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아트’와 ‘미래아트’ 사이에서
심은록 (리좀-심은록 미술연구소 소장, 동국대 겸임교수)

[심은록 미술평론] ‘결 Gyeol’의 화가 한홍수는 1992년 도불, 독일 신표현주의의 거장, A. R. 펭크(A. R. Penck)의 수업을 듣기 위해 2년 반 동안(1996-98), 파리에서 쿤스트 아카데미(뒤셀도르프)까지 12시간의 왕복을 기꺼이 했다. 펭크는 그에게 미술의 자유로운 정신과 내면 깊은 곳을 분출할 수 있는 정신을 승계했다. 이후, 한홍수는 프랑스를 거점으로 유럽, 한국, 미국(뉴욕, 워싱턴 D.C.), 등을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유네스코 70주년 기념전 (파리 유네스코 본부, 2015), 2016년 ‘광주 비엔날레 특별전’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2016), 'Dive into Light, 제 8 회 광주디자인비엔날레-제 18 회 광주 FINA 세계수영선수권대회 기념전(광주, 2019)을 비롯하여, '母·海·地' (해남 행촌미술관, 2019), '산 깊은 모양 (령)' 순회전 (영은미술관, 2019), 등, 수 십 회의 개인전과 단체전을 개최했다.

한홍수(HAN hongsu),결3(Gyeol),227.3x181.8cm,oil on canvas,2021

‘살결, 나뭇결, 물결, 숨결, 어느 결, 잠 결, 결맞는 상태(coherent state)…..’
순수 한국어인 ‘결’은, 인체, 식물, 무생물, 하물며 양자역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많은 분야를 포괄한다. 유기체가 되기 전의 ‘기관없는 몸’(CsO)처럼, 적용되는 곳마다 미묘하고 신비한 뉘앙스를 주기에 외국어로 번역 불가능한 낱말 중의 하나이다. 한홍수 작가는 캔버스 위에 여러 겹의 투명한 레이어를 겹치는데, 두께가 거의 느껴지지 않기에 ‘층을 쌓는 것’이 아니라 ‘결을 이룬다’. 때로는 형태들 사이로, 때로는 겹쳐질수록 투명해지는 레이어의 투명성 사이를 비집으며 결이 흐른다. ‘결’은 공간적으로는 켜를 지으며 풍경, 인체, 사물의 무늬를 만들고, 시간적으로는 미처 의식하지 못한 시간의 흐름을 재현한다. 수평적 ‘결’은, 한지처럼 수 겹이 겹쳐졌음에도, 먹물이 닿자 마자 결을 따라 번져 나간다. 한홍수는 캔버스 위에 유화 혹은 아크릴로 이러한 결을 흐르게 한다. 한국에서는 이처럼 흔하디 흔한 그러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결’을 발견하고, 여기에 수 십년 간을 집착해 온 작가가 바로 한홍수이다.

한홍수(HAN hongsu),결1(Gyeol),227.3x181.8cm,oil on canvas,2021

‘층’에서 ‘결’로
서구는 신화시대에도 위계적인 신들 간의 다툼이 끊이질 않았고, 플라톤에 의해 영혼이 분류될 때도, 신적, 인간적 동물적인 영혼처럼, 층의 개념이 지배했다. 단테의 『신곡』(神曲 La Divina Comedia)에서도 지옥 9층, 연옥 7층, 천국 10층으로 나뉘고, 생물 분류도 ‘종 속 과 목 강 문 계’처럼 주요 8개 계급으로 분류된다. 계몽주의와 민주주의의 도래로 이러한 ‘층’의 개념이 약화된 듯 했으나, 프로이트는 결정적으로 다시한번 ‘이드 id, 자아 ego, 초자아 superego’ 등 인간의 (무)의식 구조를 분류하여, 지금까지 정신 분석학에서 뿐만 아니라 예술, 문화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러한 층을 해체하기 위해, 니체는 망치를 들었고, 푸코는 광기를 도입하고, 데리다는 ‘해체’라는 무기를, 그리고 들뢰즈는 프로이트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안티 오이디푸스』를 집필하며 열심히 리좀도 가꿨다. ‘층’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고고학보다는 덜 위계적인 ‘계보학’이, 산보다는 좀더 평평한 ‘고원’이, 그리고 ‘주름’ 등의 개념도 등장했다.
반면에, ‘결’은 수평적인 뉘앙스로, 때로는 나뭇결처럼 시공간의 미세한 순서가 드러날 때도 있고, 물결처럼 파도가 높아질 때도 있지만 금새 다시 가라앉기를 무한히 반복하며, 위계적 의미가 무화된다. 동양화의 화선지도 마찬가지다. 수 겹이 겹쳐졌음에도, 먹물이 닿는 순간, 먹은 계단에서 내려오는 물처럼 그렇게 쏟아져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화선지의 결을 따라 번져 나간다. 한홍수는 캔버스 위에 유화물감으로 혹은 아크릴로 수 회에 걸쳐 레이어를 만들며 작업하지만, 그의 독특한 테크닉 덕분에, 캔버스 위에 안료의 두께가 쌓여 ‘층’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래(처음)의 레이어도 보이는 ‘결’의 느낌을 가능하게 한다.

한홍수(HAN hongsu),결4(Gyeol),227.3x181.8cm,oil on canvas,2021

마크 로스코 (Mark Rothko)의 색면추상은 이러한 의미에서 정말 미묘한 위치에 서있다. 로스코의 색면회화를 처음 볼 때는 ‘결’의 느낌이지만, 가만히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색의 층들이 서서히 드러난다. 마치 빛이 입자와 파동으로 움직이는 것을 동시에 보는 듯한 현기증이 일어난다. 한홍수의 최근 작에는 근경에 있는 사람의 신체가 중경에서 산과 계곡으로 변형되어 가다가, 원경에서 카오스 속으로 사라지곤 한다. 로고스적인 ‘층’의 논리로는 불가능한 카오스적인 ‘결’의 논리이다. 이러한 <결>연작은 어느 산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몽유도원도>를 좋아한다는 그의 작업에는 ‘원근법’적 접근이 아니라, ‘산점투시법’(散點透視法)이고, 무엇보다 ‘자연 투시법’이다. 즉, 인간에서 자연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나 사물에서 인간을 보려는 노력이며, “사물의 편”에서 사물을 보려는 프랑시스 퐁주의 노력과 같다. 

힐링아트와 미래아트 사이에서
한홍수의 작업은 두 방향을 지향하고 있는데, 우선은 현대의 문제를, 즉 상처를 파헤치며, 현재를 진단하고 문제화하는 것(<무제-CsO>, <기원의 뒷면>과 같은 작업)이며, 두 번째는 ‘결’ 작업을 통해 사람과 자연의 대화와 소통을 통한 ‘치유’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pro(親)-들뢰즈’(<무제-CsO> 연작)이자 동시에 ‘anti(反)-들뢰즈’(<결>작업)이다. 그가 발견한 ‘결’은 ‘층’과 비교/대비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결’은, 어떤 의미에서는 ‘anti-plateaux’ (반 反 -고원)이다. 사실, 들뢰즈의 사상에 업혀가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작가나 비평가에게는 세계적인 ‘결을 따르는 것이라’ 비교적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 거대한 사상과 이를 바탕으로 구축된 영토(들뢰즈가 싫어하지만, 어느새 코드화되고 재영토화 된)를 탈주하려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어서, 마치 ‘결을 거스리는 것 같다’. ‘숯의 화가’ 이배가 흔하디 흔한 청도의 숯을 파리에서 재발견 했듯이, ‘결’은 한홍수 작가가 오랫동안 고민하고 실험하여 재발견해 낸 한국의 고유한 개념이자 실천양식이다. 미술사적, 문화적, 사상적으로 ‘층’과 비교할 수 있는 ‘결’의 재발견은 디지털 개념이나 물질과도 잘 어울려, 디지털 원주민들에게도 반가운 소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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