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한 영혼의 색채가 빚어놓은 마음속 풍경
                        
김종근 (미술평론가)
여기 70대 중반을 앞둔 한 사람의 중년 여배우가 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아주 좋아했다. 하지만 그녀는 1968년 가을, 화가 보다는 운명처럼 배우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중학교 1학년 그때 그녀에게 미술을 가르친 선생님은 다름 아닌 전 서울대 교수이자 조각가인 최종태 작가였다.

삶과 자연  120×61cm oil on canvas 2021

그녀는 오랜 시간을 배우로서 살았지만 그림을 버릴 수도, 놓을 수도 없었다. 바쁜 가운데서 쉬지 않고 열심히 배우 생활을 병행하며 붓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 1990년 드라마 작가 김수현 씨가 그림을 그린다는 걸 알고 드라마 속에 전시회 장면을 만들었고, 그것이 화가 정재순, 그녀의 첫 번째 개인전이었다.

삶과 자연 53×45.5cm oil on canvas 2021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정재순 씨를 화가로서 점점 원숙해져가는 그녀의 작품을 참으로 긴 세월 지켜보며 독설을 날리기도 했다. 개인전이란 작품전을 아주 많이 갖지는 못했지만, 다행히도 한순간 그녀는 그림을 내려놓지 않고 꾸준히 화폭 앞에서 다듬어 왔다. 이번까지 6차례의 개인전을 가지면서 배우와 화가라는 두 사람의 인생을 충실하게 빈틈없이 지키며 살아온 것이다.

삶과 자연 72×72cm oil on canvas  2021

그런 정재순의 화폭 속에는 곰삭은 풍경을 바라보는 철저한 자연주의적인 시선과 맑은 영혼의 순수한 색채가 눈길을 떼지 못하게 한다. 특히 화면에 넓게 펼쳐지는 천리포 수목원과 서울 근교와 안산의 산책로 풍경 등 그의 붓끝에 붙잡힌 풍경들은 때로는 강렬하고 때로는 세련된 필치로 슬프기도 하고 모두 생략되어 쓸쓸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풍경을 대하는 그의 투명하고 맑은 영혼과 그것을 엮어내는 담백한 구성과 편견 없는 시선이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부드러운 들판과 풍경을 경계 지우는 선들은 비단처럼 부드럽고 바람결처럼 유려하며 따뜻하다.

삶과 자연 72x72cm oil on canvas 2021

그림 속 정겨운 풍경들이 그녀의 붓질을 거치면서 보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어떤 때는 마음을 평화롭게 뒤 흔들어 놓기도 한다. 햇볕을 듬뿍 받고 있는 바닷가 풍경은 더욱 인상파 화가들의 화폭처럼 빛에 파묻혀 마치 최쌍중 화백의 그림을 보는 듯 감동과 울림을 준다. 단연 그의 풍경은 빛과 색채에 대한 효과나 연구 보다 감성적인 오랜 연륜에서 묻어나는 색채의 어울림이 더욱 인상적이다.

삶과 자연 90.9×72.7cm oil on canvas 2021

인상파에서 보기 드물었던 거침없는 색채의 펼침, 밝고 선명한 색채들이 부딪치며 분출하는 하모니는 오랜 경륜이 아니고는 절대 쉽지 않은 내공이다. 마치 '그늘은 빛에 가려진 것이 아니라 빛이 변화된 것'이라는 경구처럼 빛나는 부분에서 그림자까지 경쾌하게 정재순 작가는 섬세하게 되살려내는 역량을 보여준다. 특히 그러한 기교는 더욱 바닷가 풍경과 꽃들이 어울리는 대작 등에서 생동감 있게 되살아난다. 단순한 형태로 정리된 붉은 꽃과 튤립의 생김새, 그 단순한 형태 속에 주저함이 없이 곁들인 두드러진 색채, 이 모든 것들이 정재순 작가의 매력으로 집약된다. 그리고 그 풍경들도 단조로울 정도로 간결하지만,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에서 그들은 온화하게 화해한다. 찬란하게 핀 꽃을 찾아다니며 얻은 강렬한 색상의 느낌들이 결집된 풍경은 그래서 아름답기도 선명할 정도로 클림트의 풍경화 같은 경험을 우리에게 준다.

삶과 자연 91×91cm oil on canvas 2021

그런 이유로 정재순의 화폭은 누가 보아도, 언제 보아도 좋은 그림, 마음 편히 즐겁게 볼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하는 그림임은 분명하다. 절대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을 고집하지도, 무작정 상상력과 감각에만 의존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화면은 능히 서정적 추상화가로 불릴 만하다. 그 예로 단색이나 갈색으로 설정된 풍경화 작품들에 주목해 보자. 들녘에 아니 바다처럼 아득한 배경 오른쪽 혹은 왼쪽, 고독하고 쓸쓸하게 서 있는 한 그루 나무는 마치 작가의 자화상처럼 은유적인 느낌으로 외롭지만 꿋꿋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 작은 스케치만으로도 작가가 일상의 삶 속에서 종종 거닐었던 자연 속의 풍경을 어떻게 꾸밈없이 담백하게 어떤 때는 뜨겁고 강렬하게 심경을 쏟아내는지 분명해진다.

삶과 자연 130.3x162.2cm oil on canvas 2021

작가는 노트에서 아주 솔직하게 “자연 속의 모습들, 꽃들의 모습, 안개가 자욱한 수목원의 아름다움과 나의 삶의 일부들을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내 마음의 붓질로 채워갔다. 실제의 형태가 나에게 남긴 흔적들의 느낌을 점, 선, 색, 면으로 단순하게 풀어 서정적이면서 강렬함을 표현하고 싶었다.”라고 진솔하게 고백했다.
이처럼 그녀의 그림은 자신의 독창적인 언어를 풀어내는데 최고의 가치를 두고 있었다. 그래서 정재순의 그림은 비록 보편적인 화풍이긴 하지만, 부드럽고 서정적 풍경을 안정되게 화폭에 담아낼 수 있었다. 사실화처럼 구체적이고 세밀한 부분에 연연하기보다 다소 거칠고 과감한 붓질이지만 굵은 붓 터치로 그의 눈에, 가슴에 새겨진 풍경의 표출에 열중했던 이유가 분명 해진다. 또 하나 그의 작품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조형적 특징은 많은 색채를 사용해서 자연을 드러내기보다는 엄선된 색채만으로 회화의 구성을 완결한다는 점이다. 화면 전체에 양식으로 보면 몇 가지 빛깔만으로 한 작품을 완성하는 함축된 색채화가, 절제된 색면화가처럼 그녀는 보인다.

그러기에 정재순 작가는 장식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자연스럽고 거스르지 않는 평화로운 공간에 색채를 담아내는 화가로 정의된다. 어쩌면 붉은색 한 톤으로 완성된 추상적인 풍경화, 회색 분위기 하나로 충만하게 채워진 시각적 추상화. 온전하게 자신의 감정을 빠뜨리지 않고 그 감정을 기조로 거치름과 온화함을 함께 되살리는 화가라는 칭호가 더 정확하다. 안정적인 각도와 풍부한 색채를 아우르고 섞어내는 색채의 감성은 우리를 오래도록 그의 화폭에 머무르게 하는 가장 유혹적인 부분이다. 작품 전편에 흐르는 기법과 테크닉, 즉 강약이 어우러진 세심한 붓 터치를 통해 풍경과 꽃을 담아내며 보는 이의 눈에 호소하는 시각적 효과와 마음에 호소하는 작가 그녀가 바로 정재순이다.

삶과 자연116.8x91cm oil on canvas 2021

무엇보다 그녀의 작업실에서 본 작품들은 그가 얼마나 “변함없이 그림에 대한 올바른 자세와 개성, 그리고 혼이 내재 되어 있는 그림, 그것이 내 그림의 생명력이다”라고 절규한 발언을 떠올리면 그림이 주는 울림만큼 그의 배우로서의 삶과 화가로서의 삶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가슴에 오랫동안 묻어두게 한다. 그림이 주는 감동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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