한 출발점이자 동기이며, 사회적 아픔에 대한 예술가의 공감은 예술이라는 한 분야가 사회적인 존재 가치를 찾게 되는 중요한 매개이자 표현 양식이 된다. 그러므로, 예술가들이여. 먹고 사랑하고 공감하자. 그리고 예술로 표현하자.

 

백지상 프로필

상담심리학 박사. 서양화가. 호주국가공인 예술치료전문가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외래교수. 치유예술작가협회(HAA)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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