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쓰다. 2
시를 쓰다. 2
  • 박동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1.03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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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솔길

문총련 위원장 및 아트코리아방송 칼럼니스트
문총련 위원장 및 아트코리아방송 칼럼니스트

온전함으로 완성되기를 소망하기에

우리는 성찰이라는 치열함을 받아들인다.

물론 성찰의 관문은 설정단계로부터

우리사회로부터 격리된다.

뜨겁게 분노했으며 편 가르기를 쫓는

시대의식에 결코 편승할 수 없기에

따르는 외길이다.

 

온전함은 오솔길에 적합해 보인다.

자라투스트라 가 이렇게 말하였음을

대내이며 새벽을 맞이할 의무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시위 팽팽함으로 견줄

치열함은 늘 유지되었다.

이율배반이다.

 

시는 정수다.

문학 장르의 꽃임을 이해하는 우리로서는

시세계를 차용하기로 하였다.

시를 쓴다는 것은

노자의 독백처럼 화사함으로

결정되어야 온당해 보인다.

깨들음이다.

 

예컨대

우리는 숭례문참사에서 애써

우리가 겪은 갈증의 단면을 인식했다.

오천만 모두가 직시한 사건을 통하여

발췌된 이미지다.

과연 문화는 무엇이며

존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과 대답이다.

결코

온유함이 아니었다.

마녀사냥으로 끝판 막장드라마로

시나리오는 쓰여져야 했다.

허구로 가득한 외침이다.

 

이를테면

광화문 현판은 갈라져야 옳다.

나뭇결의 미학일뿐더러

사라진 숭례문 단청 빛 염료의 세계는

우리 모두가 잦아들

오솔길임을 깨닫고 있었기에

마녀사냥은 온당치 않았음을

우리 모두는 깨닫고 있어야 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치유를 위해서다.

 

인사동 전통문화거리의 얼개는

시다.

포도알 보랏빛으로 영근 드라마가

포송포송하게 향긋한 미소를 머금는다.

물론 아스라한 혈침 대못을

부등켜안고 절명했을

도도한 역사테제다.

그러기에

이 길은 오솔길이자 목단이다.

 

언뜻 언뜻 보이는 북촌, 서촌의

여명은 한양도성 신화와 만나고 있다.

삼각산이 마주하는

세찬 맞바람 모두가 소설처럼

맛깔스러운 새벽이다.

마치

백악, 인왕, 낙산, 목멱의 뿌리는

청계천 시원지가 만나고 있을

뚝섬은, 일만 이천 봉우리

금강 뫼의 정수와 아우라지를

이루고 있다.

물론 태백, 오대산과 함께다.

교향곡 악보처럼

펼쳐짐이 우리의 고요함을

요구한다.

원대함을 받아들일 준비다.

 

순정효황후 생가에 이르면 서울의

아스라함을 위하여

에세이가 한계가 이른 것을

이해할 것이 자명해 보인다.

기천석 그 자리에서 머무는

시간만큼 쌓이는 삼청동은

아마 북촌의 미학을 위하여

오롯한 침묵을 맞이한다.

숭례문 뒷골목 나무전봇대만큼

성성한 낙산 나무전봇대의 미소는

인왕산 자락 그곳의 나무전봇대

소요만큼 뒷걸음치며

인사동 자락의 나무전봇대가

문화 등대 빛처럼 아른 하기를

소망한다.

 

순정효황후 생가 이야기는

경희궁 돌담, 중학천, 소격소,

복정우물, 삼청동문, 탑골공원,

몽유도원도 길에 이르는 사금파리의

이야기를 꾸리며 정도전길

수진궁, 공평 뮤지엄 자락에서

짙은 커피 향으로

오히려 가다듬어 본다.

 

겸재의 불꽃처럼

온전함을 설계한다.

 

손님이 미래다.

오래된 미래.

문화가 답이다.

ART가 부자다.

신화를 찾다.

만화가 답이다.

그리고 시를 쓰게 되었다.

온전함으로 완성되기를 소망하기에

오솔길을 선택하였다.

 

 

소요

 

산은 계곡을 통하여 이야기를 꾸리지.

골이 깊으면 뫼가 높고 심연은 창연히

푸르름을 자랑하네.

오죽하면 산승이 이르기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정연한 준비를 내리치셨겠나.

 

한때 술은 술이요 안주는 안주로다.

기백을 논하던 나의 술잔, 내려놓기를

벌써 십삼 년이네.

우직 우리의 문화마을 꾸리기로

시작하여 하산을 꿈꿨네.

산이 되소서.

술잔 일으키며 나의 산천을

드높였던 삼십대의 술잔은

아득하지만

단주의 결심마저도 고군산열도

산맥의 곰소신화를 읽으며

유혹은 계속되고 있지.

 

아는가.

나의 초라한 법당은 오히려

플라타너스 곱은 손등 같은 애증으로부터

우리 산천을 받아들이고

향 사르기를 소망하였지.

 

, 큰 별자리는 없으나

살펴보시기를.

오장육부 가림 마개처럼

이미, 나의 등살과 갈비뼈차림으로

우리 마을, 숨소리를 떠안으려 하였지.

한 놈일지라도

죽비 가르듯 말일세.

다섯 묶음은 이미 한 마디마저도

엮지 못하였으나 소용돌이는

동심원을 그리며

나의 십삼 년 단주의 각고함을

용서해주게나.

 

만화가 답이다. - 신화를 찾다.

그것은 오전한 선언이지.

오래된 미래 - ART가 부자다.

그것은 아스라한 서글픔이네.

손님이 미래다. - 문화가 답이다.

산이 되소서. 의 정수라

받아들이면 어떠한가.

 

소요는

술은 술이요

안주는 안주로다.

 

 

 

창문

 

그대는 창문이 있는가. 나에게는

창문이 사라진 것을 잊은 지 오래지.

어찌된 일인지 창문의 필요성을 몰랐네.

아파트, 베란다, 큰 창틀 문 여는 소리가

익숙해져서인가.

창문 여는 소리마저 아득해졌네.

그대

오늘 창문 열어보세.

늘 바람소리 들렸던

상쾌함 같이 맞이해보세.

 

그대의 대문은 철 대문이겠지.

콘크리트 성벽을 쌓아놓고

금고문 열듯이 보금자리로 들어서면

오히려 감옥살이 아닌가.

자네, 보금자리 창문 찾아보게.

쌓아온 아파트는 구멍하나

변변히 뚫어놓을 생각 없었나.

내가 보기엔 창문은 없네.

그저 철 대문 같아서……. 말이네.

 

봉창 두들기는 소리가 어찌나

아련한가.

문풍지 사르르 떠는 한 겨울 체온이

시리던가.

강아지 컹컹거리는 사리문 사이의

뜨락은 전 우주의 넓이였지.

창문 너머 펼쳐지는 대우주였네.

아득하지만, 창문은 숨 막히도록

사라진 것을 오늘에서야 직감했네.

 

그대,

그대의 창문은 혹시 은밀하게

감춰놓았을지도 모르겠네.

아직도 직녀성을 찾아 열어둔

그대의 여정은

꿈결에서라도 계속되고 있는가.

혹시나 해서지만

아마 자네의 창문도 잠금장치

비밀번호를 부여했다고 보네.

그놈의 컴퓨터세계 말일세.

 

그대

요즘 얼마나 나들이를 하는가.

무심코 이 골목 저 골목 기웃거리며

마실 여행 즐기고 있나.

가다보면 옆 마을 언덕에 자리한

신화를 듣곤 하든가. 그때는

그런 노인네들 늘 계셨지.

이미 사라진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그 놈의 골목이, 창문 같아서

말이야.

 

 

가로수탐닉

욕심이라는 것이 스물 스물 기어 나와

유혹하네.

긴 호흡 니코틴 향내음도 넘지 못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가엾은 낙엽일세.

아니

낙엽을 떨구고 있는 나무들을

안아줄 가슴이 적어서지.

안타까운 이야기일세.

 

70년대 단풍 차려놓은 새 달력엔

빠짐없이 울긋불긋 낙엽이거나

멋진 유럽풍 가로수길 아니었나.

그럼에도 욕심은 전혀 딴전을 폈지.

가로수 나이 말일세.

우리 도시 가로수 나이가 없어서

좌절을 했지.

기껏 고궁 돌담사이 가로수만으로는

유럽풍 가로수 풍경을 따라가지 못하였네.

 

40, 50년 동안 지속되어온 욕심이네.

그러던 어는 날인가

몹시 비바람 치던 하 여름에

플라타너스 가로수를 가깝게 마나게

되었지. 곧 베어나갈 운명이었지.

율곡로, 창경궁, 종묘 사이 플라타너스를

살펴보며……. 조용한 응시를 하였네.

 

소나무, 아카시아, 플라타너스의

비교는 할 수 없지 않은가.

치우침이었지.

버림받은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애틋함을 넘어 버젓이 4, 50

수령을 지키고 있었지.

,

서울의 가로수가 이처럼

빛나 보일 수 없었네.

 

욕심이란 것이 스물 스물 기어 나와

유혹하네.

흥인지문에서 광화문 비각까지의

가로수 나이 한번 유추해보았나.

아니면

허리우드, 가회동 초입까지의

가로수 살펴보았나.

대학로 그곳 가로수 나무높이와

대한문 플라타너스 가로수

높이를 손가락으로 짚어 보았는지.

돈화문 앞 청계천까지의 가로수가

얼마나 멋진 명품으로 숨 쉬고

있는지를 서로 서로

나누어 보았는지.

 

욕심참으로 좋더군.

우리 가로수에 대한 갈망

말일세 그려.

 

문화의 에너지는 아마

온정어린 체온에 깃든 풍요로움의

섬세함으로 시작하려고 하네.

우리 삶의 정수이거니와

품격의 오브제는 가로수만한 것이

없지.

우리가 사는 서울의 가로수 욕심

한번 사유함이 어떠한가.

 

세종로 은행나무가지 갈레의 멋을

지켜주지 못하였는지 몹시

화가 나지만

억지로 소나무 심으려하지 말게나.

구토와 헛구역질이 나네.

 

나는

이미 찾았네.

우리의 플라타너스 가로수에서

답을 말일세.

욕심이라는 본질에서

말일세.

 

 

 

잡설

그대는 보이지 않는가.

독립문 휘호가 이완용이라더군.

광화문 현판은 금시 갈라져야 하듯이

밟고 있는 밑창은 이미 헤져

구멍 숭숭 우리 어머니 자식 몰래

입으시던 치마자락 기억이나 하겠는가.

사라져버린 금당 탱, 오묘했던

팔만대장경판 자작나무 여인 머릿결

숨소리 때문이라도 오늘

인사동 마당 뛰어가 보시게.

 

우리 젊은이들이 차려놓은 일월오봉도

내음자락 붓 봉우리 솟은 북인사, 남인사 마당

이방원의 소망을 담은 원각사지

탑이 국보 제2호라더군.

아마 숭례문 유고시 국보자락을 지켰겠지.

그래도 말일세.

이곳이 회화나무 골이라는 것쯤은

독립문 휘호처럼 떠안아야 하지 않은가.

말일세.

숭례문, 동십자각마다 패인

6.25흉탄 퇴적층을 향하여

멋들어진 다큐영화 제작하고 싶지 않은가.

 

인사동 자락 베란다 하나쯤은

커피 향과 함께 꾸리고 싶네.

잘 가라 독도여.

이제 그만 역사의 뒤안길에서

등대 빛으로 돌아가라.

 

왜 그런지 아는가.

소요여.

자네 독립문 휘호가 김구가 썼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래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것인가.

 

우리의 아버님은 그 사이 맥주잔 글라스에

한 홉 소주 들이키시며 신통치 않은

말씀 먼저 하셨는가.

이제 그만

독도여,

역사의 뒤안길에서 등대 빛으로 돌아가라.

 

아지노모도, 플라스틱, 콘크리트 미학을

탐독하고 있네.

부조리의 역설이라고

아닐세.

독도에 피는 꽃은 그저 바이러스만이

아닐세.

 

그대 아는가.

손님이 미래인 것을.

 

그것밖에는 어머니의 헤진

치맛자락의 따뜻한 품을 기억조차

할 수 없네. 인사동 마당에서

유령처럼 부대끼는 잡설이네.

그대 보이지 않는가.

 

 

올무

 

매듭은 망울이거나 올무지.

 

꽃망울처럼 맞이한 미소는

몇 번이고 돌이켜보지만

가로수만큼 음미하지.

늘 걷는 가로수 말일세.

 

나에게는

저 삼각산의 북한산성과

우리의 인사동 자락에 품는

매듭은 경계일 수밖에 없지.

 

범이 능선을 타고 경계를

하듯 한양도성은 북한, 남한, 가화

산성의 능선이더군.

 

이지러지던 조선의 늪지대 같았던

인사동 자락 역시

대학, 국악, 세종 길, 아우라지

아니던가.

용의 승천은 이무기처럼

천기누설 될 수는 없지 않은가.

 

태화 궁과 소격소의 정수는

삼청동 아닌가.

옥호동천에서 바라본

백악의 맷돌바위가

영운 곡을 시작하지.

여기서 매듭을 찾기로 하였네.

 

기천 석과 운용 대, 삼청동문과 복정우물

종친부와 중앙천 그리고 탑골공원

혜정교 매듭지으려고

꽃망울처럼 말일세.

 

순정효황후, 박영효본가의

이야기는 남산골 한옥이야기로

사그라질 꽃망울이 아니기에

몽유도원도의 정결은

오늘도 사무칠 것이

당연할세.

 

손님이 미래다.

오래된 미래,

문화가 답이다.

ART가 부자다.

신화를 찾다.

 

매듭 아닌가.

아스라한 꽃망울처럼

 

우리의 처연한 올무를

스스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는가.

 

 

 

직녀성을 만나다.

바람에도 결이 있다.

그저 별이 빛나기만 하겠나.

직녀성 그곳에도

별 바람일 것이야.

빛깔이 바람일세.

 

장자의 수포는 무엇이더냐.

오늘 맞이한 손님 같은 것.

물거품처럼 치솟는 우주의 꽃망울처럼

물결처럼 말일세. 손님이 미래란

것인가.

 

이끼처럼 밀려온 세월마저도

미래를 위한 계단이더군.

오래된 미래 같아서 말일세.

그윽한

방물장수 방울소리에

향 그윽한 커피 드시게.

 

은하수 너머에 직녀성을 찾아 나서게나.

문화 별자리 찾아서

말일세.

 

별똥별처럼 빛나던

찰나의 섬광은

인류가 쌓아온 지극히 당연한

바람결이거나 물결이거나 숨결처럼

ART가 넉넉한 눈빛일세.

 

결은

신화를 발현시키기에 족하네.

손님이 미래며

오래된 미래지.

 

문화의 소쿠리요

ART는 그 소쿠리의 과일 아닌가.

신화처럼 빛나는

별빛일세.

 

 

 

무제

인사동은 섹션이 크게 세 장르다. 하나는 우리 문화의 정수를 음미하는 골동과 그 체취다. 다른 하나는 계속 실험, 작동하는 화랑과 문학의 영혼 처다. 세 번째로는 모든 이가 즐기고 공유하는 관광지이자 안식처다. 이렇게 의미를 접근하다보면 가치와 인식이라는 증폭의 개념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 대한민국 문화전통 제1거리의 꼬리표다. 물론 그 퇴적층 하나하나는 앞서 시작한 관점으로부터 숱한 충돌과 정립이 요구된다.

 

인사동은 전통문화거리와 함께 세종로, 국악로, 대학로, 청계로의 연결고리이자 터미널이다. 북촌, 서촌을 잇는 플랫폼이다. 그러기에 모든 이의 사랑을 받지만 질타 또한 뜨겁다. 과연 화랑, 골동, 먹거리 정도의 개념정리를 가지고 인사동 담론을 접근할 수 있는가 에는 통렬한 사유가 요구된다.

당연한 것, 디지털시대에 무척이나 불편한 군상이 모여 인사동 이미지가 꾸려지거나 운영되어야 마땅해보인다. 섬처럼 고유할지라도 섬과 섬을 연결하는 골목의 미학이 맛깔스럽다, 라고 모든 손님의 가슴을 설레게 할 이야기가 탄생되는 마당으로 자리매김 된다. 물론 이천오백만 손님 모두가 한번쯤 인사동 진성고객이 될 수 있는 쇼핑마당 차림표를 꾸려야 함이 마땅하다. 이러한 목표와 숙제, 요구가 동시에 거듭되고 있다.

 

 

인사동은 누구나 그렇듯이 도시의 섬처럼 고유할지라도 섬이라는 규정을 선택할 수 없다. 관광산업의 중요성은 이제, 우리의 미래 산업의 중심과제이기 때문이다. 미시적 접근이 위험한 이유다. 전통문화 얼개를 소중히 존재케 해야 한다. 전체 기획자의 역량이 철저히 요구된다. 담론 속의 철학내재다. 어찌 보면 인사동 문화학교는 필연적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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