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서장 - 4

문화의 서장은 이러한 충만함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반복했다. 박꽃의 넝쿨만큼이나 오묘하고 치열한 끈과 끈 사이의 팽팽함, 그러한 간극의 긴장감이 창작이라는 현장감을 유도했다. 플랫폼의 형상은 문화공장의 낱낱을 응변한다. 삼청동, 인사동, 충무로를 하나의 궤적으로 연결하는 실험은 그 자체가 현장성이다.

방송은 체온이다.- 여행은 미래다.- 아트가 부자다.라는 명제 속에 갈고리처럼 동여 맨 과제를 읽어 내려는 것만으로도 숙제였다. 목가적인 테이블과 걸맞은 꽃병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의 질문과 대답 속에 문화학교의 필요성을 요구했다. 사회과학의 시대, 경제 개발의 시대는 껍데기였다. 그 알곡은 문화정책개발시대이며 문화고속도로의 천착이 요구됨을 20여년을 화두삼아 걸어왔다. 플랫폼 업보에서 벗어나기조차 어려워 보였을 때 포럼, 문화학교, Mall, Angel, Dream 철학의 요구가 잦아들었다. 그야말로 목가적 테이블의 이미지는 그렇게 요구되었고 일백여일의 과정이 또다시 한 지점을 관통하고 있음을 이해했다. 문화의 서장을 읽어낼 힘과 용기가 싹트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느릅나무와 계수나무, 그리고 느티나무와 금강솔밭이 백악 숲에 깃들고 있다는 것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총리공간에서 소격동까지의 은행나무 가로수가 얼마나 멋진 명품인지는 알고 있었다. 삼청공원 벚꽃과 워싱턴 벚꽃 정원의 격은 오히려 삼청동 산 벚나무의 꽃비축제와는 결코 비교될 수 없음을 짐작하고 있거니와, 경복궁 뒤뜰 부둥켜안고도 남은 금강솔밭 정령들의 소요 곡은 꿋꿋한 우리의 문화정령 숲이었음을 미루어 깨닫고 있다. 청와대 허리춤 즈음 수줍게 자리 잡은 회화나무 결은 이미 조계사 앞마당 둥구나무 보리수만큼이나 아련하거니와, 인사동 회화나무 과부 골 이야기는 율곡의 신념만으로도 또 한 번 만나게 되었음이다.

문화의 서장, 목가적 테이블의 꽃병은 이미 흐드러질 대로 흐드러져 대학로 플라타너스 가로수 상아빛 축제를 만나게 된다면 우리도 이미 어엿하게 종로를 관통하는 플라타너스 축제를 소낙비 결처럼 마주하고야만다. 낙원동 플라타너스의 조각 공원만큼 아스라한 꽃병이 아니고 무엇이랴.

산 넘어 강 건너, 백두의 이름으로 잘려, 품 팔아 달려온 1910, 나무전봇대의 이름으로 세워졌던 세월의 깃발은 인사동 골목 켠에 버팅기고 있거니와 인왕산 인왕사 자락에 의젓하게 가로등을 비추고 있거니와 순정효황후 생가 길목마다, 서있음을 본다. 숭례문 골목에 숨어 있을 그 나무전봇대의 체온은 오롯이 저녁 스탠드등불을 깜빡거린다. 모가지마저 내놓은 낙산 나무전봇대의 이야기는 거미줄처럼 기어 올라온 일제 숯덩이처럼 장충단을 향하고 있지만, 을지로 장터에서 서대문 장터, 광화문 네거리, 숨은 그루터기에서 참맛의 나뭇결-나무전봇대는 어엿하기에 흙 마당 마다 마주하는 청자상감 사금파리와 하이얌의 미학처럼 조선백자는 호주머니 속을 만지작거리는 서투른 조바심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한번은 옥색마저 푸른 쪽빛에 하늘을 옮겨다 놓은 고려의 문화를 위하여, 서슴없이 붓을 들어 순지에 천년을 기록하고자 하는 갈망은, 이제, 목가적 테이블, 꽃병과 함께 꽃피는 계절의 이름으로 문화라는 서장에 직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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