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의 역사적 근간 Ⅲ

예술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학문체계에 있어서 이론학·실천학과 함께 세워진 제작학(制作學)의 범주에 속하고, 저작으로서는 『시학(詩學)』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15세기 말에 비잔틴에서 서구세계에 전해진 후, 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미술에 관한 이론적 사고에 영향을 끼쳤다. 시학의 또 하나의 고전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Quintus Horatius Flaccus)가 서한시(書翰詩)로 쓴 『시학』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서양인들의 상식이 될 정도로 널리 침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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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티우스의 『시학』 361행의 전반에 ‘시는 그림과 같이(Ut picturea poesis)’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르네상스 시기의 사람들은 이 말을 근거로 회화를 시와 등가인 것으로 간주하고, 시학이나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와 쿠인틸이아누스(Quintilanus, Marcus Fabius)의 수사학(修辭學)을 회화론에 적용하면서 시학이나 수사학 영향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회화가 고전적인 이론을 가지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영했다. 회화나 조각에 관한 고대의 저작으로는 플리니우스(Plinius)의 『박물지(博物誌)』가 있을 뿐이다. 이것은 이론적이기보다는 평론적인 것이었다. 또한 비투르비우스(Vitruvius)의 『건축론』은 르네상스 이후 건축론이나 도시론 분야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필적할만한 권위로 인정받았다. 음악은 중세교육체계에서 자유 7과 가운데 수학적인 4과의 하나로 인정받고 있었을 만큼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Pythagoras)파 이래 영원한 학문적 전통이었다. 이 수적(數的) 음악론은 근세 화성론(和聲論) 고찰의 출발점이 되었지만 조화를 수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예술 철학적인 음악론과는 뜻을 달리하고 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1790)을 근대미학의 확립지표로 한다면 그것은 18세기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는 르네상스 이후의 근세라는 시대에 전개되어 온 전사(前史)가 있다. 이 미학의 근세사는 어떠한 문화적·사상적인 시대 상황에서 이 학문이 독립한 스텐다드로 요청되었다고 이해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우선 18세기에는 미학뿐만 아니라, 많은 근대적 학문이 성립됐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G·비코(Giambattsta Vico)와 함께 역사학이, 몽테스키(Montesquieu)와 함께 사회학이, 또한 17세기의 코메니우스(Comenius,)를 선구로 장·쟈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나 페스탈로치(Pestalozzi)와 함께 교육학이 근대적인 자율적 학과로 확립되었다고 보여 진다.〈Montesquieu를 근대적인 실증적 사회학의 아버지라고 보는〉

여기에 미학을 가해 생각하면 인간의 구체적인 생에 대한 관심 고조를 인정할 수 있다. 그것은 문화 전체의 세속화 움직임의 반영이었다. 그리고 이 근세적 세속문화를 대표하는 루이 14세의 궁정문화가 다채로운 예술이었던 것은 주지할 일이다. 이 시기에 성립한 미학이 감성학이라고 명명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술을 눈으로 보는 효과를 취하려는 현상이며 그것이 쾌락주의 경향을 나타낸 것은 당연하다. 데카르트(Descartes)의 습작 『음악론』(1619)은 그 첫머리에‘음악의 목적은 우리를 기쁘게 하고, 여러 가지 정념을 야기하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예를 들면, 3음절을 좋아하는 근거가 3이라는 숫자의 신비적·상징적 성질에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들어서 기분 좋다는 데 있다. 거기에 근세의 새로운 경향이 있다. 예술과 미를 감성적 인식과 결부시킨 바움가르텐(Baumgarten)의 구상 배후에는 이러한 예술 체험의 변모가 있다. 그러나 감성적인 상태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새로운 시대의 성립 열쇠를 짊어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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