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코리아방송 = 최윤영 기자] 소윤하 선생 인터뷰 3'일제 개화산의 쇠말뚝'

박힌곳 : 서울강서구 개화동 개화산.
제보자 : 인터넷 성현군자 씨.
제보일 : 2001415
내 용 : 개화산에 쇠말뚝이 박혀있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3편 '일제 개화산의 쇠말뚝'

이 제보에 따라 2006915일 개화산에서 쇠말뚝 네 개를 발견 했다.

이 쇠말뚝이 일제가 박은 혈침인가에 대한 여러 가지의 확인과정을 거쳐 일제 소행의 혈침으로 결론을 내리고 1014일 고유제를 모시고 이날부터 부석마을 뒤의 귀 바위(바위모양이 당나귀 귀 같이 생겨서 부여한 이름)의 네 개의 혈침을 제거하기 시작 하였다.

귀 바위의 네 개는 1024일부로 모두 제거하고 원상회복까지 마쳤다.

그러나 이날 우연히 부석마을에 사는 김 정순(72)<02-2663-1287> 노파와 박 천규(59)<011-9960-5400>씨로부터 추가로 박힌 곳이 있다면서 그곳으로 안내를 받았다.

김 정순 노파가 안내 한 곳은, 귀 바위 맞은 편 북쪽을 가로 막은 능선 두개를 넘어서 바른 쪽 정상의 군사시설인 벙커에서 북서쪽으로 짧게 내려 온 작은 능선의 언덕 베기 바위와 능선의 끄트머리 부분에 위치한 바위에 쇠밧줄로 서로 얽어매고 턴버클로 꽉 옥죄여진 상태로 두 개 구역에서 10개가 발견되었고, 박 천규 씨가 안내 한 곳은 이곳에서 북쪽으로 건너 보이는 야트막한 능선 자락에 5 개가 박혀있었다. 모두 15 개가 새로 발견 된 것이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3편 '일제 개화산의 쇠말뚝'

이 쇠말뚝이 새로 발견됨에 따라서 새로운 시각으로 개화산을 알아 볼 필요를 느꼈다.

20061026亞細亞風水地理硏究所 申 尙潤(011-760-5099)所長招致하여 현장을 살펴보도록 했었다. 쇠말뚝이 박힌 자리를 신중하게 살펴 본 소장은 감정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開花山 전체형세는 巳山으로써 德陽山(행주산성)과 마주보면서 西海로부터 을 타고 오르는 惡氣를 막아 한양도성을 수직하는 역할을 부여 받은 중요한 입니다. 덕양산은 산이고, 이 개화산은 巳山, 또는 龍山입니다.

이것은 와 짝을 이룬 형상을 말하는 것이고, 개화산 자체로는 梅花滿開形 산입니다. 산의 높이는 나지막하지만 산의 자락 자락마다 매화꽃이 피어 있는 형상입니다. 매화낙진형은 매화꽃이 하나이지만 매화만개형은 말 그대로 매화꽃이 가득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개화산은 모양으로는 비록

작고 보잘것없다고 하겠지만 그 갖고 있는 가치는 높습니다.

따라서 일본 사람들이 큰 인물이나 장수가 못나도록 쇠말뚝을 박을 만한 곳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쇠말뚝이 박힌 곳이 모두 정확한 자리입니다. 군사 훈련용으로 박은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 국군들이 왜 이렇게 정확한 혈 자리에 쇠말뚝을 박아서 훈련용으로 사용했었겠습니까?

소윤하 선생 인터뷰 3편 '일제 개화산의 쇠말뚝'

새로 발견 된 쇠말뚝은 개화산의 정상에서 북쪽으로 뻗은 두 번째 봉오리라고 할 수 있는 곳에 군사시설인 벙커가 있는데 이곳에서 북쪽으로 약 50m가량 내려간 짧은 산자락에 불쑥 불쑥 튀어 나온 두 개의 바위가 있고 그 오른 쪽에 길이 80cm 넓이 60cm 높이 20cm의 시멘콘크리트로 만든 직 사각형의 구조물 중심에 지름 5cm나 되는 큰 고리 형 쇠말뚝이 콘크리트가 목까지 덮여 진 상태로 박혀 있었으며 그 앞쪽 밑 직선으로 2m30cm지점 바위에 한 개가, 이것에서 우측 2m80cm지점과 좌측 6m20cm지점 바위에 각 한 개씩 박혀서 쇠밧줄로 연결되어 턴버클로 옥죄어 져 있었다.

이곳을 개화산 쇠말뚝 제 2구역이라 명명했다.

<1구역은 처음 발견 된 부석마을 뒤 귀 바위 지역이다.>

그 아래에는 약 10여 평의 땅이 둥글고 평평한 곳이 있고 그 평지 앞 비탈 3m 아래 지점의 바위에 고리 형 쇠말뚝이 한 개가 박혀있으며 이곳에서 밑으로 좌 우 양쪽으로 두 개가 박혔는데 우측은 4m40cm, 좌측은 4m10cm의 거리로 박혔으며 이 두 개의 쇠말뚝이 박힌 바위의 두 뼘 앞으로는 약 3m 높이의 수직절벽이다. 이 수직암벽 밑 부분에 삼 각 형태로 세 개가 박혀있는데 제일 위의 가운데 것을 중심으로 좌측은 45cm, 우측은 50cm이고 좌와 우의 거리는 65cm이다. 이곳의 쇠말뚝은 모두 여섯 개다.

이들 쇠말뚝 역시 모두 쇠밧줄로 연결 지어 져 있으며 쇠밧줄의 중간에는 턴버클을 걸어서 꽉 죄여 져 있다.

연결된 쇠밧줄 한 끝이 절벽 밑바닥 땅 속으로 묻혀 져 있었다.

전체의 방향은 정북으로 향한 위치이다.

여기를 개화산 쇠말뚝 제 3구역이라 명명했다.

이미 제거한 4 개가 박혔던 곳은 제 1구역이라 명명했다.

이 제 2구역과 제 3구역에는 모두 4+6=10개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3편 '일제 개화산의 쇠말뚝'

박 천규씨가 안내 한 곳은 제 3구역에서 북쪽으로 산골자기 구렁지대를 건너서 안동 권 씨의 묘소 바로 옆 자락이다.

이곳에는 5 개가 박혀있다.

제일 위쪽의 것을 중심으로 직선으로 2m7cm지점에 한 개, 이것에서 더 아래로 2m95cm에 한 개. 그리고 가운데 것을 중심으로 좌측 85cm, 우측 55cm의 위치에 각각 한 개씩 박혀있다. 도형으로 그려보면 다이아몬드 형이다. 이 역시 쇠밧줄로 옥죄여 져 있었던 것을 누군가가 쇠밧줄을 자른 흔적이 남아 있다. 쇠말뚝 고리에 쇠밧줄의 끄트머리가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방향은 동에서 서쪽으로 향한 위치다.

이곳은 개화산 제 4구역이라 명명했다.

 

1구역 4 , 2구역 4 , 3구역 6 , 4구역 5 ,

2구역 이형철근 형 8

3구역 石針 1기 총 28

그러나 제 2구역의 제일 위쪽에 불쑥 솟은 바위 정수리에는 시멘콘크리트 가운데 박혔던 것을 제거하기 위하여 그 콘크리트를 털어내니 그 속에서 8 개의 철근 형 쇠침이 발견 되었다. 당초에 생각으로는 콘크리트 구조물을 만들기 위하여 사용한 철근으로 생각하였으나 이것들이 모두 45~50cm의 깊이로 바위 속 깊숙하게 박혀있음에 놀랐다. 뿐만 아니라 이것들은 큰 고리 형 쇠말뚝을 견고하게 보강하기 위하여 시멘트를 덮어 시우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 또한 혈침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것들은 15cm 간격의 타원형으로 마치 무슨 꽃잎을 연상하도록 박혀있다.

고리 형은 대형이다. 이놈의 머리인 고리의 굵기는 지름이 5cm나 된다.

이중구조로 만들어진 이놈의 몸통의 지름은 정확한 3cm.

그리고 몸통전체에는 머리카락 같은 나선의 무늬가 새겨 져 있다.

제작 된 형태는 예술품과 같이 정교하다.

무게는 15kg 가 넘는다. 전체 길이는 1m25cm.

철근 형이 박힌 형태를 꽃으로 보면 이 큰놈은 꽃의 술이고 이놈을 둘러 싼 철근 형은 꽃의 이파리에 해당하는 것 같다. 꽃의 이파리가 8 닢에 가운데 긴 꽃술 한 개가 있는 꽃이 과연 무슨 꽃일까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이것들이 박혀 있는 전체 면적이 8060cm에 불과 한 곳에 총총히 박혀 져 있었다. 이것은 呪術에 목적이 있었음을 확신케 한다.

1985년도에 제거했었던 삼각산 백운대 정상에 박혔었던 쇠말뚝도 이와 같이 총총히 박혔었다. 무려 15 개가 박혀있었다.

20061026일부터 본격적으로 제거 작업에 돌입하여 1211일까지 굵은 고리 형 혈침 15 개는 다 제거했다.

20061122일 오후 1시부터 2006125일까지 강서구청 공원녹지 과에서 인부 2 명을 보내왔다.

매일 오후 1시부터 4시까지 작업을 도왔다. 지원 일 수는 8일간.

강서구청지원 인부. 고맙소. 감사합니다.

신 원근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1120-2

이 동욱 서울시 중구 오장동101번지

 

2006128일 오후 1시부터 20061215일까지 52사단 215연대 1대대 소속 장병 13 명씩 지원을 나왔다.

이들은 오후 1시부터 오후 4시까지 4일 간.

군부대 지원병 (작업일)

52사단 215연대 1대대.

일병 박 형진 (128일 금요일)

이병 이 창언

이병 박 재형

이병 임 태헌 (1211일 월요일)

이병 황 상훈

이병 강 기운

상병 차 병훈 (1212일 화)

일병 김 동욱

이병 류 재승

일병 박 형진 (1213일 수)

이병 황 상훈

이병 이 창언

이 병사들이 지원 나온 것은 대대장 김 동섭 중령의 배려에 의하여 사병들의 정신교육차원에서 일제가 박은 혈침제거 현장체험을 하도록 조치한 것에 의한 것이었다. 고맙소. 감사합니다.

 

이곳에 박힌 이형철근은 일반 철근과는 약간 다른 점이 있었다. 동그란 원형이 아니다. 두께가 한 면은 15미리이고 한 면은 10미리다. 약간 납작하다.

뽑아 보니 약간씩 구불구불한 모양이 마치 뱀을 연상케 한다.

꽃술에 해당하는 굵은 고리형태의 쇠말뚝과 가장 가까운 놈을 1호로 치고 2. 3. 4. 5. 6. 7. 8호로 명명하였다. 1호와 3456호는 비교적으로 쉽게 뽑혔지만 2호가 말썽을 부렸다.

2호는 1128일부터 강서구청에서 지원 나온 인부들이 매달려 125일까지 바위를 파고들어 30cm이상 깊숙이 팠으나 꼼짝하지 않았다.

결국 강서구청에서 지원 나왔었던 인부들은 125일부로 지원이 끝났다.

그 뒤를 이어 지원 나온 52사단 215연대 제 1대대 소속 병사들이 이 2호를 뽑는데 매달렸다. 직경 10cm미만의 공간을 만들면서 바위를 파고들어 철근을 뽑아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바위의 표면은 연질이지만 속으로 파고들수록 강도가 높은 화강암이고 보니 쉬운 일은 아니다.

병사들에게 이 쇠말뚝을 뽑는 이유를 설명하고 작업하는 요령을 알려주었다. 현재 파고든 깊이는 30cm가 넘는다. 파고드는 구멍지름은 8cm정도다. 바위훼손을 최소화 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재 노출 된 부분은 약 70cm정도다.

소윤하 선생 인터뷰 3편 '일제 개화산의 쇠말뚝'

굵기는 지름 1.5cm미만이다. 그렇다보니 윗부분을 잡고 흔들면 흔들거린다. 하지만 흔들거린다고 흔들다보면 바위에 박힌 지점에서 부러지기가 쉽다.

그러나 손으로 철근을 잡고 힘을 주어 비틀면 밑뿌리까지 움직이는 느낌이 들면 위에 있는 나뭇가지를 휘어서 철근 윗부분을 밧줄로 묶고 망치로 철근을 치면 울려서 빠져 올라오니 철근의 밑뿌리가 움직이는 느낌이 있을 때까지 함부로 흔들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만약에 부러뜨리면 그 속에 박힌 뿌리를 캐내는 일은 엄청 어려우니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병사들에게 작업요령을 알려준 뒤 나는 제 3구역으로 내려갔다.

나는 3구역의 3호를 뽑은 자리를 원상회복하기 위하여 같은 석질의 돌을 빻아서 그 가루를 뚫린 구멍에 채워 넣고 다지는 되 메우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할 때 2구역 쪽에서 뽑았다! 하는 병사들이 왜치는 소리가 들렸다. 뽑았어? 하고 2구역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우려했었던 대로 부러뜨리고 말았다.

 

파고든 구멍은 직경이 10cm미만이다. 이는 바위의 손상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좁게 파고 든 것이다. 지름이 10cm미만으로 좁은 구멍의 깊이가 30cm나 깊숙한 곳에서 부러 졌기 때문에 속이 어두워서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긴 정으로 속을 더듬어서 쇠의 위치를 파악해야 했다.

부러졌다. 야단났네. 그러나 할 수 없지 이제 저 뿌리를 캐내는 수밖에 없다. 저 속에 끊어진 놈과 은근과 끈기로 싸워야 한다.

뿌리 체 뽑힌 줄 알고 기뻐하던 병사들의 얼굴이 실망으로 가득했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잘라진 놈 그 옆을 파라고 했다. 이들은 일을 안 해본 행정병들이다. 바위 위에서 불편한 자세로 망치로 정을 때리는 일이 처음에는 겁 없이 했었지만 계속 같은 일을 반복해서 해야 하는 일이라 질린 표정들이다. 그것도 육안으로 위치를 보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80cm나 되는 긴 정으로 위치를 더듬어서 어림잡고 망치질을 해야 한다.

잘 못하다가는 망치로 손을 때리기가 쉽다. 그래서 작업진도가 늦어도 좋으니 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우리가 이 쇠말뚝을 뽑는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이 일을 하다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원래의 목적에서 일탈 하는 일이니 조심해서 하기 바란다.

결국 이들은 이날 이 부러진 밑뿌리를 뽑아내지 못하고 돌아갔으며 군부대의 지원은 1215일부로 마감됐다.

다음 날부터 나 혼자 이놈과 싸웠다.

따지고 보면 강서구청에서 보낸 인부들이나, 군부대에서 지원 나왔던 병사들이나 이 2호 하나와 싸우다가 이놈을 뽑지 못한 체 지원이 끝났다.

나는 1216일부터 집요하게 이 2호를 공격했다.

깊이가 40cm가 넘도록 팠다. 정을 몇 번이나 교체해야 했었다.

 

20061231일 이놈이 또 부러졌다.

불어진 동가리의 길이는 13cm. 옆의 다른 것과 비교 해보면 속에 남아 있는 동가리는 대략 5cm정도로 짐작이 됐다. 현재 뽑혀진 다른 놈들의 박힌 부분 길이가 55~65cm이었기 때문이다.

2호가 계속 말썽을 부렸다.

이미 해는 서산에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끄트머리는 그대로 두고 20061231일을 마감하기로 했다. 나도 지쳤다.

이놈아! 그 속이 그리도 좋으면 그대로 묻어 주마.하고 구멍 속을 향하여 고함지르고 되 메우기를 하여 원상복구를 마쳤다.

그러나 마음은 개운치가 않았다.

 

집으로 돌아 와서 곰곰이 생각하니 부러진 동가리를 캐내지 않고 그대로 되 메우기를 한 것을 후회했다. 내가 이 쇠말뚝을 뽑는 것은 원상회복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땅의 운기를 막기 위하여 박은 것이 이 혈침이고, 땅의 운기를 틔우기 위하여 먼저 제거하는 것이 쇠말뚝이며 쇠말뚝을 완전히 뽑고 원상을 회복시켜야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쇠말뚝을 박은 자들은 의 씨앗을 배양시킬 목적이었고, 나는 이것을 제거하여 의 씨앗을 배양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지난 97년도에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녹진리 사달바위의 바닷물 속에서도 부러진 놈을 무려 두 달이나 걸려서 끝내 뽑아 낸 일도 있었다.

완전한 원상회복을 위함이었다.

이 개화산의 제 2구역의 2호 이놈!

 

200713일 제 2구역 제 2호 부러진 쇠 동가리를 마저 제거했다.

이 날 무려 4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이 2호를 공격했다.

20061231일 되 메우기를 했었던 것을 다시 다 파내고 부러져 박혀있던 동가리를 뽑아내기 위하여 혼신을 다했다. 잠시나마 이 쇠 동가리를 뽑지 않고 묻어 버릴 뻔 했었던 나 스스로에게 채찍질과 참회하는 마음으로 정신없이 작업했다.

 

오랜 세월을 두고 망치질을 해서 인지는 몰라도 쉬지 않고 몇 시간이나 계속 망치질을 해도 별탈이 없는 나의 몸은 아마도 이 혈침을 제거하라는 자연으로부터 받은 소명이 있었음인지도 모른다.

이곳은 오후 네 시가 되면 어두워진다. 땀을 줄줄 흘리면서 망치질을 하다 보니 정 끝이 계속 쇠와 부디 쳤다.

잠시 망치질을 멈추고 돋보기안경을 쓰고 구멍 속을 응시해 보니 그 속에 새끼손가락만한 것이 비슷하게 꽂혀 있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원상복구 할 때 구멍 속 청소용으로 쓰는 끌게 쇠꼬챙이를 이용하여 건드려 보니 약간 움직였다. 옆에 있는 참나무가지에 묶어 두었었던 밧줄 끝에 삐삐선 줄을 묶어서 삐삐선 줄로 올무를 만들어 조심스럽게 구멍 속으로 밀어 넣어서 쇠 동가리를 삐삐선 올무에 걸어 단단히 묶었다.

 

그리고 나뭇가지에 묶어서 잡아당기고 있던 밧줄을 손에서 놓으니 휘어졌던 나뭇가지가 펴지면서 삐삐 선에 묶였던 쇠 동가리가 탱 하는 소리와 함께 구멍 속에서 튀어 올라왔다.

이 순간의 느낌이란 형용하기 어렵다. 한 마디로 시원했다. 가슴 속 깊이 박혀있던 해묵은 암 덩어리가 탱하고 튀어 나간 기분이다.

요 독약 덩어리야! 네놈의 역할도 이젠 끝났다!

튀어 나온 쇠 동가리를 손에 거머쥐고 그 놈을 부라려보며 소리쳤다.

그리고 대한민국만세! 하고 고함쳤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를...

요놈의 길이는 4.5cm. 파고 들어간 바위구멍깊이는 65cm.

 

요 조그마한 것이 나의 마음을 무척이나 혼란스럽게 했었고 괴롭혔다.

지난 1231일 이것이 부러졌을 때 이것을 마저 뽑지 않고 되 메우기를 한 뒤에 어두웠었던 며칠 사이의 내 마음이 이젠 활짝 겐 하늘과 같이 맑았다.

그리고 바로 그 신바람으로 8호를 어렵지 않게 뽑았다.

 

이제 개화산에서 발견 된 27(굵은 고리 형 19 개 철근 형 8 ) 개의 쇠말뚝은 모두 제거했다.

 

20061213일 제 3구역 수직암벽 밑 땅 속에서 바위를 쪼아서 알 수 없는 형태로 조각해 묻은 것이 발견 되었다.

이 알 수 없는 형상이 조각 된 돌덩이를 발견하게 된 것은, 이 구역의 쇠말뚝 고리에 쇠밧줄을 걸어 옥죄어 진 그 쇠밧줄 한 끝이 암벽 아래 땅속으로 들어갔었기 때문에 그 쇠밧줄을 따라 땅을 헤집어 보니 쇠밧줄 끝이 삼각형로 꺾어져서 묻혀 있었고 그 밑의 흙을 긁어내니 뒤와 옆의 암벽과는 독립된 돌덩이로 발견되었다. 이 돌덩이의 머리 부분은 인공적으로 쪼아서 무슨 형상을 조각한 것이 확실하고 이 돌덩이와 옆과 뒤의 암반 사이에는 얇은 조각돌로 촘촘하게 쇄기를 박은 듯 박혀있었다.

 

이 돌덩이의 모양은 부채꼴이다. 약간 길쭉한 빵의 사분의 일 조각과 같다.

북동쪽 면은 타원형이고 남쪽과 서쪽은 두부모처럼 수직면이다. 발로 딛고 망치로 치니 진동이 느껴진다. 옆의 암반과는 완전 독립 된 덩어리다.

이것은 인공적으로 다듬어서 파묻은 것이라고 직감했다.

지원 나왔던 병사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이것이 자연 바위인가?

제가 보기에는 이 위에 이것들은 인공적으로 뭔가를 조각 한 것 같은데요 그리고 이 바위와 이 바위는 뿌리가 다르고 이것은 누군가가 파묻은 것 같아요. 그리고 촘촘히 박혀있는 쇄기모양의 얇은 돌 조각들도 그렇고요.

황 상훈 이병이 옆의 바위와 땅 속에 묻혀있는 바위 꼭지에 뭔가를 쪼아서 만든 것의 부위를 손가락으로 가르치면서 자신의 느낌을 말한다.

나도 황 상훈 이병과 같은 느낌이다.

그러면 이것을 보존시키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깨내는 것이 옳을까?

저는 깨내는 것이 옳다고 보는 데요.

?

바로 여기 암벽에 쇠말뚝을 박았는데 이것은 이 쇠말뚝과 관계가 있다고 느껴서요.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야. 그래 그럼 우리 이것을 부셔버리세.

!하고 대답하고 해머로 돌의 머리를 때려서 깨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돌의 질은 옆의 암벽과 동일한 화강암인데 강도가 높아서 잘 깨지지를 않았다. 나는 정을 대고 해머로 치라고 했다. 바위의 중심에 정을 박아서 해머로 치니 바위가 두 개로 갈라졌다. 지릿대를 벌어진 틈에 끼워서 재끼니 약간 움직이기는 하는데 뿌리가 꽤 깊은 모양이다.

이 날 열심히 작업했지만 제거하지는 못했다.

이 돌덩이를 말로만 듣던 돌로 된 혈침임을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렸다.

동양양생원의 신 동식원장에 의하면 그가 1995년 창덕궁 인정전 뒤에서 18m의 땅속에서 석침 12 개를 뽑아냈다고 했었다.

이는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제보에 의하여 창덕궁 수라간 장독대 뒤 좌로 아홉 발 우로 아홉 발 지점을 18m를 파면 혈침이 나온다고 했었던 실토에 따라서 캐낸 적이 있다고 했었다. 그때의 자료는 사진으로 보관중이다.

 

쇠말뚝과 석침을 제거하고 난 뒤 원상을 회복시키는 일이 목적이다.

그런데 쇠말뚝은 뽑고 난 뒤 뽑을 때 생긴 구멍을 되 메우기 하면 되지만 이 돌로 된 혈침을 뽑은 자리는 어떻게 원상을 회복시킴이 옳을까가 문제다.

신 동식원장의 자료를 보니 석침을 뽑은 자리에 구리판을 깔고 제사를 지내고 마무리 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보았다.

나는 그것이 아직도 이해가 되지를 않는다.

왜 구리판을 깔았을까? 그렇다면 이곳의 석침도 제거한 뒤에 구리판을 깔아야 하는 것일까? 문제는 회복작업이 중요하다. 땅의 기맥을 막았던 것을 제거하고 기맥이 소통할 수 있도록 회복을 시켜야 한다.

쇠말뚝을 뽑는 것은 원래의 氣道를 회복시키는 전초행위에 불과하다.

쇠말뚝을 뽑기만 해도 회복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곱씹어 보면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회복작업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서 쇠말뚝을 뽑은 자리는 뽑을 때 나온 돌가루를 모아서 되 메우기하고 모자라는 것은 같은 질의 돌을 빻아서 되 메우기를 한다.

이것이 동질성회복에 있어 옳다고 본다.

그러나 석침이 나온 자리는 과연 어떻게 원상을 회복시켜야 옳은 방법 일까가 문제다. 신 동식씨와 같이 동판을 밑에 깔아야 하는지 아니면 돌덩이만 들어내고 흙으로 채워 넣어서 다지면 안 될까? 퍽 조심스런 일이다.

 

지난 해 대구 팔공산 비로봉에서는 혈침을 뽑은 자리에 혈토라는 흙을 다져넣는 것을 보았다. 앞으로 연구 해 볼 일이다.

 

2007119일 석침 제거완료.

지릿대로 떠 올리고 밑에다 돌을 고이고 또 떠 올리고 또 고이고를 반복하여 어렵사리 양쪽을 깨어내고 가운데 토막인 사방 60cm정도의 돌을 밀어내고 고였었던 돌들을 주워 내니 원바닥이 나타났다. 이날 석침 제거 작업에는 조 재성 씨와 오 수월 씨의 역할 컸다.

석침을 발견하고 36 일 만에 완전히 제거 했다.

당초 이 바위는 길이 90cm. 넓은 곳은 60cm이고 높이는 높은 곳이 80cm. 서쪽은 높고 동쪽은 낮다. 서쪽은 넓고 동으로 가면서 좁아졌다. 윗부분은 울퉁불퉁하게 뭔가를 조각했고 밑바닥은 편편한 평면이다.

길쭉한 부채꼴로 생겼다. 옆면은 모두 맨질맨질한 수직면이다.

자연치고는 너무나 인조의 냄새가 나고 인조로 치면 너무나 자연과 같다.

바위를 들어낸 바닥은 서쪽에서 동으로 돌면서 안쪽으로 비스듬하게 기운상태로 돌이 깔려있고 중심은 흙이다.

사방 한 뼘 정도의 넓이는 모두 흙이다. 정으로 땅을 쑤셔보니 거의 동그랗게 생긴 모양이 흙이고 나머지는 돌이다. 이 돌도 망치로 치니 울림이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뜬 돌들로 추정이 된다.

바위를 이곳에 묻은 목적은 동그란 흙 구멍을 바위로 눌러 막은 것으로 보인다. 아마 이 흙 구멍이 땅의 숨구멍인데 그 숨구멍을 막아서 숨을 못 쉬게 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 해 본다.

그런데 오늘도 날씨가 몹시 차다. 땅이 모두 얼었다. 그런데 이곳의 흙은 그리 차지가 않다. 좀 심하게 표현한다면 흙이 따뜻하다는 느낌이 있다.

조 재성씨가 말했다.

마치 여름 흙 같아요.했다.

흙 한 줌을 쥐고 한 말이다. 여름 흙이 이런 흙일까?

이 사방 35cm정도 흙으로 된 이곳이 과연 大地가 숨을 쉬는 곳일까?

아무튼 이로써 이곳 개화산의 모든 악의 씨앗을 배양시켰었던 것은 모두 제거하고 선의 씨앗을 심었다.

오는 24立春日 正安祈願祭를 올리고 개화산의 혈침은 모두 제거하고 원상회복이 완료 됐음을 확정하고 져 한다.

 

200717

2007610일 일요일

나무 침 1호 제거 작업하는 데 왔었던 정현담 씨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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