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용산 국민 품으로
부제: 수도 서울, 보물지도를 품다.

◦<여의주>를 품다.
◦일당스님의 아뜨리에
◦용의 눈물
- 일당의 소망       - 낙산의 감상법
- 사라진 봉우리     - 범 바위      
- 용의 눈물

용의 눈물 STORY
용의 눈물 STORY

 

 <여의주>를 품다.

<종친부 주인을 찾다.> 는 <용의 눈물>의 완결판이자 해독 문장이다. 삼청천을 끼고 오독불, 자리 잡은 종친부는 그저 이씨왕조의 해체 잔여 유구쯤으로 받아들여졌다. 허무하게 무너진 조선왕조의 명예는 오히려 우리 스스로를 붕괴시켰다. 자존감이다. 치열한 근, 현대화속에 우리는 고투하였으며 상실지대를 방치했다. 500년의 정통성을 이끈 우리왕조의 뿌리를 국가차원의 <주격>을 살피지 못했으며 오히려 당연시 했다.

<종묘제례> <조선왕릉> <한국서원> 등 세계유산 등재를 통해 <이씨종친회>를 중심으로 한 <문화 복원>의 깃발은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우리의 원형질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다. 종친부의 <문명의 방>에 대한 등불과 같은 발현은 동방의 등불에 대한 싯구다. 일찍이 동방의 조용한 나라를 일컬었던 타고르 시인의 선엄이다. 종친부, 주인을 찾아야 함은 시대의 사명이다. 식민지와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는 원형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비전은 장대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종친부-조정, 성균관-의정부의 모형은 500년 전 완성한 유교혁명의 근대화였다. 이원집정제의 실험이다. 왕-전문 각료의 역할을 선 순환하는 시스템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존재가치가 극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종친부-종묘, 사직, 제례에 대한 예법을 집행했음을 <문명의 방>의 주체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성균관-용의 눈물의 메타포는 당연해 보인다. 승천의 꿈을 꾸던 우리의 초상이다.

용의 <여의주>는 오히려 우리의 <눈물>이었음을 알고 있다. 아득했던 시원의 세계에서 품어오던 염원임을 예시해 본다.  

용의 눈물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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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당의 소망

<님의 침묵> 만해 한용운의 공간은 많은 젊은이들의 치유마당이다. 물론 교과서 덕분이지만,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선언한 시인의 기념관이 인왕자락이라면, 만해 선사의 자락은 낙산의 성북동 터다. 한 송이 국화꽃과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두 분 모두 시인이었기에 그 울림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윤동주 시인과 한용운 스님이다. 성북동과 낙산을 읽는 문턱일 것이다.

천주교, 불교, 여인의 소망이 융합되어 영근 이야기는 시대의 산물이다. 여하튼 그곳의 실험도 많은 사유의 지층이 요구되지만 아마도 간섭현상은 지속될 것이다. 해프닝이 될지 진정함으로 귀결될지는 모르기 때문이다. 법정스님의 무소유에 대한 <?>이 후학들에 의하여 어떻게 귀결될지 모른다. 물론 천주교 초대추기경이었던 분 역시도 마찬가지다. 세상사가 그렇다. 껍데기 속의 껍데기가 우리를 옥죄고 있다. 그럼에도 안양암과 성북동 일당스님의 스토리는 오히려 <정수>다. 그 자체가 언더그라운드며 피폐한 몸부림의 퇴적층이기에 그렇다. 물론 일엽스님과 일당스님의 아스라함이 근본이다.

낙산의 봉우리는 <달동네> 퇴적층으로 사라졌다. 봉우리의 동쪽 기슭은 질병처럼 산하를 유린하였지만 퇴적층은 섬처럼 부유한다. 대학로의 아우성만큼이나 조심스럽다. 안양암-일당의 작업실은 이미 경매투기꾼의 손에 넘어갔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공유하며 <용의 눈물>을 마주하고자 한다. 

용의 눈물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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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산의 감상법

개방적인 질문을 실험하고 있는 그들은 <낙산> <성북동>의 성격 규정을 닫아버렸다. 놀이기구의 연장선상이거나 매몰된 달동네의 유희정도로. 그들은 <가파치>의 뜨거웠던 가슴을 교신하고 있는가, 에는 의문이 든다. 또는 이구수문의 조형언어와 <DHC>의 경이로운 건축물 조형언어간의 치열한 긴장감을 감지하지 못한다. 물론 <동묘>에 대한 한계다. 동묘와 연결되고 있는 청룡사-안양암-동대의 낱낱이 동대문시장-성북동 비둘기 정도에 그치고 말아 큰 연결에 실패하고 있다.

사회주의적 접근의 테두리는 그저 달동네의 직공들, 이른바 <미싱공>들의 네트워크 존으로 부여하면 된다. 지금의 지방정부가 요구하고 있는 대학로의 연결은 뜬금없다. 하지만 한양도성의 황금지대인 흥인지문-혜화문-병풍바위-삼청동문의 연결은 특별해 보인다. 또는 남산골까지 치닫는 한양도성 둘레길은 식민지시대의 퇴적층과 직면하지만 달동네의 연장선은 사라지고 있다. 낙산의 독보적인 <달동네>성역은 아마도 70년대 동대문시장의 씨앗을 품고 있다.

흥인지문에서 와룡공원까지의 순례길 답사는 지금도 유효해 보인다. 혜화문 육교격의 존재는 아슬아슬한 풍치다.

대학로를 관통했던 청계천지류의 흔적은 성북동 삼선천의 부활을 의미한다. 마치 세검정지류의 홍제천의 직시다. 그렇다면 일당의 아뜨리에 모형은 우리가 만나야 할 지점이 있다. 낙산의 올바른 감상법이다.   

■ 사라진 봉우리

낙산의 나무전봇대는 60년대 축대에 박혀있다. 화석층처럼 켜켜해 보인다. 뒤엉킨 도시 성장과정 같으나 그 자체다. 낙산 정상봉우리는 절단되었을 뿐 아니라 사라졌다. 탐욕스러운 공무원은 그곳을 정원으로 기획했다. 평생 공원조성 책임자였다고 하였지만 무례함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1940년-1960년대 색 바랜 흑백사진이 낙산기념공원 내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작품을 감상하다 봉우리가 사라진 흔적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이곳에 70년대식 아파트구조물이 정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정상봉우리가 절단된 것은 미처 몰랐다. 그럼에도 공원기념관 소장은 정년을 앞두고 이곳에 있으면서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어찌되었든 정상에 알맞은 정원공사를 주문했다. 그저 방치된 나대지는 가슴이 너무 아픈 형국이었다. 공무원은 그저 자신의 기획물로, 시공을 확인한 것은 훗날 일이다. 씁쓸했지만 서운함이 남았다. 전화 한통 자문이라도 얻길 바랬다. 정상봉우리가 사라진 낙산의 상처가 온몸을 휘감았기 때문이다. 사방공사 차원의 정상부위를 살피다보면 구토가 난다.

그럼에도 달동네 시작점으로 낙산 봉우리를 읽다보면 청계천군락의 모습을 추억으로만 삼을 수 없다. 오히려 동대문현상은 한류와 만나고 있다. 수출만이 살길이라던 70년대 아우성이 열매가 되고 뿌리가 된 성전 같은 곳이다. 동대문 이미지는 퇴락될 수 없는 곳이지만 강남의 번화가와 비유할 수 없다. 달동네와 야학의 이미지가 테제처럼 고유해 보인다. 나무전봇대와 사라진 봉우리만큼 그러하다.


   ■ 범 바위

낙산의 준령은 오히려 범 바위와 호흡한다. 아차산 넘어 불암, 수락, 망우리 준령은 분지이거나 뜨락이다. 또 하나의 신령스러운 땅이다. 성북동, 혜화동, 그리고 와룡동의 기운은 오늘날 대학로로 자리매김 되었지만, 삼선교, 삼선천의 지류는 대학로천의 기운을 오히려 지키고 있다. 창경궁, 창덕궁, 종묘의 기운을 담아낸 낙산의 형상은 성균관의 신성미를 지키는 병풍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백악의 삼청전이요 종친부의 기운처럼 낙산의 풍미는 성균관의 존재를 지키고 있다. 혜화문, 흥인지문의 연결을 살피다보면 <범 바위> 쯤에서 좌청룡의 기운을 읽어 봄이 마땅해 보인다. 어찌된 일인지 <말 바위>로 자리매김 된 것이 아쉬운 일이지만 범 바위의 지세는 오히려 삼선천의 아우라지를 담고 낙산의 기운을 떠안고 있다.

일제는 이곳을 경성대학부로 나누고 지금의 <병원>을 세워 땅의 지세는 새롭게 되었지만 낙산의 풍광은 선비들의 뜨락이었다. 와룡의 꿈을 담아내는 고유한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유력한 기업이 성균관대학을 인수하여 변모를 꾀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명맥을 잇는 성장 통쯤으로 읽어 봄이 마땅하다. 여하튼 낙산 정상이 사라지고, 기운을 집중시킬 수 없다. 혜화문길 마저 범 바위-낙산을 두 동강 냈으니 <비보>의 방점이 요구된다. 그러기에 <범 바위>의 기운은 분명 와룡동과 대학로의 뜨락을 연결한다. 

용의 눈물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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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의 눈물

왜, 용의 눈물일까. 월탄 박종화, 세종대왕이 윤색된 드라마 제목이 낙산의 이미지가 되었다. 나름 낙산봉우리에 올라 직감이 적중했음을 확인했다. 용마산 기슭 폐석장 흉터가 보이지 않더라도 아차산, 망우리는 아련한 동쪽 산하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가깝게는 성북동의 잔영과 동묘, 청량리의 주섬주섬 싹을 보아도 달동네의 원조임을 알 수 있다. 일순간에 와작거릴 것 같은 봉천동의 환영이다. 또는 와우 아파트가 무너졌을 때 남산의 외국인아파트 폭파장면이 오버랩 되며 잔잔하게 우리의 근대사를 읽게 된다. 동대문의 신화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24시간, 365일 계속되던 짝퉁 왕국 이었지만 어느덧 한류기획 상품으로 <동대문> 자체가 <브랜드>로 대우를 받는다. 청년들이 삼키는 대학로와 달동네 그리고 동대문 미싱소리로 스토리를 꾸려도 <눈물>은 서글프다.

조선의 아침-인왕산 인왕사의 응변이 무학대사의 산하가 말해주듯, <남산> 격의 구릉지였다. 좌청룡의 기상을 조선 500년간 흠모하였어도 분명 낙산의 기운은 오히려 <봉황>에 가까웠다. 동대문을 수양대군의 포부가 그렇다. <가파치>의 전설이 말해주듯, 흥인지문 밖 그곳은, 만물상처럼 회오리를 치는 난장판이었다.

왜, 해가 동쪽에서 솟구치는지를 알면서도 숭례문의 정 방향을 택하여 국운을 저울질하였을까. 오히려 돈의문과 자하문을 통하여 천하(天下)를 논하였음을 우리는 알고 있었음에도, 남향론(南向論)의 사대주의는 뿌리를 내렸을까.

용의 눈물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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