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명아 展 ‘풍경의 파수꾼’
탁명아 展 ‘풍경의 파수꾼’
  • 김한정 기자
  • 승인 2018.12.04 09: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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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종로구 우정국로에 위치한 올미아트스페이스에서는 2018. 12. 5(~ 2018. 12. 11()까지 탁명아 展 ‘풍경의 파수꾼’이 열릴 예정이다.

탁명아 展 ‘풍경의 파수꾼’
탁명아 展 ‘풍경의 파수꾼’

본인의 작업 출발점은 '어디에서 자란 식물이 식물다운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된다.

이 질문은 자생하지만 생장 환경이 열악한 식물-매연이 자욱한 고속도로 옆에서 자란 식물, 산업 폐기물에 찌든 도시 뒷동산에서 자란 식물, 아스팔트 틈에서 자란 식물-과 화분 속에 심어진 식물-재배되는 식물, 정원 속 식물-중 어디에서 자란 식물이 식물다운가 하는 것이다. 화분에서 키운 식물은 관상의 용도가 다하거나 말라 비틀어져 죽으면 폐기되는 운명을 맞는다. 일반적으로 용도를 다하거나 생을 마감한 식물은 옆으로 치워지고 새로운 화분을 사오는 행위가 반복되기 마련이다.

탁명아 展 ‘풍경의 파수꾼’
탁명아 展 ‘풍경의 파수꾼’

식물에게 이런 가혹한 운명은 피할 수 없다. 우리 주변의 많은 생명체 사이에 식물의 죽음은 사소하게 여겨진다. 만일 식물이 죽지 않고 생을 지속할 수 있다면 어디까지 자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식물의 세포는 처음부터 무게나 치수가 정해져 나오는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죽지 않는 식물은 어디까지 얼마나 자랄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뿌리내린 식물의 자란다는 의미는 높이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본인 또한 식물이 옆으로 자란다기보다는 위로 자라는 것을 성장의 이미지로 보았다. 작업은 본래의 키대로 자라지 못한 죽은 식물에 대한 관찰의 발로이자 방관자로서의 시선을 표현한 것이다.

탁명아 展 ‘풍경의 파수꾼’
탁명아 展 ‘풍경의 파수꾼’

본인의 작품은 어떤 것은 뽑히고 어떤 것은 남겨지는 이미지로 선택되는 식물의 생김생김을 인간의 삶에 투영시켜 본 것이다. 실상 우리 모두 인간 사회에 살기는 하지만 누구나 사람으로서 공정한 처우를 받으며 살지는 못한다. 그러한 처우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질 수도 있지만, 통상 살아가면서 획득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우리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정한다기보다는 타자와 환경의 영향을 더 받는다는 의미다. 현재 이곳에 있는 것이 원래의 내 자리인지 아닌지는 스스로 살아가며 찾아가야 한다. 식물 또한 자신이 무엇으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날지 알 수 없다. 숲과 정원 혹은 재배하우스든, 태어나서야 알게 되고 태어나서도 거기에 계속 묶여 있거나 혹은 옮겨 다니는 처지가 된다. 묶여 있으면 그나마 고정된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비해,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식물의 정체성은 혼란스럽기 마련이다. 본인은 이런 후자의 식물들에 주목한다. 재배된 식물로 태어나 건물 바깥에 방치되는 것들은 마치 유기(遺棄)된 사람처럼 보인다. 물론 그렇게 놓인 이유가 임시 벽으로 삼은 것이라 하지만. 이웃집 대문 앞, 이웃이 꾸며 놓은 정원 일부가 되어 놓인 재배 식물 역시 그렇다.

탁명아 展 ‘풍경의 파수꾼’
탁명아 展 ‘풍경의 파수꾼’

식물에게 알맞은 생장의 장소는 어디일까?

화분 속 식물에게 화분이란 하나의 틀이다. 틀 밖에 있을 다양한 토양과 벌레, 자양분을 화분 속 식물은 느낄 수 없다. 다져진 마늘같이 정제된 화분에 담긴 식물은 화분 바닥에 있는 자그마한 구멍 몇 개로 세상을 어줍게 느끼며 허공에 떠 있다. 까닭에 묶여는 있지만 정착하지 못한 꼴이다. 이렇게 묶여 다른 친구들과 줄 맞춰 진열된다. 때로는 현관문 앞 레드카펫 대용으로, 때로는 내 옆집 땅따먹기 대용으로. 쓰임새는 날마다 용처마다 다르다. 땅의 소유주였던 식물이 도시의 소유물로 바뀌어 있는 데에서 비롯한 처연함과 쓸쓸함이 느껴진다. 그럴 때가 있다. 어느 날 나 자신이 용도에 따라 분류된 날. 그 모양새는 마치 화분 속 식물이 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죽어 방치된 식물이 불편하다. 그럼에도 풍경 어디에든 식물이 있다.

탁명아 展 ‘풍경의 파수꾼’
탁명아 展 ‘풍경의 파수꾼’

또 다른 시각은 식물이 풍경에 미치는 영향이다. 지하철이 플랫폼에 멈춰서는 잠깐의 순간 동안 눈에 비친 풍경에서 낡은 주택 베란다에 놓인 관상용 식물들이 있었다. 식물과 겹쳐 저 뒤로 보이는 굽이치는 산등성의 숲은 그 화분 속 식물을 더욱 쓸쓸하면서도 외롭게 보이게 했다. 포착된 풍경은 식물이 마치 풍경의 파수꾼처럼 그 자체로 풍경의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 찰나 평범한 풍경에 이야기가 스며든 것 같은 순간이었다. 식물의 줄기가 뻗어 나가는 방향과 붙어 있는 잎사귀의 흩날리는 모습은 그 자체로 이야기가 있는 풍경을 자아낸다. 김 엄지의 소설 <주말, 출근, 산책: 어두움과 비>의 문장 중 네가 태어난 곳은 어디지? DNA 검사가 진행되었다. 언덕에서 태어난 무가치로군처럼 무가치를 빗대어 이야기를 갖게 된 식물은, 버려진 것 같은 무가치로 부유하다 풍경에 정착하게 되고, 나는 그것을 풍경의 파수꾼이라 부른다.

탁명아 展 ‘풍경의 파수꾼’
탁명아 展 ‘풍경의 파수꾼’

이 같은 운명의 식물을 그리는 질료로 본인은 견고한 표현에 유용한 유화나 아크릴이 아닌 불투명 수채화인 과슈와 건재료인 파스텔을 선택하였다. 아크릴과 투명수채화의 경계에 있는 듯한 과슈는 일단 칠하게 되면 정착돼 보이지만, 정착 후에도 물로 쉽게 스러지는 물감의 특성은 내가 관찰한 식물의 운명과 기질을 닮았다. 파스텔 역시 손이든 바람이든 그 표면에 닿는 무엇 때문에라도 쉽게 정착되지 않고 날아갈 수 있는 재료이다. 이러한 기질을 활용하여 본인은 식물의 운명, 즉 사소함과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뉘앙스를 표현하고자, 과슈로 그린 모든 작업을 최소한의 터치로 그려냄과 동시에 칠과 칠을 중첩해 채도를 떨어뜨려 부옇게 표현함으로써 특정 장소를 지시하기보다는 어디에나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임의의 장소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와 반대로 파스텔로 그린 작업은 최대한의 터치로 표현하여 식물의 장소 정착의지를 나타내고자 하였다.

어디에서 자란 식물이 식물다운가로 시작된 물음은 결국 식물의 처연한 생애로 귀결되었다.

 

탁명아는 용인대학교 문화예술대학 회화학과 졸업, 용인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회화과 수료 후 다수의 단체전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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