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육상회합 장소 -

봉서동 마을과 '전일봉수대(全日烽燧臺)' 쪽에서 본 회령포성(會寧浦城)

15백 년이란 길고도 오랜 세월을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숲속에 잠들어 있는 허물어진 돌성(石城)이 있다. 전라남도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 봉서동 마을 뒷산, 190.1m 봉우리에 자리잡고 있는 삼국시대 때 축조된 회령포성(會寧浦城)’이다.

돌성(石城) 아래 봉서동 마을은 압해정씨(押海丁氏) 영광파(靈光派) 정경영(丁景英)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아가고 있는 집성촌이다. 정경영(丁景英)은 이순신 장군의 종사관이었던 정경달(丁景達)의 둘째 동생으로, 그 제각(祭閣) 옆과 마을 정자나무 밑에 고인돌(支石墓) 2기가 남아 있어 선사시대 사람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회령포성서쪽 매봉산(鷹峯山 667.5m) 남쪽에는 조선시대 통신수단으로 이용했던 전일봉수대가 있고, 서남쪽으로 장흥 천관산과 억불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쪽으로 보성만이 펼쳐지고 그 너머로 고흥 팔영산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고지도를 통해 본 전라지명연구(국립중앙도서관 발행)’신증동국여지승람 장흥도호부의 고적 항목에 회령폐현의 읍치가 장흥도호부의 읍치 동쪽 32리에 있다고 나오는데, 보성군 회천면 회령리 일대를 가리킨다. 회령리 바로 서쪽의 봉강리에는 일림산(627.8m)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약간 솟아난 봉우리(190.1m) 정상을 둘러싼 테뫼식의 석축산성인 회령포성이 있다. 생활면으로부터 높지 않으면서 회천면의 주요지역이 한눈에 조망되어 통치성으로서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고 적고 있다.

전남일보(20161125) 이순신의 마지막 육상회합 장소 에서 회령포성은 보성군 회천면 봉강리를 지나 전일리와 접경지 4부 능선에 아직까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숲으로 가려져 온전히 남아 있다. 이를 보성사람들은 회령성이라 부르고 있다. 보성 회령성은 이순신의 마지막 육상에서 회합 장소이고 유진 장소이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960, 높이가 10자이고, 안에 샘이 1개가 있다. 오늘날 남문 터 출입구 부분에는 대나무 숲이 무성하게 자랐다. 산록 4부 능선에 자리한 성곽은 자연석을 이용하여 하단부는 1m가 넘는 큰 돌로 쌓고, 30~50cm 크기의 돌로 자연석 막돌 쌓기로 되어 있다. 조선 수군들이 수시로 모여 회합하는 곳이 회령이다. 회령포성은 정유재란 기간 중 이순신 장군의 비밀 식량창고였다.’ 라고 보도했다.

국립중앙도서관 고전운영실 이기봉 학예연구사는 보성 회령포성(會寧浦城)삼국시대 때 축조되었으며 회령현(會寧縣)을 다스리기 위한 통치성(統治城)으로 기반을 파보면 조선시대 쌓은 성보다 더 튼튼하게 잘 쌓았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단단하게 쌓은 돌성은 어느 시기에 허물어졌을까. 이기봉 학예연구사는 몽골의 고려침입 때로 보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28년 동안 아홉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인의 생활사를 바꿔놨다. 고려 고종은 해전에 약한 몽골군과 싸워 이기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고 항전하였으나 물리치지 못하고 결국 강화산성을 허물라는 몽골의 강압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몽골은 기마민족으로 평야 전(平野戰)에 강하고 바다와 산악전에 취약하므로 고려군이 산성에 진지를 구축할 경우를 우려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때 축조된 성들은 그 시기에 무너졌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회령포성(會寧浦城)’은 봉서동 마을에 남아 있는 지석묘와 같은 사적(史蹟)이자 문화유산이다. 삼국시대 때 쌓았으며 고려시대 몽골 침입으로 허물어졌고,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육상회합 장소로 이용되었던 사실을 고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성안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토기조각과 기와 조각을 한성백제박물관토기전문가는 삼국시대 때 사용되었던 것이라 했다. 조상들의 얼이 담겨있는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15백여 년을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화재청은 이제라도 회령포성(會寧浦城)’을 지방문화재로 등록하고 복원하여 후세에 넘겨줘야 할 것이다.

성의 기반과 허물어져 있는 자연석
성 안에서 발견된 깨진 토기와 기왓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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