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용산 국민 품으로
부제: 수도 서울, 보물지도를 품다.

[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한강, <문명의 방>문을 열다.
◦한강 수륙제, <축제>를 잇다.
◦은하수의 전설
- 겸재의 한강화첩      - 한강의 계몽주의
- 껍데기는 가라.       - 버드나무와 소년
- 은하수의 전설, 아라리요

은하수의 전설 STORY
은하수의 전설 STORY

 

 한강, <문명의 방>문을 열다.

한강의 주인은 역사적 테제를 훌쩍 뛰어넘는다. 오히려 금수강산이라고 일컫던 우리의 원형질이 답이다. <문명의 방>에서 만날 명제다. 누가 누구를 굴복시키거나 주도권을 획득했다는 전쟁놀이와는 격이 다른 테제다. 오히려 앞으로 뻗어나갈 기운을 음미하고 감흥하기를 탐원한다. 일찍이 이곳에 터전을 삼아 중심 결을 보듬었던 우리네 조상님들의 <사유>를 위하여 준비하고 보듬는 시간을 요구할 뿐이다.

한성백제니 신라진출이니 고구려 남방한계선이니 하는 수사어는 어찌 보면 오늘 직면하고 있는 버드나무결의 소요보다 작다. 왜 그럴까. 우리 조상님 네들의 사유세계가 넓고 오묘했기 때문이다. <아라리요> 라는 아우라지의 노랫말 결만 받아들인다 해도 <두 물골>의 소요는 우리 민족의 얼결로 매듭짓고 있다. 또는 황해에 소용돌이치는 한강의 소요는 이미 금수강산의 뜻을 품고도 다 하였다. 한양, 한강, 서울의 참 모형은 금수강산일 따름이다.

금모래 뻘 뚝섬의 형상은 6.70년대까지도 아득한 축복의 땅이었고 강이었으리라. 콘크리트 콤플렉스가 낳은 한강의 뒤범벅은 그저 장식품이자 소모품으로 소통되었고 극복대상으로 삼아야 했다. 어찌 되었든 <금수강산>의 한강의 언어를 되찾는 것은 오늘의 숙제다. 왜, <은하수의 전설> 이어야 하는가는 각자의 역량이요 기호이겠지만 나에게는 은하수 별빛만큼 크고 장대한 드라마로 읽혀지고 있다.

그럼에도 <뚝섬 수상법당>은 이야기를 연결하는 단초임을 알게 된다. 효령대군의 <수륙제> 시원세계다. 왜, 이곳 뚝섬마당에서 수륙제를 올렸으며 아득한 문명의 방을 체득시키고 있을까. 역사의 페이지를 초월한 명제를 연결하고 있을까. 삼천대천세계에 유, 불, 선의 고유를 융해한 참 모형은 어떤 것일까. 한 차원 높은 정신세계의 질문과 답을 거듭하다보면 어느덧 금모래 은모래 뚝섬 수상법당의 멜로 음이 다가온다.

물론 자생하고 있는 일곱 그루의 버드나무와 함께. 인사동 쌈지길 앞 버드나무 결처럼, 영등포천 자생 숲 버드나무를 조용히 마주하게 된다. 금수강산 <은하수의 전설>은 우리의 한강이다.

은하수의 전설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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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수륙제, <축제>를 잇다. 

은하수의 전설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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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의 전설

은하수의 전설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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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재의 한강화첩

겸재의 <금강산화첩>은 모든 이의 탄성을 자아낸다. <그리운 금강산>의 울림만큼 자자한 선풍을 일으켰다. 물론 조선팔도 금수강산의 시작점임이 분명해 보이는 이 현상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다. 겸재 아티스트의 촉매는 당연한 결과물을 연결하고 있다. <한강화첩>의 동행이다. 동방의 은자의 나라로 칭송받음은 공자의 읊조림이 아니라 금수강산 예찬이다.

불교성지의 완결판이었던 맥락을 연결하는 겸재의 <한강화첩>은 안타깝게도 장인의 음미로 묶여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강의 멋은 훼절되었거나 도륙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운 금강산과 한강의 기적이 맞교환되어 진면모를 읽지 못한다. 어찌 되었든 겸재의 화두는 유효해 보인다. 동방의 진주처럼 빛나고 있는 한강의 스토리를 읽는 힘이다. 겸재의 <금강산, 한강화첩>의 심혈은 우리 모두가 읽고자 하는 <정수>의 지침서다. 절묘한 금수강산의 파노라마를 읽는 관문이다. 

은하수의 전설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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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의 계몽주의

모래톱과 선상지는 강의 보석이다. 생태계라는 담론을 거론하지 않아도 바다의 섬이다. 그처럼 빛나는 존재다. 모래톱과 선상지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가 한강의 숙제다. 물론 강의 모래톱은 유력한 <파편>을 구현해낸다. 바다의 섬처럼 말이다. 강의 섬돌은 그 자체다. 강의 생명력은 시원지로부터 발현된다. 산의 존재다. 그럼에도 하구에서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바다, 강이라는 명쾌함을 일깨워준다. 대륙과 바다의 언어가 전우주적으로 소통된다. 전우주적 차원에서 성형되었거나 작동되어온 모습이 강의 존재다. 모래톱과 선상지는 물론 기암절벽과 괴석층 하나하나가 <작품>이자 <울림>이다.

강에 인접한 산책길과 문화시설을 살펴보면 아파트와 빌딩숲, 그리고 다리의 요구다. 이 모든 것은 당연한 선언이자 문명이라는 명령어가 수반되었다. 강의 지류 하나하나는 재단되었고 재조립되었으며 매몰되었다. 물론 물길을 조절한다는 이유로 뚝을 쌓았다. 강을 지배하거나 조정하려는 열정은 문명의 척도로 받아들여졌다. 너무도 당연한 수식어가 받아들여졌다. <한강의 기적>이다. 물론 밤의 강빛은 유려해 보인다. 착시지만. 삼심 여개에 다다르는 <한강다리>의 변주곡은 유사상품이 되었다. 앞서 근, 현대화를 도시를 복제하듯 꾸렸다. <착시현상>은 강바람처럼 오싹하게 한다. 사라진 한강의 신화다.

마포나루, 뚝섬, 영등포, 여의도, 잠실은 서울의 중심지였다. 물론 한강의 절정이 지나간다. 절정의 물길은 하구를 향한 용트림과 같다. 양수리에 합수를 받은 한강의 변주곡은 이 모든 지류와 하나가 된다. 황해를 맞이할 도도한 호흡을 다듬는 마당이다. 이곳의 모래톱 선상지는 <강의 소도>다. 이를테면 <절정의 작품>을 내재하고 있다. 이미 사라진 것을 어찌하랴, 라는 푸념은 온당치 않다. 아트라는 명제가 늘 치유를 담당하고 있다. 한강의 계몽적 선언이다.

은하수의 전설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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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껍데기는 가라.

<수륙제> 답사는 공교롭게 승가사, 진관사, 답사와 함께 사유되었다. <한강 뚝섬수륙제>다. 태조는 마땅히 고려의 영혼을 추모해야 했다. 민심의 동향을 넘어 스스로의 정신적 터전을 위해서다. 훗날 세종의 형인 약령, 효령이 수륙제를 직접 봉헌한 곳이 뚝섬 법당이다. 누에고치 형상의 뚝섬 법당은 잠실을 형상화했다. <뚝섬 수상법당>은 여여한 역사의 페이지처럼 숨 쉬고 있다. 그럼에도 법당은 유람선 테제다. 그러기에 잠실, 여의도, 마포, 뚝섬과 연결되는 한강스토리의 일부가 된다. 다만 명제를 잉태하고 있을 뿐이다. 뚝섬 백사장의 신화다.

<뚝섬 수륙제>를 살피면서 유람선 숨소리에 귀 기울여 보았다. 관공서 수준에서 나열한 한강을 읽는 스토리는 유아기다. 오히려 한강을 읽는 시작점이 잘못되어 있다. 애써 많은 주제를 과장하려고 하지만 쓰레기 산을 공원으로 변모시킨 결과물을 자랑할 뿐이다. 한강공원의 비전이다. 눈 부릅뜨고 한강 수자원보호를 완장만큼 떠들썩하지만 한강 찬바람은 고유하다. 수륙제가 뜬금없어 보이는 관공서 스토리는 왜일까. 이미 기독교이념-자연, 환경이념은 공고히 작동되고 있다. 치열한 유일신 이념의 허구를 살필 여유가 없다. 그들 이면에 도사리는 자기비하를 모르기 때문이다. 여하튼 뚝섬의 <수륙제>는 울림이다. 산천의 역사요 한강의 마땅한 숨소리 장단이다. 껍데기 스토리는 가라.

은하수의 전설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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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드나무와 소년

인간의 탐욕과 반성의 합일점은 유럽정신에서 싹텄다. 정복의 대상으로 치부된 <자연>에 대한 경외심은 과학, 유물론으로 침하되었다. 그저 자연을 투과하되 경외할 수는 없다. 이른바 샤먼, 토템, 애니미즘이라는 수사어로 인간의 발자취를 규명하면서 문명이라는 가두리를 옹립한다. 물론 산업혁명이후 자연의 재앙은 강에서부터 대답을 요구했다. 산업, 도시 폐기물은 역할의 중심에 있던 강의 대답에 치명적이었다. 부랴부랴 수습하였을 때 한강의 모습은 오히려 분칠뿐이었다.

쓰레기, 콘크리트를 걷어내면 그뿐이었을 것이다. 유럽문명의 탯줄이 살아있는 한 부작용은 그대로다. 물론 반성의 합일점을 꿰뚫어보면 아직 한강의 전설을 읽을 수 있으리라본다. 요즘 온난화 이데올로기는 산업동력 메카니즘에 대한 논쟁으로 뜨겁다. 그럼에도 <도시의 강>에 대한 <섭리>는 무엇일까 하고 살펴보면 한강의 테제는 말문을 이을 수 없다.

유럽정신과 궤를 같이 하는 이들의 범주는 무엇일까, 도시의 정원 격으로 삼은 강의 존재는 무엇일까. 아마도 신이 빚은 걸작쯤으로 대해도 한강의 <결>은 만날 수 있으리라. 그린피스정신을 읽다, 어린 소년들이 제안했던 고래지킴이 프로그램을 만나게 되었다. 일본인들이 잡아가는 고래를 지키려는 소년결사대스토리다. 소년결사대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고래엽서 판매에 나섰고 유럽정신을 <공명>으로 안내했다. 자연과 인간의 합일점, 즉 <반성>이다. 그린피스의 시작점이 된 이야기는 한강의 숨소리와 만날 수 있을까.

아득하지만 고려의 국수(國樹)는 버드나무다. 고유한 버드나무를 만나는 소년을 기다리기로 했다. 당연히 그들은 시(詩)를 쓸 것이다. 유럽정신의 도구가 아닌 …….
 ■ 은하수의 전설, 아라리요

한강(漢江)의 한자음 뜻이 은하수의 전설이다. 동요에나 만나는 은하수너머~. 의 땅이 한양이며 한성이고 한강이다. 물론 양(陽)의 한 줄기가 한강이다. 한양의 한강은 무엇을 뜻하고 있을까. 이른바 유토피아, 축복의 땅이거니와 신화의 탄생지다. 그럼에도 주저 없이 우리의 선조들은 이곳을 그렇게 받아들였나를 곰곰이 살펴볼 뿐이다.

백악이 고려의 하늘이었음을 선언한 것은 고려-조선이 연결이요 동체라는 관점이다. 수도 서울의 밑돌일 따름이다. 물론 인왕-조선의 아침에서 살필 수 있듯이 완연한 수석 돌 같은 <품격>은 조선백자의 <미>를 마주하듯 숙성되어 있다. 품격 있는 조선의 선비요 염치를 읽을 수 있는 동방의 반석이다. 고려의 귀족 미와 조선의 선비정신이 어우러지면 용의 승천, 봉황의 세계를 꾸려낸 풍광이 서울이다. 목멱의 국사당, 낙산 성균관을 마주하면 유, 불, 선의 합일사상을 이끈 선구자들의 격조를 만감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 밑줄을 치고, 한강의 시원을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각자를 숨김없이 읽어 내림이 온당하다.

일만 이천 봉의 강줄기는 외, 내금강으로 흐르고 흐른다. 동강의 그것이 북한강이요 태백, 오대산의 그것이 남한강의 그것이다. 모든 이들은 일만 이천 봉의 시원지를 알지 못하고 있다. 북에 존재하는 금강산 댐과 동강 댐의 <연결>을 모르고 있다. 단지 오대산, 태백의 시원지를 살펴보며 아우라지 <두 물골>을 읽을 뿐이다.

한강의 시원지를 흠모하며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양수리요 뚝섬이요 황해로 치닫게 된다. 금강, 대동강, 한강, 황해에 하나가 되는 영상을 우리 마음속에 담아 본다. 마치 하늘 켠 은하수 너머의 빛이요 별이다. 그럼에도 뚝섬 아우라지를 <은하수의 전설>로 일컫는 이유가 무엇일까. 아라리요, 아라리요…….

은하수의 전설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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