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경(妙景), 시간의 탐구

앤디 워홀은 “시간이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고 하지만, 사실 당신 스스로 변화시켜야 한다.” 라고 하였다. 워홀이 말한 변화와 시간이 가져오는 변화는 사실 다른 차원일 수 있다. 자신의 의지로 일으키는 변화는 시간과 무관하다. 그러나 시간이 가져오는 변화를 그 누구도 거스를 수는 없다. 오죽하면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만이 ‘변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문제는 변화 그 자체가 아니라, 변화의 방향과 변화에 대한 우리의 해석일 것이다.

 

어제의 강물은

흘러가 없고

 

오늘의 강물 속에

나는 있네.

 

태초부터 영원까지

찰나의 쉼도 없이

 

흘러 흘러서 가는

시간의 강물.

 

어제에 미련 두지 말고

오늘을 반가이 맞으며

 

나의 생 하루하루

강물 따라 흐르리.

 

-정연복의 시, ‘시간의 강물’ -

 

                백지상, 묘경(妙景), 42X 60,  나무에 복합매체, 2023 
                백지상, 묘경(妙景), 42X 60,  나무에 복합매체, 2023 

 

필자는 위의 작품을 오래 붙잡고 있으면서 시간과 불과 물이 나무에 미치는 영향을 지켜보았다. 불은 시간을 통해 나무를 숯으로 변형시켰고, 물감의 물을 입은 숯은 시간을 통해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나무인가, 숯인가, 아니면 시간이 변형시킨 작품인 것인가. 그 위에 필자가 조각도와 붓으로 입힌 작은 변화들은 시간 앞에서 감히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워홀이 말한 ‘당신 스스로 변화시켜야 한다’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인가?

시간은 절벽을 파도로 변화시키기도 하고, 파도를 절벽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또한 시간이 가져오는 변화 속에서 나라는 존재는 태어나고, 자라나고, 늙고,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영원 속에서 나는 존재했던 것인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그 변화는 애초에 내가 누구인지, 정체성의 지속성에 대한 의문을 갖게 만든다. 때로는 시간 앞에서 정체성이 극적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나는 신체인가 아닌가. 내가 신체라면, 늙고 병들어서 얼굴이 변해버린 나는 나인가 아닌가. 내가 깎아서 버린 손톱은 나인가 아닌가. 결론은 언제나 ‘나라고 규정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에 이르게 된다.

시간은 주어진 모든 것을 변화시키지만,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변화의 영속성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형태의 이미지를 남기고자 하는 욕망을 갖게 된다. 유한 속에서 무한을 지향하는 것은 예술의 존재 근거이기도 하다.

 

    백지상, 위의 작품 '묘경'의 일부 이미지
    백지상, 위의 작품 '묘경'의 일부 이미지

 

그런데 시간이 흘러 한 도시에 드론과 AI와 운무만이 가득할 때, 우리는 과연 존재할 것인가? 또한 예술은 존재할 수 있을까? 예술은 인간을 넘어서서 존재할 수 있는가?

지금 이 순간 언제나 중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백지상 프로필

상담심리학 박사. 서양화가. 호주국가공인 예술치료전문가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외래교수. 치유예술작가협회(HAA)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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