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조의 '기도하는 여인'
전민조의 '기도하는 여인'
  • 김한정 기자
  • 승인 2018.06.26 13:2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트코리아방송 = 김한정 기자] 명동성당에서는 1989년 3월 8일 오후, 박정희 대통령 시절 공수특전단을 키우다시피 했던 어느 장군의 장례식이 쓸쓸하게 거행되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군사반란에 대항하다가 강제로 예편된 정병주 특전사사령관(당시 소장)의 장례식이었다. 그는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인생이어서 그런지 언론에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단촐한 추모객 속에는 평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장군의 미망인 강남희 여사가 하늘나라로 간 남편을 간절하게 추모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전민조의 '기도하는 여인'
전민조의 '기도하는 여인'

사진기자가 바로 코 앞에서 사진 찍는 것도 잊고 예수님께 기도 올리는 미망인의 두 손은 떨리고 있었다. 미망인의 남편은 전두환(대통령), 노태우(대통령),정호용(육군참모총장),장기오(총무처장관), 최세창(국방장관), 박희도(육군참모총장) 등 후배를 직접 공수특전단에 기용하고 사랑했던 장군이었다.

그는 성격이 매우 호방하고 의리가 있고 용맹스런 성격으로 1974년부터 5년 동안 공수특전단을 키운 아버지 같은 군인이었다고 했다. 그가 자식같이 거느리던 부하들은 쿠데타로 하루아침에 모두 대통령이 되고 국방장관이 되고 육군참모총장이 되는가하면 국회의원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1980년 1월 20일 강제 예편된 후 국가의 반란을 막지 못한 죄인의 심정으로 어떤 직책도 맡지 않고 지냈다.

자신을 지키려하다가 비참하게 죽은 부관 김오랑 소령의 묘소에 가끔 들리는 일 외에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이 고독하게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그는 실종 130일 만에 1989년 3월 경기도 양주군 송추유원지 부근에서 의문의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불의와 타협할 줄 몰랐던 군인으로 찬사를 받은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때 특전사사령관이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군림하면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강제로 연행하는 1979년 12.12 사건을 일으켰을 때 반란군을 저지하는 편에서 정승화 장군을 구출하려다 거꾸로 총상을 입고 체포됐다.

그가 자식처럼 생각하던 공수부대 제1공수(여단장, 박희도), 제3공수(여단장, 최세창), 제5공수(여단장, 장기오) 등 3개 부대가 모두 신군부측(전두환)측에 가담했을 때 그는 쿠데타군에 일체 타협하지 않고 저항했다. 결국 자신을 보호하던 비서실장 김오랑(육사 25기)소령은 사살되고 본인은 사령관집무실에서 벌어진 총격전으로 왼팔에 총상을 입고 전격 체포됐다.

그는 육사 9기로 군인의 길로 나서서 한국전쟁 때는 소대장을 했으며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는 안동농고 1년 선후배로 김재규씨가 6사단장을 할 때 참모장을 했다.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의 총에 비명을 달리할 때는 차지철 경호실장 밑에서 경호실 차장을 했는가하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할 때 공수부대를 맡아 키우고 있다가 그가 자식처럼 하늘같이 믿던 부하들에게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후로 세상에 염증을 느낀 그는 부인에게 “내가 좋아했던 모든 것은 군복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불태워 버리라”고 유언처럼 말했다. “군복을 남기는 것은 만약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국가를 위해 비록 몸은 늙었어도 군복을 입고 전투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지금 동작동 국립묘지의 다른 장군의 묘비 등에는 모든 장군들이 무슨 무슨 공로를 세웠노라고 숱한 찬사의 글로 덮여 있지만 제1장군 묘역 168호 육군소장 정병주 비문에는 아무런 글이 없는 묘비만 남아서 입으로는 의리를 말하면서 목적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들의 배은망덕(背恩忘德)과 기회주의를 말해 주고 있다.

전민조(다큐멘터리 사진가)
자료제공 : 포토넷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