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근대적 의미의 미술시장이 출현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저자는 영국 런던에서 발행된 ‘더 그래픽(The Graphic)’ 1909년 12월 4일 자에 실렸던 삽화를 보여준다. 한양에서 중절모를 쓴 한 외국인 신사가 조선백자 항아리를 들고 조선인 상인들과 흥정을 하고 있다. 갓을 쓴 조선인 상인 2명은 짐짓 여유를 가장하고 있다. 그 가격엔 팔 의향이 없다는 듯한 포즈다. 몸이 단 쪽은 서양인으로 보인다. 서양인들이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사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상인들이 알아차린 것 같다. 낯선 서양인의 출현이 신기한지 코흘리개 동네 아이들이 현장을 빙 둘러싸고 있다. 개항 이후 서양인의 등장이 ‘은둔의 나라’였던 한국의 미술시장에 끼친 영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양화가가 조선사람을 스케치하고 있다. 이 삽화는 영국 런던에서 발행된 주간 화보 신문 ‘더 그래픽(The Graphic)’ 1894년 10월27일 자에 실렸다. 푸른역사 제공

‘미술시장의 탄생’에서 저자는 우리나라 미술시장이 전근대적 성격을 벗어나 근대적인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으로 이행한 시점을 이처럼 개항기라 설명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고미술품으로 인정받는 ‘미술로서의 고려청자의 발견’이 이뤄진 것도 개항기이고, 갤러리의 전신인 ‘지전’과 ‘서화관’ 등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개항기라는 것이다.

책에선 개항기(1876∼1904)를 비롯해 일제 ‘문화통치’ 이전(1905~1919), 문화통치 시대(1920년대), 모던의 시대(1930년대~해방 이전)의 세세한 풍경을 보여주며 미술시장 형성사를 설명한다.

 개항기는 1876년 일본과 강화도수호조약을 맺은 것을 기화로 구미 여러 나라와 통상조약을 체결하며 봉건적 사회질서를 타파하고 근대적인 사회를 지향해가던 시기다. 서양인들이 외교, 선교, 사업 등 여러 목적으로 들어왔고, 이들은 미술시장에 새로운 수요자로 참여했다. 화가들은 서양인의 취향과 목적에 맞춰 ‘수출화’라는 풍속화를 개발해 만들어 팔았다. 중개상들은 서양인들의 동양 도자기 애호 취미를 눈치채고 무덤에서 꺼내진 옛 도자기와 토기들을 몰래 거래하기 시작했다. 이뿐 아니라 서양인들은 민속품을 수집해 고국의 민족학박물관에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 청나라와 교역이 늘어남에 따라 상하이를 중심으로 번성한 해상화파의 감각적이고 실용적인 화풍이 한국으로 넘어와 유행하게 된다. 고종의 근대화 의지에 따라 신식학교가 생겨나고 전차가 놓이고 신분제가 폐지된 달라진 세상에서 청나라의 감각적이고 세련된 화풍은 사랑을 받았다.

‘문화통치’ 이전(1905~1919) 시기에 일본인은 한국 미술시장을 장악했다. 러일전쟁 승리 후에는 완전히 일본 세상이 된다. 자국에서 기회를 잡지 못한 일본인들이 물밀 듯이 조선으로 밀려들었다. 일본인 상인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개성에서 도굴된 고려자기를 거래하기 위해 경매와 골동품상점이 서울(경성)에서 차례로 문을 연 시점이 1906년이라는 사실은 그래서 시사적이다. 공식적인 식민지 전락은 1910년의 경술국치이지만 이처럼 미술시장에서 체감된 일본의 지배는 5년 앞섰다는 것이다.

‘문화통치’ 시대(1920년대)는 근대적 미술시장이 본격화했다. 문화통치의 산물로 1922년부터 조선총독부가 주최해 시작된 조선미술전람회는 1920년대를 ‘전람회의 시대’로 불리게 했다. 민간에서도 최대 미술단체인 서화협회가 주최한 서화협회전람회가 1921년부터 시작했는데, 여기에 관전인 조선미술전람회가 가세하며 전람회는 보편적인 미술 관람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됐다. 개인전도 활발하게 열렸는데, 일본 유학파 2세대에 의해 서양화 개인전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모던의 시대(1930년대~해방 이전)에는 백화점 갤러리, 본격 상업 화랑이 출현했으며, 이 시기 미술품은 본격 투자의 대상이 된다. 금광 개발, 주식거래 시대의 개막과 함께 미술품 역시 적절한 시점에 팔아 차익을 실현할 수 있는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전근대 시대에는 없던 이런 투자심리가 기저에 흐르며 경성미술구락부 등 미술시장은 번창했다. 한국인 수장가와 문화 중개상이 미술시장의 전면에 등장한 것도 1930년대다. 한국인 수장가층이 부상하는 과정에는 고려자기와 조선백자, 서화 등이 지켜야 할 민족정신의 기호로 상징화되어 수집이 장려된 시대적 분위기도 작용했지만, 근저에는 경제적 욕구가 깔려 있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미술이 상류층의 문화로 본격 자리 잡게 된다.

독자는 근대사의 이면을 미술이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보며, 격동의 한국 근대사가 미술시장도 비켜나지 않으며 빛과 그림자를 남겼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박태해 선임기자 세계일보 & 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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