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인사동에 위치한 경인미술관 제2관에서는 201944~49일까지 김정남, 김태호, 류오현, 배철지, 이창수, 정병석, 이희경 작가의 황칠공예 7인전이 열리고 있다.

황칠공예 7인전

황칠공예, 을 열면서

이번황칠공예, 은 목칠공예 소명 류오현 작가와 김태호 작가, 황칠명장이며 연구가인 정명석·배철지 작가, 도공 토화 이창수 작가, 불화 현소화 이희경 작가, 서예 벽암 김정남 작가가 황칠이라는 공통분모를 토대로 하나의 예술의 장을 꾸몄다.

황칠공예 7인전

황칠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좀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옻칠에 대하여는 이미 잘 알고 있으나 황칠은 그렇지 못했다. 에는 옻나무에서 채취된 것으로 하는 옻칠과 황칠나무에서 채취된 것으로 하는 황칠이 있는데, 이 둘은 전혀 다른 수종으로 옻칠은 검은색 도료이고 황칠은 황색 도료이다. 그렇지만 모두 전통적으로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후손에게 전승해야할 귀중한 자산이다. 그래도 옻칠은 잘 전승되어 오랜 역사 속에서 그 명맥이 잘 유지되고 있는 가장 매력적인 대표적 도장塗裝재료이다. 지금은 공예장식이라는 범주를 넘어 회화의 영영에까지 확장되고 있다. 그런데 황칠은 그렇지 못했다.

황칠공예 7인전

황칠을 채취하는 황칠나무는 우리나라 남부지방인 제주도·완도·대흑산도·어청도 및 경상남도 일부지역이 주산지이다. 이 황칠의 맥이 20세기 초까지 어어 오다가 이후 명맥이 끊어졌는데, 최근 전라남도 일부 지자체의 관심과 소수의 전문가, 장인들의 지속적인 노력과 특히 황칠나무 자생지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완도군의 적극적인 지원에 의해 황칠이 새로운 소득사업 등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런 가운데 완도군의 지원과 동 지역의 황칠장인 및 소명작가의 열의에 의하여 이번황칠공예, 이 어렵게 결실을 맺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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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칠에 대한 역사적 기록

황실에 대한 역사적 사료를 간단하게 살펴본다. 정병석의 천년의 신비 황칠나무와 배철지의 완도황칠을 참고 하였음

황칠공예 7인전

먼저 우리나라의 첫 기록은 삼국사기보장왕 4(645)조에 처음 등장한다. 당태종이 명장 이세적을 선봉으로 삼아 요동성을 함락시킨 기록에백제는 금 옻칠한 갑옷인 금휴개金髹鎧를 바치고 군사를 파견했다. 태종이 이세적과 만날 때 갑옷의 광채가 햇빛에 번쩍거렸다三國史記-高句麗本紀보장왕4(645) “時百濟上金髹鎧, 丈以玄金爲文鎧, 士被以從, 帝與勣會, 甲光炫日

라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에서금 옻칠은 황칠을 말한다. 이러한 한반도에서 황칠이 생산·활용되었다는 것이 2007년 경주 황남동 통일신라시대 유적지에서 황칠이 담긴 항아리가 출토되면서 입증되었다.

황칠공예 7인전

우리 황칠에 대한 중국 쪽 기록으로는 당통전通典백제 서남지방 바다 가운데 세 섬에서 황칠이 나는데, 6월에 백류白流를 채취하여 기물에 칠하면 금빛과 같아서라는 기록이 있고, 책부원구冊府元龜에는당 태종이 정관貞觀 19(645)에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금칠을 채취해서 산문갑山文甲에 칠하였다하였고, 북송 손목孫穆계림유사鷄林類事에는漆曰黃漆이라 하여 고려에서는 칠이라 하면 황칠을 말하였다. 계림지鷄林志에는고려 황칠은 섬에서 난다. 6월에 수액을 채취하는데 빛깔이 금과 같으며, 볕에 쪼여 건조시킨다. 본시 백제에서 나던 것인데, 지금 절강浙江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신라칠新羅漆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한반도의 황칠나무는 중국황실 등 중국에서 더 잘 알려졌을 정도로 한반도 황칠의 가치가 최고로 인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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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황칠과 관련된 사료로 조선후기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백제 서남해에서 나며 기물에 칠하면 황금색이 되고 휘황한 광채는 눈을 부시게 한다라고 하였고, 고려사에는 에 황칠을 조공으로 바쳤다는 기록이 여러 번 나타나고, 高麗史世家 卷第二十八 癸丑 遣中禁指諭金富允如元, 進黃漆, 且請明年入朝鋪馬及草料”/世家 卷第二十九 戊申 遣佐郞李行儉如元, 進黃漆.”

송나라 서긍의 선화봉사 고려도경에는 황칠이 조공품으로 기술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천전의遷奠儀에서 황칠한 제기祭器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朝鮮王朝實錄, 세종 23(9.14) “紫黃漆木簪釵各一숙종 44(2.17) “黃柒木簪釵各一

황칠공예 7인전

, 정조 때 기록에는 황칠이 진상품 등으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백성들에게는 과중한 민폐가 되어 백성들이 이 황칠나무를 훼손하기 시작하면서 황칠이 점점 사라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朝鮮王朝實錄, 정조 18(12.25) “---莞島黃漆, 限十年除減事, 今因營邑誅求, 乃以所産之地, 反有難繼之憂, 寧不寒心乎? 營邑所納, 一竝限十年權減, 雖於十年之後, 以其間長養之如何及嚴立科條之如何, 論報本司, 然後始許復舊爲宜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서 황칠의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고 그 수요가 증가되어 갔음에도 불구하고 실생활에서는 점점 멀어져 가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었던 것이다.

황칠공예 7인전

. 황칠의황색에 미학적 고찰

황칠이 가치를 인정받게 된 것은 도료로써의 가치와 더불어 황칠의 독특한 미감과 상징적 의미 때문이다. 2016년경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오방색과 관련된 염색체험을 하면서 외국인들에게 적색, 자주색, 황색을 준비해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색을 염색하도록 했는데 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색상이 황색이었다. 황색은 인류 보편적으로도 누구나 좋아하는 색상이다. 실질적으로 황금색은 언제 보아도 실증이 나지 않고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중국은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에서 중국을 대표하는 색상으로 황색을 내세우며 세계의 중심으로서의 국가적 이미지를 세계인에게 보이고자 황색을 적극 활용한 바도 있다.

황칠공예 7인전

그런데 서양에서는 황색에 대하여 부정적이었다. 즉 황색은 일반적으로 조심의 뜻을 지니는 색으로 인정되어 교통 표지판이나 방사능 표지에 사용되고 있으며, 불신이나 경박을 상징하기도 한다. 즉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는 다는 조건하에서황견계약(Yellow dog contract)’이라 부르고, 친기업 노조를 황색노조라 하며 선정주의 저널리즘을황색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이라 하고, 노랑장미의 꽃말이 질투나 부정不貞의 의미로 사용하여 부정적 의미를 띠고 있다.

황칠공예 7인전

동양에서 황색은 사상적, 미학적, 공간개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음양오행설에 금, , , , 의 오행 중에서 토는 중앙이며 만물의 근본이다. 이는 지고무상의 권력을 상징한다. 그래서 황제와 관련된 궁전 및 물품의 경우 황색을 띤다. ·청대의 자금성 지붕이 온통 황색을 띠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말기 대한제국이 선포되어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12장복 황색 복장을 입었다. 이는 대한제국이 중국의 제후국이 아닌 주체성이 있는 국가로서 만천하에 알리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이 황색은 또한 결실의 색으로 그 안에는 생명력이 있다.

황칠공예 7인전

즉 황색은 생명의 토양인 흙의 원초적 색채이며 새 생명을 준비하는 색이다. 그리고 이 황색을 중심으로 주변에 적, , , 백이 포진한 오방색이 있는데, 이 오방색은 동양예술의 기본 색상이다. 모든 사상과 예술적 가치를 이 황색을 중심으로 한 오방색의 조화로운 배치와 조합에 의해 독특한 미감을 창출했다. 이와 같이 동양은 서양과 다르게 황색에 대해 절대적이면서 특별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였다.

황칠공예 7인전

그리고 동양사상의 핵심은 중화中和인데, 이 황색은 중화사상과 부합되는 색상이다. 중용中庸』「천인론天人論에서 中庸』「天人論, “喜怒哀樂之未發, 謂之中, 發而皆中節, 謂之和. 中也者, 天下之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致中和天地位焉萬物育焉.”

황칠공예 7인전

중화란 어느 한편에 치우침이 없이 온당한 일 또는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알맞은 것이다. 중화를 이루면 천지가 바른 위치에 놓이고 만물이 잘 자란다 하였다. 음양오행설에서 황색黃色은 중앙에 있으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도 주변의 모든 요소를 조화롭게 하는 역할을 하고, <주역周易 곤괘坤卦 문언文言> 周易』「坤卦, 六五 黃裳元吉 象曰黃裳元吉 文在中也 文言曰君子黃中通理 正位居體 美在其中而暢於四支 發於事業 美之至也

에서는 군자가 중앙에 있으면서 이치에 통달하여 자리를 바로잡고 몸통부분에 거처하고 있으면 그 아름다움이 그 가운데에 있고 사지四肢에까지 창달하여 사업이 발휘되어 아름다움이 극치에 이른다고 언급되어 있다. 이는 중국의 중심사상인 중화사상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즉 황색을 중심으로 주변의 색이 조화롭게 바른 위치에 서고 잘 자라나 모자람이 없이 그 중화적 가치를 실현하고 이에 따른 그 아름다움이 극치에 달아, 진선진미盡善盡美하고 문질빈빈文質彬彬한 최고의 미적가치를 창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황칠공예 7인전

. 황칠공예, 에 부쳐

황칠은 역사적으로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사료를 통해 알 수 있다. 갑옷에 황칠을 칠하여 사용하여 권력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우, 옻칠 백년 황칠 천년이라 할 정도로 방부재 역할을 하는 도료로 사용하는 경우, 미적 감각을 더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경우, 의학적 효능과 신경안정을 위한 향료로 사용하는 경우 등 다양한 용도로 황칠이 사용되었다. 특히 황칠이 도료로 사용되는 경우 그 사용되는 기물의 재질은 종이, 나무, 도자기, 금속, 비단 등을 가리지 않고 활용될 수 있다. 또한 황칠은 천연투명 도료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황색의 도료와는 다른 투명하고 아름다운 특별한 미감을 띤다.

황칠공예 7인전

이러한 황칠의 특별한 가치를 이용하여 이번 황칠전은 황칠의 미적, 예술적 가치에 비중을 두어 미감을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특히 이번 전시는 우리의 전통색상인 오방색에서와 같이 황칠을 중심으로 장르가 다른 일곱 작가의 작품을 오늘의 대중들의 미감에 맞추어 통일성 있으면서 새로운 미감으로 작품을 구성하고자 하였다. 참여하는 작가는 목공예 작가, 도자기 작가, 불화 작가, 서예 작가, 황칠명장 등이 같이 하여 전시를 꾸몄다. 전혀 다른 성격의 작가들이지만 황칠이라는 소재를 통하여 때로는 독립적으로 때로는 콜라보 형식으로 황칠의 본래적 가치를 새로운 미감으로 창출하고자 다양한 모색을 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황칠은 역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그 독특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완도군에서 자생하고 있는 황칠나무로부터 직접 채집한 것이다.

황칠공예 7인전

이렇게 황칠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전이 완도군의 적극적 지원으로 열리게 된 것에 대하여 먼저 감사함을 표한다. 이번 전시를 통하여 첫째, 세계적으로 유일한 우리나라 전통 황칠의 가치를 재조명하고, 둘째 그동안 맥이 끊기어 사장되어 가고 있는 황칠문화를 되살리는 기회로 삼고, 셋째 황칠의 가치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발판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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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황칠을 소재로 한 전시가 있기까지는 황칠의 가치를 발굴하여 열악한 환경 속에서 황칠연구에 앞장서 주신 많은 분들이 있지만 그중에서 특히 배철지 선생님과 정병석 명인님에게 감사드리고, 이번 전시에 활용된 황칠을 직접 추출하여 제공해 주신 김준거 완도군황칠나무생사잔협회장에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번 전시는 완도군과 이러한 많은 분들의 노력과 노고의 결실로써 황칠이 예술로서 승화되어 많은 대중들에게 선을 보이게 되었다. 참여 작가들은 아직도 부족한 면이 많고 열악한 가운데 최선을 다했다. 미력하나마 이번 전시를 통하여 황칠의 가치가 더욱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하고,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인 황칠이 우리 후손들에게도 잘 전승되어 나갈 것으로 믿고 더욱 열심히 노력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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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칠공예, 참여작가

소명 류오현, 범중 배철지, 태헌 정명석, 현소화 이희경, 서강 김태호, 토화 이창수, 벽암 김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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